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하드 만주의 이기적 진실(비즈앤비즈, 2011년 초판)에서
새로운 매체 통해 각자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같은 믿음을 갖는 사람끼리만 특수화된 신뢰를 구축하여 일반 신뢰를 몰아내고 분열된 사회현상을 불러오는 이 불편한 진실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입니다.
들어가며 : 왜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까
지난 몇 년간 정치학자들은 여론조사를 통해 언론에 대한 미국인들의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정도를 넘어, 우리가 접하는 사실 자체가 엇갈리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이라크 전쟁, 테러, 지구온난화 등 에 대한 대처방안 – 가 아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로 흘러가고 있다. 정치학자들은 현대를 과도한 대립의 시대라고 한다. 편향성은 가랑비처럼 우리의 마음을 적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지각 능력을 손상시킨다. 두 종류의 양극화된 현실은 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덕분에 누군가는 입맛에 딱 맞는 현실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구축해나간다.
우리사회의 분열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선택권을 손에 쥔 사람들이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는지, 넘치도록 많아진 영상과 사진 기록물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검증되지 않은 ‘전문가’들이 토론의 장을 점령한 시대에 믿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언론사들은 이 모든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시청자와 독자의 편향성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살펴본다. 왜 우리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도 세상을 보는 눈은 이렇게나 다른 걸까? ≪이기적 진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1장 조각난 현실
2004년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인물은 메사추세츠 상원의원이자 베트남 참전 용사로 훈장을 받은 존 케리였다. 그리고 그해 4월, 전국 각지에서 모인 12명의 사내가 댈러스 외딴 건물에서 비밀스러운 회동을 했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이들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거친 모습이 닮아 있다. 30년이 넘도록 각자의 삶을 살아온 이들은 혹독한 고난을 함께 이겨낸 베트남전을 회상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케리와 마찬가지로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베트남에서 해군 쾌속정을 타고 위험한 대반란을 수행하던 군인이었다. 이들은 한때 동료였던 케리가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반전을 외치던 젊은 그를 생각하며 반역자, 범죄자 같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들은 지금 케리가 쓴 영웅의 탈을 벗기려는 대범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모인 곳은 유능한 언론홍보 전문가 메리 스패스가 설립한 홍보대행사 스패스 커뮤니케이션즈의 본사였다. 메리 스패스는 오랜 친구 존 오닐의 부탁으로 이 모임을 열었다. 존 오닐은 1971년에 케리와 함께 ≺딕 카벳 쇼≻에 출연해 전쟁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오닐을 비롯해 여기에 모인 모두는 케리가 ‘대선 부적격자’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어째 됐건 그날 댈러스에서는 진실을 위한 ‘쾌속정 참전 용사’라는 이름 아래, 케리의 백악관 입성을 물거품으로 만들 비밀스러운 계획이 탄생했다. 그들은 대규모의 소송을 걸었다. 케리가 베트남전 이후 군대를 배신하고 거짓된 전쟁 영웅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물론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실제 소송에서 존 케리를 영웅 자리에서 끌어낼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캠페인 시작 당시 넉넉한 자금도, 연줄도 없던 그들은 어떻게 존 케리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로 미국 국민을 설득시켰던 걸까?
진실을 위한 참전 용사와 쾌속정의 키잡이를 맡은 메리 스패스는 캠페인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표적 마케팅을 실시했다. 덕분에 캠페인은 언론의 힘을 등에 업고 마법 같은 힘을 발휘했다. 학자들은 힘을 ‘매체 세분화’라고 부른다. 이제까지는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정보를 전파했지만 최근 들어 그 체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새 소식을 접하는 데 익숙하다.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모든 기기가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전달한다.
쾌속정 참전 용사 캠페인은 현대의 정보 영역에 도사린 치명적인 매력에 주목했다. 오늘날 세분화된 언론을 능숙하게 다루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효과적으로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고, 부풀리고, 날조해 널리 퍼뜨릴 수 있다. 쾌속정 참전 용사들이 보여준 것처럼 증거 불충분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벌인 사건은 요행이 아닌, 다가오는 미래의 예고편이었다.
