이 글은 하비콕스가 쓴 “예수 하버드에 오다”(문예출판사, 2011, 오강남 역) 중에서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세 부분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책은 하비콕스가 하버드 대에서 ‘윤리적 사유’라는 분과에서 예수에 관한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한 내용을 모은 것입니다. 책의 내용이 정통 크리스천에게 거부감이 없지는 않으나 다음 세 부분은 예수의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어떻게 새겨야 하는지, 재림의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지 등과 관련하여 몇 가지 도전을 갖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10. 캠페인이 시작되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다는 데를 찾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셔,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누가복음 4:14~20).
예수가 누구나 그를 ‘목수의 아들’이라 알고 있는 나사렛 동네를 찾아가고, 안식일과 다른 중요 절기에 자기 부모와 함께 회당(시나고그)에 참석했을 때 그가 무엇을 기대했던가를 알기는 힘들다. 아무튼 그의 방문의 시작 부분은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그의 달변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후 뭔가 일이 지독하게 꼬이고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바뀌었다.
예수계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처라’하는 속담을 네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누가복음 4:21~30).
청중의 분위기에서 나타난 이 극적 변화는 매우 갑작스럽게 생긴 것 같다. 그것은 예수가 성경 절을 읽고 일반적으로 하듯 거기에 대해 주석을 붙이고 난 다음 아주 과격하다고 여겨지는 해석을 하기 위해 성경 다른 부분에 있는 이야기를 상기시키기 시작하자 생기게 되었다. 감탄하던 태도는 싹 가시고, 그의 말씀을 은혜롭게 생각하던 청중은 심술궂은 폭도로 돌변했다. 그들은 예수와 악수하며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는 말을 하려고 출입구로 가서 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를 벼랑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한 것이다. 적어도 종래까지의 표준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이것은 성공적인 설교가 못되었고, 또 캠페인으로서도 기약할 수 없는 출발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사야서에서 나온 성결 절에 대한 예수의 간단한 주석 중 두 가지 요인을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는 ‘주의 은혜의 해’가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의 선포요, 둘째는 이 은혜의 해에 혜택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데에 대한 그의 묘사였다.
학자들은 이 ‘은혜의 해’라는 것이 유대인의 율법 중에 규정한 50년에 한 번씩 지키기로 된 ‘희년(Jubilee Year)’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 제도는 레위기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라. 칠 년이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사십구 년이 끝난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자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오십 년이 시작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켜야 하는 해이다. 희년에는 씨를 뿌리지 말고, 저절로 자란 것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된다. 그 해는 희년이다. 너희는 그 한 해를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 너희는 밭에서 난 것을 먹게 될 것이다. (레위기 25:8~12).
이 법에 대한 더욱 상세한 규정은 뒤에 나오는 책 신명기에도 실려 있다.
매 칠년 끝에는 빚을 면제하여주십시오. 면제 규례는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주십시오. 주님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동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방 사람에게 준 빚은 갚으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신들의 동족에게 준 빚은 면제해주어야 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참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이 모든 명령을 다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신명기 15:1~5).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제도는 일괄적인 경제적 재분배에 해당되는 것이다. 종들도 자유함을 얻고, 모든 부채와 채무도 탕감되고, 융자도 용서를 받고, 저당 잡힌 토지도 본래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농지까지도 1년 동안 경작하지 않은 채 몰리는 것이다. 희년 제도는 축적되는 불의의 힘을 인정하고 근본적이고 과격한 해결책을 명하는 것이다. 부자외 힘센 사람은 더욱 부자가 되고 더욱더 힘센 사람이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획기적인 ‘뉴딜’, 다시 다같이 ‘출발점으로 돌아가 시작’할 기회가 필요한 것이다. ‘희년’을 영어로 ‘Jubilee Year’라 하는 것은 49년째 연말에 큰 ‘나팔’을 불어 그 해가 시작됨을 알렸는데, 히브리어로 나팔을 ‘Yobhel’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함정이 있다. 토라에 나오는 이 법규가 정말로 실행되거나 강행된 일이 있는가? 적어도 간헐적으로 이를 실시해보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증거는 약간 있다. 지주나 토지 대여 기관은 정기적으로 가명 계좌에 재산을 예치하고 그 충격을 피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 그 여파를 줄이는 길을 찾아냈다. 그러나 예수 당시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는 하나의 이상으로 받들어질 뿐, 정책으로 실천되지 않고 있었다. 성스러운 사람들이 듣고 공부하는 성스러운 책에 있을 뿐, 실제적인 법적 구속력에 있어서는 죽은 글자에 불과했다.