40년이 넘도록 ABC, CBS, NBC, AP 통신사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여섯 군데의 대형신문사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기사들을 종합하여 소개하고 있다. 옛날 전국구 뉴스에 나오던 앵커들을 떠올려보자. 윌터 크론카이트, 댄 래더, 피터 제닝스, 톰 브로커는 국가라는 만찬의 진행자들이었다. 몇 십 년 동안 그들은 온갖 기사를 전달하면서 국민이라는 손님을 맞이했고, 우리는 그들의 만찬을 즐겼다. 그들의 힘은 전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형 언론매체를 찾는 사람은 줄어가고, 주류 언론은 직관력을 잃었다.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우리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대중매체로 자리 잡기 전, 정당마다 신문과 평론지를 뿌려대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장의 틈새는 어느 때보다도 좁아졌다. 이제 우리 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통신 채널이 펼쳐져있다. 지난 2년 동안 문자, 이미지, 소리를 디지털로 기록하고 배포하는 정보 네트워크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다양한 매체 안에서 제작자, 배포자, 편집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기사를 만들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올려 의견을 나눈다. 그리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엄선한 정보를 소비한다.
세기가 바뀐 지금, 그들의 만찬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딱딱한 격식 아래 지정된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우리는 이제 모두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칵테일파티를 즐기고 있다. 서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도 하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무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 파티는 평등하고 민주적이다. 높으신 진행자의 설교 대신 어떤 사람과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파티는 이내 난장판이 되었다. 구석에 있는 남자는 나사가 실제로 달에 착륙하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군중을 끌어 모은다. 자칭 미군 의무감이라는 여자는 가운을 입고 진찰을 한다. 그녀가 정식의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믿는 눈치다. 어떤 테이블에서는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아들을 학대하는 희귀 사진을 찾아내 100만 장을 돌렸다. 몇분 후, 사람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기 시작한다. 소문이 퍼지고 파벌이 형성된다. 그중 예쁜 여자 한 명이 모두의 시선을 끈다.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왼쪽 구석에 비밀스럽게 모여 있다. 그들 모두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새 기술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연결해주는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시야를 좁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만이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너무나 쉽게 정보를 조작할 수 있으며, 그렇게 형성된 음모론과 괴담, 사기극에 많은 추종자가 붙고 있다. 쾌속정 캠페인의 성공에는 이 모든 요소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고 특정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2장 신 집단체제
1957년에 심리학자 리언 페스팅어는 사람들이 둘 이상의 부조화되는 의견 사이에서 느끼는 정신적 혼란을 설명하고자 인지 부조화 이론을 처음 제시하면서 선택적 노출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페스팅어는 1954년 12월 21일 자정에 거대한 홍수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믿는 세계 종말론 교파를 연구했다. 12월 21일이 지나고 약속된 홍수가 나지 않자 그들 사이에 부조화가 고개를 들었다. 신도들은 소중히 간직해온 예언과, 지구가 아무 일 없이 돌아가는 현실 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신도들은 절망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그들의 교주 마리오니시는 미니애폴리스에 사는 주부로, 초자연적 계시가 공명을 통해 자신의 몸에 들어와 글을 남기게 했다고 말했다. 예언이 빗나가자마자 그녀에게는 새 계시가 내려졌다. 신도들의 믿음에 힘입어 신이 지구를 멸망에서 구원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모방 매커니즘이다. 부조화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교도들은 새 상황에 믿음을 끼워 맞춘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몇 시간 전에 이미 멸망했어야 한 지구가 멀쩡하게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믿음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페스팅어는 우리가 믿음을 시험당하는 불쾌한 기분에 더 쉽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우리의 믿음을 부정하는 정보들을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이게 바로 선택적 노출이다. 메시지를 교묘하게 선택하여 소비하면 기존의 믿음에 반대하는 소식들이 유발하는 인지 부조화를 피할 수 있다.
선택적 노출은 우리의 현실 지각이 분열되는 이유를 연구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이제까지 소개한 사례와 실험들은 진실이 언제나 승리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 근본적인 믿음에 반대되는 정보를 접해도 그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때로는 귀를 막기도 한다. 각자의 진실을 믿은 사람들은 그저 단추에서 손을 떼고 잡음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 지명 선거운동에서 존 케리의 상승세를 봐야 하는 보수파들은 인지 부조화라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다. 우파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갈아엎는 강도의 충격이었다. 공화당은 예부터 군사 정당으로 통했다. 강경하고 전투적인 외교 정책을 지지하는 건 공화당의 몫이었다. 수년 동안 군사 투표에서 승리를 거두고 군인과 장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공화당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역사에 반대되는 부조화 상태였다. 공화당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자는 전쟁에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반면 민주당 측 후보자는 전쟁에 나가 싸우고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들의 노력이 눈에 거슬려도 어쩔 수 없었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기대와 현실 사시에 부조화를 느꼈다. 자정이 되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믿음과 약속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무사태평하게 지구가 자전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다.