예수가 나사렛 사람들에게 그가 ‘주의 은혜의 해’를 실제로 선포하는 바라고 고지했을 때 그는 두 가지 레벨에서 그들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첫째, 회당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강행되지 않고 하나의 이상으로만 있기를 원하던 사람들이다. 예수는 그때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쪼들리던 가난한 사람들, 자기 땅이 없던 농사꾼들을 자기에게로 많이 끌어 모았다. 그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희년을 실시하면 크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길거리나 밭에서 그가 만나 이야기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길래 스스로 희년을 선포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 떠돌이 병 고치는 이, 정처 없는 랍비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단 말인가? 이론적으로 대제사장만이 해를 계산하고 49년째 되는 해, 안식일 중 안식일에 나팔을 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무딘 신경의 청중이라 하더라도 예수가 기득권 종교 엘리트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권위를 자기 손에 넣으려 한 것이다. 그것은 극히 도발적인 행위였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이 갈릴리 시골 골짝에서라도 그런 말은 역시 도전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가 이런 용감한 주장을 하고 난 후에도, 얼마는 이미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청중 대다수는 아직 그를 좋아했다. 그 후 이런 사람들마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을 했다. 아마 이런 희년의 선포로 혜택을 누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 그는 청중에게 그들의 성서에서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들을 상기시킨다.
첫째 이야기는 열왕기상 17:1~24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야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보면 유대 땅에 가뭄과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엘리야도 고생을 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로 가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곳에 그를 돌볼 과부를 준비해두셨다고 했다. 분명 이 과부는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었다. 엘리야는 그리로 가 그 여인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생겼다.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집안에 이런 불운이 닥친 것이 엘리야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방으로 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아이를 고쳐준다. 아이가 회복되고 엘리야와 과부의 사이도 다시 좋게 되었다.
다음 예수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라는 또 다른 이방인을 도와준 또 하나의 예언자 엘리사의 이야기를 끌어온다. 이 이야기는 더욱 괄목할 만한 것이다. 나아만은 그냥 비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적군의 대장이요, 어느 침략 전쟁에서는 이스라엘 소녀를 잡아가 자기 부인의 하녀로 삼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어느 쥐의 깊은 법대생이 묘하게 지적한 것과 같이 어린이를 유괴하여 주 경계를 넘는 것을 사형이라고 규정한 ‘린드버그 법’의 명백한 위반이다. 이런 사람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더 큰 미움을 받는 사람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지경이다.
나아만은 자기의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나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여종이 그에게 엘리사를 만나보라고 했다. 그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만나 그가 하라는 대로 강에서 목욕을 하는데, 어느 강에서 할까 약간 논쟁하다가 결국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씻고 나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잔뜩 화가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자기 동네 출신 젊은이 예수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고 “산 벼랑에까지”가서, 거시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어찌 어찌 거기를 피하여 그 가까이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25. 부활절 이야기
그러나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보니, 남자 둘이 눈부신 옷을 입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부인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 해보십시오.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1).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할 때쯤 헤서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리스도교에서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거기 대해서 내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셋째,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해 결코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불확실성의 요소를 지닌 채 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많은 사람들 –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모범적 그리스도인들이지만 – 이들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처음 한두 해 부활이야기를 기피했다는 것이 어찌 놀라운 사실이 될 수 있겠는가?
한두 해가 지나 예수의 이야기에서 이런 핵심적인 요소를 다루지 ㅇ낳고 지나가버리는 데 대해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갖기 시작했다. 가장 비판적인 성서학자들마저도 흩어져 기가 죽었던 제자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가 죽었지만 그가 죽음으로 영원히 끝난 게 하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를 죽인 그 잔인한 패거리들이 그대로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들이 왜 다시 모여서 예수가 했던 그 위험한 일을 계속하겠다고 나섰는지 상상하기가 힘들다.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은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학자들이 ‘부활출현’이라고 부르는 성경 구절에 기술되어있다. 그러나 이 경험들은 경험적 역사와 맞닿아 있는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경계선 상에 둥지를 치고 있기 때문에 보통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가 없었다. 진정한 신비 체험과 마찬가지로 이런 경험들은 일상의 언어로 기술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상의 언어란 일상적 사건만으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적 체험은 언제나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기에 신비체험자들은 상징이나 노래나 침묵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침묵 수단’은 학생들에게도 불만족스러웠고, 궁극적으로는 나 스스로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는 뭔가 침묵을 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 일을 준비하는 첫 단계로 사복음서에 나온 부활이야기를 여기에 대한 여러 주석서들과 함께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부활이야기를 강의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동안 그 중요 성경 절을 주의깊에 연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 살펴보고,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구약에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이야기들은 ‘불멸과 하등 관계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금방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형이상학적인 관심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윤리적’ 요구에서 생긴 인간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죽은 다음에 새로운 생명을 얻겠다는 여망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무감각하고 힘센 자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원을 해원하셔야만 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희망을 특별히 힘찬 웅변으로 선언한다. 그는 서정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비로소 의가 무엇인지 배우게 될”날을, “악인들은 옳은 일 하는 것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이사야 26:9~10).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비록 의로운 이들이 고난을 당하고 죽을지라도,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입니다”하고 예견한다.
이와 같은 정서가 예언자 에스겔의 시적인 표현 속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제국의 침략으로 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그 뼈들이 다시 붙어 일어서리라고 했다.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놓으셨다. 그런데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에스겔 37:1~6).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영원한 생명이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한 신학적 상징이었다……. 그것은 영생에 대한 염원이 아니라 공의에 대한 목마름이었다”고 했는데, 올바른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나사렛 출신의 이 의로운 랍비를 부활시키셨다는 이야기는 분명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옛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예수의 부활이야기를 그때까지 내려오던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읽게 되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부활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임과 마찬가지로 바로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부활은 예수가 한 무엇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한 무엇이라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부활이야기는 예수가 스스로 죽음에서 깨어났다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 “하나님이 그를 일으키셨다”고 되어있다. 이사야와 에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시다. 이런 사실은 당연히 유대인들이 유월절 만찬에서 되풀이 하는 출애굽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나는 이런 예식에 참여했다가 비록 모세가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인도해냈지만 이 유월절 예식에서 모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한 일이 있다. 이것은 랍비들의 지혜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진정한 해방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중심인물로 부각시키는 일을 피했던 것이다. 이런 랍비적 통찰은 다시 한번 우리가 예수의 부활이야기를 볼 때,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뿐 아니라, 예수 ‘이후로’ 계속된 유대 역사에 비추어서도 볼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잠시 후 보게 될 것인데, 예수의 이야기는 옛 이야기의 연속이지만, 새로운 차원을 첨가한 것이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출애굽 사건은 3천 5백 년 동안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산 전통으로 아직도 내려오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속박에서 해방하심으로 바로라는 독재자 하나의 콧대를 꺾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올 모든 폭군들에게 계속적인 위협이 될 전례를 남기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이 전개됨 셈이다. 본래의 출애굽은 유대인들의 심성 밑바닥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확신을 새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교로, 나아가 세계 여러 곳의 문화들 속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역사에서 되돌릴 수 없는 무엇을 시작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새로운 미합중국을 위해 국새를 제작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도안사에게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는 그림을 그리라고 부탁했다(이 도안은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미국 흑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완전히 자기들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들이 아직도 노예로 있을 때 그들은 “Let My People Go”라는 노래를 불렀고, 인권 운동 기간에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에 “We Shall Cvercome” 하는 노래를 불렀다. 