이런 상황에서 24명의 참전 용사들이 우파 성향 청취자들에게 다가 온 반 케리 운동이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쾌속정 참전 용사들은 라디오와 인터넷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퍼트리면서 인지 부조화로 입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부시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쾌속정 참전 용사들의 이야기에 선택적으로 노출시켜 이미 아는 사실을 부정해야 한다는 짐을 덜었다. 부시 지지자들은 케리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의 영웅 행세는 망신과 수치라고 큰소리치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선택적 노출의 정석으로 2여 년 동안 보수파 라디오 토론에서 계속된 이야기였다.
3장 느낌을 믿어라 : 9·11과 선택적 지각
예상치 못한 찰나에 극도의 스트레스나 충격을 경험한 사람은 그 순간을 아주 세세하고 선명하게 기억하기 쉽다. 몇 년, 아니 몇 십 년이 지나도 그 당시 뭘 보고 듣고 느꼈는지 떠올릴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섬광기억’이라고 하며 케네디 암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섬광기억 중 하나다. 1963년에 살아 있던 사람들은 대통령의 저격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것이다. 댈러스에 있던 이들은 저격 소리를 들었다. 두 눈으로 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9·11 당시 살아 있던 당신은 현장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한다. 당신은 그 사건을 보았다. 그 자체가 바로 섬광기억이다.
이상한 사실은 명백한 기록이 있는데도 9·11의 실제 사실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테러에 개입했다는 MIHOP를 믿는 사람들은 수많은 관련 사진과 영상, 음성을 통해 주장을 뒷받침한다. 필립 제이한은 175기 사진에서 미사일을 보았다. 미사일을 본 사람은 필립뿐이 아니다. 2006년 봄에 조그비 인터내셔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의 42%는 미국 정부와 9·11 위원회는 테러 관련 공식 입장과 반대되는 중요한 증거들을 덮어두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오하이오 대학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연방정부 기관이 미국이 중동을 공격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했거나 일부러 저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이 3분의 1을 차지했다. 16%는 기체가 돌격하기 전에 건물에 몰래 폭발물을 심어놓았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날 아침 펜타곤을 공격한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미사일이었다는 의견도 5분의 1 이상이었다.
2001년 9월 11일은 1963년 11월 22일에 비해 훨씬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9·11에는 케네디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분열된 진실들이 각을 세우고 있다. 사진과 영상이라는 객관적 기록물들이 사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우리가 그런 기록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는 소리와 영상이라는 증거물을 양껏 즐기지만 머리로는 아무것도 즐기지 못한다.
하스토프와 캔트럴은 이런 현상(1951년 가을,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이 아이비리그 미식축구 시즌 마지막경기에서 누가 더 많은 반칙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양 대학 학생들이 내린 결론에 차이가 나는 현상)을 미식축구, 나아가 인생을 지배하는 계층구조라고 설명했다. 이것을 통해 똑같은 결승전 경기 영상에서 다트머스 팬이 본 것과 프린스턴 팬이 본 것에 차이가 생긴다. 경기 중에는 셀 수도 없는 동작이 나오지만, 그중 중요한 동작만이 우리에게 사건으로 인지된다. 살이 쓸리는 동작에는 누구나 같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면서 구축해온 개인적이고 무의식적인 계산방식에 따라 스스로가 개입되는 모든 사건을 인지한다. 경기 양상을 본 다트머스 졸업생 역시 인생을 살며 쌓아온 자기만의 프리즘을 통해 장면을 해석한다. 그의 팔은 다트머스 쪽으로 굽어 있었다. 그는 모교의 선수가 야비하게 운동장을 누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다트머스 선수들의 거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앞 장에서는 편향성에 따라 언론매체를 선택하는 선택적 노출을 설명했다. 이제 하스토프와 캔트럴의 연구는 또 다른 인지의 덫을 보여준다. 선택적 지각은 대립되는 이념을 가진 두 사람이 선택적 노출을 뛰어넘어 같은 대상을 보고도 대립을 유지하는 현상을 설명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두 사람이 실제로 같은 대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운동 경기, 대통령 암살, 테러 공격에 모두 적용된다. 두 사람은 그 대상을 전혀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한다.