출애굽은 해방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왜 출애굽 이야기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다 유대인이었다- 에게 부활이야기를 위한 역사적 패러다임을 제공할 수 있었던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제2의 출애굽’이라 해왔다. 예수를 죽음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 죽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에 대해서뿐 아니라 예수와 같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폭력적 힘에 대해서도 치명타를 입히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독재와 노예적 삶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처럼, 부활의 승리도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전환점에 이르렀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겼다는 확신과 함께 삶을 불구로 만들고 파괴하는 모든 것을 이기실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그들이 노예생활에서 구원받은 기억을 생생하게 하기 위해 쓴 나물과 누룩 들어가지 않은 떡(무교병)을 먹는다. 예수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이억하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다. 이 두 예식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두 예식 모두 엄청나게 뒤집어엎는 파격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 모두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가장 암울한 환경 에서마저도 희망의 근거가 되는 ‘파격적’기억을 불러오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 사건에서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했던 분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신 바로 그 하나님의 부활 사건에서 다시 그의 해방시키는 힘의 범위를 더욱 크고 깊이 하셔서 역사하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부활이야기는 출애굽 이야기와 같이 주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뿌리를 박고 있는 힘 있는 이야기, 맞습니다. 역사를 통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던 사건입니까?’ 만약 흩어졌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모이게 하여 세상에 나아가 예수가 하던 일을 계속 수행하도록 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의 제자들만 그것을 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습니까? 혹시 제자들이 지나치게 소원했기 때문에 스스로 믿게 된 일종의 환각 작용이나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나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니었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직한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에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정직한 대답은 내가 학생들을 이 정도까지만 데리고 올 수 있을 뿐 더 이상 갈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부활 현현’을 기록한 성경구절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고 빈 구멍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복음서 이야기들 중 가장 오래된 마가의 원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 세 여인이 예수의 시신이 누워있던 무덤에 오르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세 여인은 그 당시 관례대로 예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고 무덤으로 갔다. 가면서 무덤 어귀를 막는 데 쓴 그 큰 돌을 어떻게 굴려낼까 걱정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그 돌이 이미 옆으로 굴려져 비켜 있었다. 놀라운 마음으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흰 옷을 입은 어떤 젊은 남자가 거기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젊은 남자는(성경에는 천사라 하지 않고 ‘젊은 남자’라고 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마가복음 16:6~8).
놀랍게도 마가복음은 “그들은 무서워서”하는 말로 끝이 난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마가복음 사본에서는 여기가 끝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격 번역본은 이 다음에 여러 절을 덧붙였는데, 이것은 나중 사본들에 나오는 말들이다. 아무튼 학자들의 합의사항은 나중에 나온 절들은 다음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상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심지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이 ‘끝 아닌 끝’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덧붙인 것이라는 설이다. 겁에 질린 여인들이 너무나 무서워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했다니? 예수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 있는가? 이제 그러면? 그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본래의 마가복음은 이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여인들은 예수를 보기 위해서는 예수가 가르치고, 병 고치고, 거룩한 로마 황제의 제국을 대신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침으로 스스로를 말썽의 주인공으로 만든, 그 척박한 땅 갈릴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바로 거기, 그가 사회에서 버림받고 궁핍한 사람들 속에서 그의 삶 대부분을 보낸 바로 거기가 그들이 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엉성한 부활이야기는 왜 어떤 사람은 ‘더 이상 죽어 있지 않은’ 예수를 볼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놀라운 의미를 말해준다. 이 이야기에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식론적 요점’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미신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기들의 삶을 위한 갓돌(capstone)이 되는지(이 둘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수가 그의 가르침에서 여러 번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누가복음 17:20). 이와 마찬가지로, 소외된 자들과 짓밟힌 자들의 원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해원 작업의 연속으로서의 부활은 그 본성상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의 무엇이거나 심지어 공정한 조사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러기에 부활 사건에 대해 몇 안 되는 자료를 두고 아마추어 탐정가에서부터 학문적 분석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렇게 끊임없이 샅샅이 뒤집어보아도 모두에게 확신이나 만족을 줄 수 있는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이 채택한 방법의 연구대상이 될 수 없는 무엇을 다루는 것이므로 결코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 예수를 ‘보기’ 위해서, 여인들은 그가 전에 하던 일을 지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어떤 방법으로- 다시 계속하고 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성을 드러내주는 하나님의 사자 예수를 그가 있는 곳, 그가 처음 그의 담대한 과업을 시작했던 그 갈릴리로 감으로써만 ‘만날 수’ 있다. 환소브리노가 말한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만 한다.”