9·11을 의심하는 몇몇 웹사이트와 토론 게시판, 아마추어 라디오 방송, 사건 초기에 9·11의 진실을 기록한 영화 ≺루즈 체인지≻, ≺인 플레인 사이트≻는 제이한의 주장과 같은 선상에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미사일이 사우스 타워를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홈페이지에는 이런 반응들이 올라온다. “제 생각에는 미사일이 맞아요.”, “제가 본 자료들을 통틀어 제일 설득력 있네요.”,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신상 조심하세요. 요즘엔 애국자가 제일 위험하잖아요.” 모두 제이한과 같은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 제이한처럼 실제로 미사일을 목격한 것이다.
4장 미심쩍은 전문가 : 선거 조작, 그리고 목소리 큰 남자
2006년 6월, 변호사이자 운동가, 미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롤링스톤≻에 글 한 편을 실었다. “선거는 조작이었나?” 대범한 제목이었다. 2004년 대선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을 몇 장에 걸쳐 심도 있게 다루었지만, 케네디는 글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도발적인 질문에 답변을 제시했다. “여러 증거물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2004년 공화당에서는 국민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 조직적인 대규모 선거운동을 단행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는 조지 W, 부시의 재임기간이었다. 그는 전국에서 620만 명의 표를 얻어 존 케리를 300만 표 차이로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주력 지역인 오하이오 주에서 부시는 2%가량에 해당하는 11만8601표 차로 승리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공식 통계를 믿지 말라고 조언한다. 오하이오 주의 결과는 케리에게 갔던 35만여 표 이상을 누락시킨 수치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민주당이 오하이오에서 승리를 거두고 백악관에 입성하기에도 충분한 표였다. 케네디는 이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의 의견은 현대 미디어의 영혼이다. 기자들은 그 자신부터가 다방면의 전문가이지만, 모든 기사에 전문가의 고견을 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닌다. 언제쯤 집을 사고팔면 좋을지는 부동산 전문가에게,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는 패션 디자이너에게, 뭘 먹으면 좋을지는 영양사에게 물어본다. 결과적으로 평소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돌이켜보면 그 바닥에는 다양한 전문가가 숨어 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위험이나 배아줄기세포, 구글의 사업 전망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삶을 장악하는 논란 주제가 복잡해질수록, 보통 사람이 직접적인 경험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수록, 세상은 전문가의 눈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모든 틈새, 모든 매체, 모든 방향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배움, 경험, 사회적 명성, 이념 등 그들의 자질을 알아내기는 어느 때보다도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는 잘 모르는 특정 분야를 배우기 위해 전문가를 찾는다. 무지한 사람은 불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이런 거래는 위험할 수밖에 없다. 공개적인 담론을 점령한 ‘전문가’가 정말로 전문가인지는 어떻게 알아내야 할까?
1980년대에 심리학자 리처드 페티와 존 카키오프는 우리가 특정 주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때 두 가지의 인지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먼저 관련 사실을 밝히는 데 충실한 ‘중심 경로’를 따라 문제를 파악하는 경우다. 차를 사기 위해 몇 주에 걸쳐 시장에 출시된 모든 기종의 성능과 안전성을 조사하기로 했다면 큰 길을 따라 인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산더미 같은 자료 대신 소비자 잡지 ≺컨슈머 리포트≻에서 평점을 높게 받은 볼보를 살 수도 있다. 이 경우 페티와 카키오포가 ‘주변 경로’라고 하는 인지 경로를 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정적 반응이나 전문가, 유명 인사, 기타 믿을 만한 인물의 의견을 ‘신호’ 삼아 결정을 내린다. 부모님이 항상 몰던 포드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타는 허머를 살 수도 있으며, 지역 대리점의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허풍쟁이 광고 모델이 마음에 들어 도요타를 선택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특정한 질문에 답을 구할 때 중심 경로와 주변 경로 중 한 길을 선택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심리학의 커다란 연구 과제였다. 흔히 시간이 부족하거나 능력 밖의 문제에 부딪히면 주변 경로를 택하게 된다. ≺컨슈머 리포트≻는 시장에 출시된 모든 차량을 시험할 능력이 있고 당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집지에서 볼보가 좋다고 하면 볼보가 좋은 차다. 이런 방법도 나쁘지만은 않다. ≺컨슈머 리포트≻의 식견이 틀린 적이 얼마나 있었나? 거의 없었다. 그들은 별 볼일 없는 물건을 놓고 허풍을 떨지 않는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드스타인과 게르트 기거렌저는 무언가를 빨리 결정해야 할 때 경험을 근거로 판단을 내리면 좋은 결과를 얻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골드스타인과 기거렌저는 독일 학생 열댓 명에게 샌디에이고와 샌안토니오 중 어느 도시에 인구가 더 많은지 물은 적이 있다. 학생들 모두 정답을 맞혔다. 답은 샌디에이고였다. 하지만 미국 학생 열댓 명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는 3분의 2만이 샌디에이고를 골랐다. 어떻게 미국 도시에 대한 질문을 독일 학생들이 더 잘 맞힐 수 있을까? 골드스타인과 기거렌저는 독일인이 단순한 주변 경로 처리를 통해 정답을 찾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샌안토니오라는 도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샌디에이고를 훨씬 더 큰 도시라고 생각했다.
이런 속임수를 ‘경험 인지’라고 하며, 기본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에 가치를 둔다는 (이 경우 더 유명한) 간단한 규칙을 따른다. 미국 학생들은 두 도시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서 경험 인지를 발휘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중심 경로를 통해 체계적으로 답을 구해야 했다. 미국 학생들은 독일 학생들에 비해 미국 도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이 질문의 역설점이다. 아는 게 너무 많아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이 판단할 차례다. 두 전문가의 대립되는 두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건 선택적 노출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2장에서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강연을 외면하려 했던 흡연자들처럼 우리는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만 귀를 기울일 것이다. ‘사실’은 기존의 믿음에 그어져 있던 경계선을 따라 분열된다. 오랜 시간 미국의 투표 체계를 의심하거나 부시의 당선에 충격을 받은 좌파들의 선택은 분명했다. 그들의 영웅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호언장담하는 전문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5장 객관성의 쇠퇴
CNN의 전직 앵커 루 돕스는 보름달같이 통통한 얼굴, 넓은 어깨, 벗어진 금발에 24시간 뉴스와 웅얼거리듯 긴장감 없는 목소리들 틈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지녔다. ≺머니라인≻ 진행을 맡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그는 기업가의 친구 같은 존재였다. CEO 입장에서 경제소식을 보도했으며 냉철한 이성으로 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돕스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른바 생각을 더했다는 뉴스를 위해 이성, 객관성을 팔아넘겼다. 그가 한때 찬양한 CEO들에 무한한 의심의 눈초리를 가하는 견해다. 이제 그는 미국 노동자들을 ‘판매’하는 기업에 서슴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정치가들에게는 이민자들이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뒀다는 비난을 퍼붓는다. 루 돕스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벗이 사명을 띤 사나이가 되었다.
돕스는 매일 밤 ≺루 돕스 투나잇≻이라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근면성실’하고 언제나 정직하며 통제할 수 없는 힘 앞에 오랜 시간 발버둥 쳐왔다는 미국 국민을 분통 터지게 한 사건들을 차례로 보도하는 방송이다. 케이블 방송에서는 강도 높은 비난을 하기 쉽지만, CNN이나 폭스에서는 엄청남 사건이 터지지 않고서야 분노에 찬 앵커를 보기 힘들다. 하지만 돕스의 뉴스는 어느 방송보다도 강렬했다. 방송 내내 경보음이 울렸다.
CNN의 자매 방송사 헤드라인 뉴스는 한때 하루하루의 큰 사건들을 간단하게 소개하여 지루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시시한 뉴스 단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헤드라인 뉴스도 말대꾸를 시작했다. 법조계 뉴스를 진행하는 전 검찰관 낸시 그레이스는 피고 측 변호사가 제기한 논쟁마다 시비를 건다. 사건이 지닌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녀의 방송에서는 범죄 혐의만 받아도 누구나 평생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이후 무죄 선고를 받더라도 예외는 없다. 헤드라인 뉴스에는 빈곤층의 빌 오라일리, 글렌 벡이라는 우파 성향 허풍쟁이도 출연한다. 벡, 쿠퍼, 그레이스, 돕스는 객관성이 떠난 자리에 오락과 개인적 견해가 군림하는, 새로워진 CNN을 대표한다.