26. 우주의 홍소(哄笑)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하더라도 너희는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하더라도 너희는 믿지 말아라.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에까지 번쩍이듯이, 인자도 그렇게 올 것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들 것이다.”
(마태복음 24:26~28).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누가복음 24:50-53).
분명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예수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를 놓고 어느 정도 혼란을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 중 더러는 지금 ‘승천’이라 부르는 것을 가지고 대답했다. 일종의 ‘수직적 해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활한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남겨두고 하나님과 함께 하려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체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경우 역사 비평적 학자들의 업적에 주목해보면 도음을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내가 여기 인용한 누가복음 본문은 너무나 여러 번 편집되고 첨삭되고 재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약성경 중 완전한 각주를 갖춘 번역판을 보면, 모든 사본들의 차이점들을 나열하는 데 거의 한 페이지가 다 들 정도다. 어떤 사본에는 예수가 떠나면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했다 하고 다른 사본에 보면 그런 말이 없다. 어떤 사본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가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함인지, 자기 손과 발에 있는 상처를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 다른 사본에는 “그가 그들로부터 들려 올라갔다”거나 “그가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되어있다. 이 모든 편집상의 차이들은 부활 이후 예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가 초대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이슈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승천’사상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바랐다. 그러나 해결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주로 오래된 어떤 영어 번역판에 보면 ‘up’이라는 작은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더 믿을 만한 사본적 증거에 근거하여 번역된 새번역본에는 이것이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이 합의하지 못한 문제를 우리도 떠안고 있는 셈이다.
‘수직적 해결’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결함은 그것이 공간적 메타포(은유)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그림 중에는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두 발을 제자들이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린 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 있다. 내가 이 그림을 환등으로 보여줄 때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한 학생은 이 그림을 보면 우주선 발사가 생각난다고도 했다. 한 시대에 훌륭한 효과를 가지고 있던 상질들이 다른 시대에서는 혼란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조롱을 받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분명 우리는 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의도를 바르게 전달할 새로운 메타포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려고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부활한 예수가 되살아난 시체도, 심령체적 환영도 아니었고, 뭔가 새롭고 특이한 무엇이었다는 그들의 확신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전과 같은 방법으로 자신들과 함께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과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부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전 우주의 엄청난 재창조와 재생과정에서 처음 일어난 행위였다. 그러므로 부활한 몸의 본성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형이상학적 물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복음서의 이야기가 편집되기 여러 해 전에 사도 바울은 그 당시 근본주의자들을 반대하여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고린도전서 15:50)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다시 부활을 정신적인 현상으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든 모든 피조물의 부활이든, 부활은 그가 말하는 ‘영체(spiritual body)’와 관계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폴 틸리히의 설명이 도움이 되는데, 그에 의하면 이 이상스러운 어구는 자가당착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중부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중요하기 그지없는 말이라고 한다. ‘영’과 ‘체’라는 이 두 가지 모순되는 낱말을 이처럼 과감하게 융합한 것은 우리가 시와 상상의 세계에 있음을 말해주는 신호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 몸 속의 혈구마저도 광대한 상호 의존의 거미줄 안에서 가장 미세한 미생물에서부터 가장 거대한 성운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것과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는 점 때문이다.