물론 케이블 방송의 비판적 태도는 새롭지 않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의견을 토해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의 시초인 폭스 뉴스 채널은 그중에서도 가히 최고다. 이런 경향에는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대립은 사실 정보가 분해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나는, 전례 없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 우리에게 찾아온 변화를 조사했다. 우리는 각자의 편향에 따라 현실을 선택하고 증거(사진과 영상 등)를 해석하며 마음에 드는 전문지식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런 역학 관계에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세분화된 문화에서 시청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언론도 모습을 바꾸어온 것이다. CNN과 루 돕스의 변화는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두 심리학자 리 로스와 마크 레퍼는 우리가 뉴스라고 생각하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정보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를 했다. 이들의 연구를 확정해보면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힘, 나아가 루 돕스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0년대에 로스와 레퍼는 ‘편향 동화’라는 사회심리 현상에 매료되었다. 편향 동화는 각자의 믿음에 맞춰 새 정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경향을 뜻하며, 이 책의 전반적인 주제와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사형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당신에게, 누군가 사형이 살인을 억제한다는 내용을 다룬 실증적 연구 자료 더미를 안겨주었다고 상상해보자. 자료 일부에는 사형제도가 범죄를 억제시킨다고 나와 있으며, 반대 결과를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한마디로 결론이 없는 자료다. 이때 당신은 어느 쪽의 말을 듣겠는가?
이쯤 되면 정답을 맞힐 수도 있다. 당신은 당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믿을 것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실험 대상자들은 양극화된 상태다. 두 보고서를 합치면 사형제도가 범죄율 감소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정으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자료를 보고 자신의 극단적 입장을 바로잡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보고서에 오류가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보고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원래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관련 정보를 많이 안다고 반드시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더 많은 걸 알게 될수록 원래의 견해를 더 깊이 파고들어 보호막을 치는 경우마저 생긴다. 사형제도 연구는 심리학에 관련된 다른 어떤 실험보다도 우아한 방식으로 이 가설을 증명하는지도 모른다.
편향 동화 개념은 ‘소박실재론’이라는 이론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의 바탕이 되었다.
로스와 레퍼의 실험에서 사형제도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던 참가자들은 스스로가 정보를 삐딱하게 해석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모든 대상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로스는 말한다. 이것이 소박실재론이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편향성을 인식할 수 없다. 미식축구를 응원하던 다트머스와 프린스턴의 학생들은 똑같은 경기 영상을 보면서도 각기 다른 현실을 보았다. 무엇이 현실이고 자신이 인지한 부분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지한 사건이 현실과 다르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본 경기가 곧 실제 경기였다.
이런 무지함이 위험한 이유는 타인을 판단할 때에도 이런 성향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눈에 거슬리고 불쾌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제가 보는 세상은 온통 검고 당신이 보는 세상은 온통 하얗다면, 세상에는 검은색도 있고 흰색도 있다는 말에 우리 모두 불쾌함을 느끼겠죠.” 로스가 말했다.
소박실재론을 기억해보자.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타인은 이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다. 때문에 자신이 뚜렷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기자, 편집자, 방송사, 전문가가 “반대쪽에 유리한 사실에 지나치게 치중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로스는 설명을 이어갔다. “상대편보다는 본인이 지지하는 쪽에 더 나은 증거가 많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양쪽에 똑같이 무게를 둔다는 사실조차 편파적으로 보이지요. 둘을 공평하게 보는 것 자체가 불공평한 것입니다.”
대학살 사건 연구는 이런 논쟁을 중화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로스와 레퍼가 ‘적대적 매체현상’이라고 칭한 이 현상은 다트머스와 프린스턴 학생들의 실험만큼이나 인간의 지각에 대한 중요하고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굴린 것도 아니었다. 그 안에는 더 고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었다. “사실 뉴스에서 뭘 봤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기 자신보다는 반대편에 유리했던 사실이나 논쟁이 더 잘 떠오릅니다.” 로스가 말했다. 다트머스와 프린스턴 학생들이 서로 다른 경기를 본 것처럼, 잔혹한 전쟁을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양쪽 진영 역시 뉴스를 볼 때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먼저 눈에 밟혔다. 뉴스에서 보이는 편향성은 꾀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이 그만큼이다.
루 돕스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첫 단추다. 돕스뿐 아니라 이제까지 성장해온 당파적 매체 모두가 여기에 해당된다. 시청자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보도국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객관성에 흥미를 못 느낀다면 좀 더 입맛 당기는 뉴스를 보여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로스는 “편파적 방송을 보고 중립적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해 하죠.”
6장 진실스러움은 어디에나 있다.
이 책에서는 일부 정치인의 퇴색된 신념보다는 좀 더 사회에 만연한 진실의 변질을 다루려고 했다. 전 세계가 광케이블로 연결되고, 주류 매체가 특정 성향의 안식처로 전락하고 영상과 사진이 펴져 나가면서, 선전 활동이 문화에 침투하는 넓은 길이 생겼다.
영상보도 자료와 위성매체 순방은 이런 힘을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문화 형태다. 거짓말을 하기가 쉬워진 시대에 세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또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마케터나 정치인들은 스위퍼 먼지떨이, 노키아 헤드셋, 대선 후보, 교육 정책, 지구온난화에 대한 진실 등 소비자와 국민의 마음속에 상품과 이념을 주입하기 위한 은밀한 이해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공개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함구할 것이다. 선전원들은 매체가 범람하는 이 세상의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그들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현 상황을 이용한다. 영화나 방송 제작에 은밀하게 참여하는 무난한 방식도 있지만, 뉴스에 보도 자료를 넣거나 전문가를 매수하고 인터넷상의 블로그, 영상, 사진을 통해 무기명의 매시지를 퍼뜨리는 교활한 방식도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정보원 활동은 이 책에서 설명해온 다양한 현상을 이용한다.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취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 기대려는 선택적 노출, 기존의 믿음에 맞춰 증거를 해석하는 선택적 지각, 가짜 전문가를 양산하는 주변 경로 처리, 뉴스가 객관성을 잃고 케이블 방송이 헛소리를 하게 만드는 적대적 매체 현상이 그 현상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새로운 거짓말에 통달했다.
지난 세기의 직접적인 판매는 광고와 정보를 구분하기 어려우면서 설득력은 높아진 새 형태의 홍보 방식으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모순을 바탕에 두고 있다. 오늘날 기업은 물건을 파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물건을 팔고 싶어 한다. 영상 보도 자료의 증가는 새로운 경향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제 기업과 정치가들은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음직이려 깊은 땅을 판다. 끊임없는 감언이설, 홍보, 설득, 권유는 듣는 사람이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영상 보도 자료처럼 속임수가 먹히게 하려면 보통 거짓말을 곁들여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회에서 정보가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알아보았다. 미심쩍은 전문가와 기자들은 헐겁게 조직된 인터넷 무리, 특화된 언론매체를 꾸려가고 있으며 거짓으로 판명된 기록들을 통해 힘을 키워 속임수를 증폭시킨다. 메시지와 매체의 만남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선전원은 여론을 선동하며 기업은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을 정교하게 유지해줄 통신 체계를 활용한다. 물론 이들은 스스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맺음말 진실 없는 세상
1954년, 사회학자 에드워드 밴필드는 부인과 두 아이를 데리고 소작농들이 사는 이탈리아 남부의 낙후된 마을에 도착했다. 표면상의 목적은 선교활동이었지만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며 이타심과는 거리가 먼 밴필드는 선교를 하러 여기에 온 게 아니었다. 그의 진짜 목적은 그 지역, 정확히 말하면 그 지역 주민들의 문제점을 알아내는 데 있었다. 왜 이탈리아 북부 주민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남부 소작농들은 여전히 남의 밭이나 갈아주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아홉 달에 걸친 관찰 끝에 그들의 문화에서는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었다. 몬테그라노(가상의 마을 이름이다) 주민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이나 개인의 즉각적이고 물질적인 이득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힘을 합칠 수가 없었다. 이곳의 삶은 혹독하고 무의미했으며 마을 주민 모두 출세를 위해 최고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밴필드는 일상 속 어디에서나 이런 정신을 목격했다. 몬테그라노의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아버지에게 염소가 몇 마리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거든 모른다고 대답해라.”라고 가르친다. 여자들은 병원에 가도 어디가 아픈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 한 명은 돈 봉투를 받은 사람을 공무원에게 신고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정직한 사람보자 정직하지 못한 사람 중에 저를 비난할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까딱하다가는 제가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밴필드는 현장의 연구 결과를 기술해 ≪뒷걸음질 치는 사회의 도덕 기반≫이라는 짧은 책을 썼다. 이 책이 묘사하는 몬테그라노는 악몽과도 같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의 관점에서 이 책에는 구시대적 자민족 중심주의를 한가득 안고 있다. 서문에는 “비서구권에도 현대 경제와 민주주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고차원의 조직을 구성하고 유지할 역량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의심해야 한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밴필드가 몬테그라노에서 일군 성과는 그 뒤로 수십 년간 사회학자들이 연구할 개념의 발판이 되었다.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할 때 사회는 더욱 발전한다.