예수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부활 그 이후에도 계속 신비한 형태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새로운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가 변혁한다는 것이었다. 영체란 시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 순전히 영적이기만 한 불멸이거나 단순히 보통 몸이 영구히 다른 형태로 계속되는 환생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역사와 자연 양쪽과 다 관련되어있다. 영체라는 시적 상징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세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나중에 하늘에 가서 먹을 파이’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나라가 임하옵시며’의 종교다.
이런 생각은 생태 문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과 동물과 식물은 이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다 함께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 우주선 자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운행하고 있는 운행하고 있는 이 우주 바다 자체도 위험하다. 모두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공동의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역사의 궁극 완성을 이야기할 때 나 개인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만 해서도 안 된다. 호모 사피엔스(인간종)가 나타나기 이전 억겁의 세월을 지탱해온 실재를 위한 희망이어야 하고, 그 희망은 목성의 가장 먼 달이나 지극히 작은 우리 이웃을 위한 희망이기도 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나오는 소리가 욥에게 말한다. 큰 그림 속에서 네 위치가 무엇인지 살피고 과대망상이나 착각하지 말지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그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할 때”, “네가 거기 있기라도 하였느냐?”(욥기 38:1~7 참조) 요즘 말로 풀어보면 나선형 성운이 식기 시작할 때, 혹은 세 뿔 달린 공룡이 지구에 배회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하는 말과 같다. 이것이 우리를 인간으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한다. 부활에 의해 촉발된 그리스도인의 미래관은 지렁이와 블랙홀을 모두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우주의 흙이나 바위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 일종의 수사에 불과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생태 운동이 일어나고 모든 미분자가 상호 의존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그것이 더는 이상스러운 소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심지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빵 조각을 들고,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한 말씀도 더욱 의미 있는 말로 들리게 해준다. 그의 몸은 우리 몸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얼개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선견지명이 있던 예수회 고생물학자 피에르 테아르 드 샤르뎅도 지구를 두고 생명의 미사가 계속 드려지는 제단이라 했던 것 같다.
지구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우리의 희망은 지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탄식하고 고통’하는 것은 인간만도 아니고 우리의 이 행성만도 아니고 전 피조물이다. 우리와 함께 피조물 모두가 인간의 손에 의해 당하는 수모에서부터, 그리고 죽음과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로마서 8:18~24).
이것이 엄청나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보다 더 작은 것으로 만족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결국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부활을 통해 모든 노예적 착취에 희생된 사람들을 해원하시고, 우주를 죽음의 포로로부터 해방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이름 붙일 수 없는 분이 아직도 우리 중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로 엄청나고, 어쩌면 너무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희망의 본질이다. 버릴 마음이 있으면 버려도 좋다. 생각 깊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리 자르고 저리 잘라 간편하고 활기 없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예수가 어떻게 떠났는가 하는 데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혼란스럽고 다기한 것이라면, 그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더욱 그러했다. 요한복음은 피조물의 재생이 예수와 함께 시적되어,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더 이상 간여하는 일이 없이 계속될 것이라 보는 것 같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 심지어 자기들이 죽기 전에라도 있을 그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반된 경쟁적 견해들은 아마겟돈을 다루는 장에서 이미 어느 정도 논의했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교회의 역사적 신조로 들어오게 된 믿음은 ‘그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선언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기껏해야 헷갈리는 개념에 불과하다. ‘재림’, ‘다시오심’, ‘그리스도의 돌아오심’, ‘영광스러운 나타나심’, ‘심판의 날’ 같은 일련의 상징들은 모두 그들의 마음에 혼란스러운 난무같이 들쑥날쑥이었다. 사복음서 자체가 이 문제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느 신학자들은 재림이라는 생각은 마치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속 임재해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오도 내지는 오역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단어는 파루시아(parousia)로서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귀환, 도착이라는 뜻도 있지만, 임재, 나타남이란 의미도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책 하나님의 오심(The Coming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루시아를 재림이나 다시 오심이라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적 부재를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기별은 하나님이 오셔서 결코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데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칭하기 위해 파루시아라는 말을 쓰고 있다. 제6장 14절에 나오는 파루시아를 영어 흠정역(KJV)에서는 coming(오심)이라 번역하지 않고 appearing(나타나심)이라고 번역했다(표준새번역과 개역성경에도 나타나실 때까지로 됨). 예수 자신은 마태복음 마지막 절에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약속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8:20).
불행하게도 재림의 생각이 그리스도교 용법에서 상당한 해악을 가져왔다. 그것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나 말세의 시간표 작성자의 기발한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타남이라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라 여겨진다. 나타남이란 지금까지 계속해서 여기 있던 분이 –어느 날 새롭고 더욱 충만한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오심(return)이라는 말을 완전히 버릴 마음은 아직 없다. 학생들에게 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기자 없었다. 그 이유는 포로로 잡혀감과 되돌아옴이라는 주제는 성경 신앙에 너무나도 중심적인 것이고, 특히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주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것들을 다 버리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주제는 오늘 많은 사람들의 귀에 공명을 일으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인정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의 부재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함께하실 시간을 소망할 수 없는가? 다시 유대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여러 세기에 걸친 박해와 추방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랍비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포로 중에도 계신다’하는 놀랍고도 심오한 통찰에 이르렀다. 하나님 자신이(그 하나님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경우에는 아래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여성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실향성과 소외감을 공유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란과 함께 랍비들은 셰키나(shekinah), 곧 하나님의 여성적인 면으로서, 관계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포로 상태에서라도 충실하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도 한다. 유대인이 보는 바에 의하면, 포로 생활과 귀환, 부재와 임재는 시간적인 차원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경험에 불가피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양면으로서, 영원히 우리에게서 떠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학이 유대 사상과 더욱 유익한 동반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주일, 다음 해, 혹은 다음 천 년에 있을 것이라는 식의 시간적 의미로서의 재림 개념은 어쩔 수 없이, 버려진 사람들에서 보았듯, 무모한 사변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다른 한편, 유대인들의 셰키나 개념은 감추어진 하나님이 감추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호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파루시아를 부재 중이시던 이의 다시 오심이라 보는 대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던 분의 나타나심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길에서 만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길을 다 가서 함께 먹을 때 나타난 옛를 인식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돌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특히 이처럼 정신없이 돌어가는 경쟁 사회에서 부적응자, 낙오된 자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최소로 기대하는 그 런 사람들 속에 다시 돌아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제17장에서 본 것과 같이 재림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세상’, 곧 시간과 공간의 연속이 언제 끝나는가 하는 추측과 언제나 연계되어있다. 이런 것들은 사춘기 후반 학생들이 골몰하는 ‘거창한 질문들’에 속하는 것이다. 매년 이런 문제들에 대해 기말 논문을 쓰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많다. 보통 확장하던 우주가 본래의 바늘 끝 정도로 축소된다든가 거대한 블랙홀이 모든 것을 진공 속으로 삼킨다는 등의 최신 이론을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보통 학생들이 이런 방향으로 뛰어드는 것을 말리는 편이다. 결국 이 과목은 윤리적 사유에 관한 것이지 우주론에 관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학생들이 어떤 결말을 가지고 나올까 보려는 마음에서 종종 나의 원칙을 완화하고 그들의 요청을 허용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본능이 완전히 틀린 것마는 아니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종말론은, 누가 언제 현명하게 말한 것처럼, 끝 시간 혹은 말세로서의 종말론이 아니라 시간의 종말, 곧 이 갑갑한 시간적 울타리를 넘어선다는 의미로서의 종말론이다. 우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솟에 살지만 뭔가 그 이상의 것, 뭔가 더한 것이 있으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어릴 때 교회에서 “주의 나팔 소리나고 세상 끝이 이르면……”하는 가사로 시작하는 찬송가를 신명나게 불렀다. 나는 ‘세상 끝이 이르면’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히 여겼다.
나는 아직도 거기 대해 궁리하고 있다. 실로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적 담론의 한계점에 이른다. 이 이후에는 이야기가 시로 폭발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을 상정하지 않은 시간이란 상상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궁극 운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견해가 그 범위에서는 힘차야 하지만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겸손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거기 대해 노래할 수는 있지만 묘사할 수는 없다.
학기가 끝나갈 때쯤이면 나는 학생들이 고전적 상징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상징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나가길 원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새로운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의만 가지고 설득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웅변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모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미술가, 작곡가, 특히 시인이 있는 것이다. 나는 또 학생들이 ‘윤리적 삶’은 윤리적 사유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마음에 분명히 각인하고 나가도록 하고 싶었다.
한동안 헨델의 할렐루야 코러스 곡을 화면에다 비추어주고, 모르몬 태버나클 합창단이 부른 테이프를 틀어주면서, 학생들에게 원하면 일어나서 같이 따라 부르라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게 했다. 어떤 몇백 명 학생들의 합창 소리가 강의실 벽을 흔들 정도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부학장이 나에게 은근한 말로 이런 일이 학문적인 것을 다루는 강의실에서 완전히 적절한 활동이 아닐 수 있다고 귀뜸했다. 그리고 나서 한 2년 모차르트의 진혼곡 중 얼마를 틀어주고 학생들에게 그저 앉아서 듣기만 하라고 했다.
나중에는 한 학기나 한 세상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어떻게 끝장나게 되는가를 읊은 위대한 시인들의 시를 중심으로 시 낭송을 했다. 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읽었는데,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욕심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이 불로 끝날지 모른다고 했다. 엘리엇의 시도 읽었는데, 그는 세상이 폭발이 아니라 흐느낌으로 끝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모든 시인들보다 월등한 시인은 단테였는데, 그는 그의 신곡에서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하늘 문에 이르는 그의 점진적 상승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 과정에 대한 그의 영감적인 환상을 그린 것이라고 읽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작품 초반에서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생생한 묘사를 한 대가임을 증명했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존전에 가까지 갈수록 시각적 이미지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다른 표현 방법을 강구한다. 최고의 천상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잠깐 멈추어서 그것을 듣는다. 그리고 나서 “Me sembiana un riso del universo”라고 기록했다. “우주의 홍소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 내가 이 과목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끝나갈 무렵, 나는 학기 마지막 날 단테의 시를 처음에는 이탈리아 말로 읽고 다음 영어로 읽었다. 이것은 모든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것은 비유와 같이 놀라움을 가져다주는 클라이맥스였다. 상상력이 낳은 최고의 명작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망을 찬양하는 것이다. 종강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을까 생각할 수 없었다. 전 우주가 웃는다? 이 지구 양자를 둘러싸고 있는 태양계, 은하수, 그리고 몇천억 무한한 은하계가 모두 요절복통한다? 고통으로 찌든 탄식과 눈물의 전 역사를 무슨 방법으로든 따라잡는 홍소? 그렇게도 많은 죽음과 패배 후에 생명의 하나님이 웃으시는 그 최우의 웃음? 이런 것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일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적은 것을 바랄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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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언제나, 물론 자기들의 ‘팍스(pax)’ 혹은 ‘평화’를 유지시킨다는 이해타산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평화에 대해 말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들은 그들의 군대가 반역자들을 박살내고 더욱 많은 점령지를 향해 진군하는 같은 시각에 온 산천을 평화의 신전으로 뒤덮이게 하고 평화를 촉진하는 비문을 세웠다. 그러나 랍비 예수가 말하고 제기하던 평화는 팍스(pax)가 아니라 샬롬(shalom)이었다. 그것은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평화였다. 이것은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평화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류 계층의 안달복달하는 위안이나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한 맺힌 소극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노래하고, 그 속에서 모두가 자기들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 더 이상 그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그런 샬롬이었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 있고, 사람들 사이에 있고, 인간과 자연 세계 사이에 있는 평화를 말한다.
(하비콕스, ‘예수 하버드에 오다’ 19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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