국민이 서로를 신뢰하는 나라는 신뢰도가 낮은 나라에 비해 경제 생산량이 높은 경우가 많다(예를 들면 신뢰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뇌물이 오갈 확률이 적다). 신뢰가 있는 사회의 구성원은 더 건강하기까지 하다. 미국 내에서 주민 간 신뢰도가 높은 주는 그렇지 않은 주에 비해 사망률이 낮다고 한다. 신뢰는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이 말하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이때 사회적 자본이란 활기찬 사회를 위한 인맥의 넓이를 말한다.
퍼트남은 1995년에 ≺나 홀로 볼링≻이라는 유명한 논문(이후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을 통해 미국 국민이 서로 간에 자발적으로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엘크사회(미국 내 지역 사회모임), 학부모회, 교회 모임, 볼링 등의 운동모임이 시들해진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서로 집을 방문하거나 함께 외식을 가지 않으며, 다같이 모여 놀거나 헌혈, 봉사를 하는 경우도 줄었다. 이렇게 시민들의 교류가 줄어든 원인이자 결과는 – 두 요소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 바로 신뢰도의 추락이다.
한때 미국은 가장 신뢰도가 높은 나라였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서로를 믿지 않는다. 사회학자들은 한 지역사회에서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는 정도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것을 ‘일반 신뢰’라 부른다. 수 십 년에 걸쳐 일반 신뢰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960년에는 “사람들을 대부분 믿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상대할 때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십니까?”라는 질문에 60% 가까이가 사람을 믿는다고 답했다. 이후로 수치는 곤두박질쳤다. 1970년대 초반에는 50%, 1990년대에는 40%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2006년에는 32%라는 최저점을 찍었다.
한편 퍼트남은 우리 사회의 영원한 말썽꾸러기 텔레비전이 사회적 자본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텔레비전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다른 사람과 어울릴 시간은 줄어들고, 텔레비전 속 왜곡된 세계관에 빠져 타인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에 관련해 더 다양한 원인을 발견했다. 젊은이들은 물질주의에 빠져 의심의 강도를 높이거나 정부, 매체, 교회, 기업 등에게 끊임없이 실망하면서 불신을 쌓기도 한다.
이 책은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진실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새로 나온 정보 기기는 새 소식을 쉽고 빠르게 접하게 해주는 동시에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매체들은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서로 다른 현실을 살게 되었다.
새 매체의 등장으로 신뢰도가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특수화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반 신뢰가 낮선 이를 대하는 방식과 연결된다면 특수화된 신뢰는 가족, 민족, 직장 동료, 소속 집단 구성원 등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갖는 감정을 뜻한다.
특수화된 신뢰는 측정이 불가능해 국가에 어떤 보탬이 되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특수화된 신뢰가 높은 지역이 주로 어디인지는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작은 마을이다. 전형적인 미국의 작은 마을은 주민들 간에 신뢰가 두터우며 대문을 잠그고 다닐 필요도 없고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상처받는 사람도 근심 걱정도 없는 천국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주민들이 모든 타인을 믿는 것은 아니라고 에릭 우슬러너는 지적한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한다. 우슬러너는 내게 물었다. “≺앤디 그리피스 쇼≻라는 시트콤 기억나세요? 정 많고 푸근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작은 마을 이야기죠. 한번은 그 시트콤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동료와 얘기하고 있었어요. 이제까지 나온 방송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섭렵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마을에 외지인이 찾아왔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마을 사람들이 그 외지인을 머리에 뿔이라도 난 사람처럼 쳐다봤고요. 그게 작은 마을의 문제점입니다.”
특수화된 신뢰는 일반 신뢰를 무너뜨린다. 끼리끼리 – 같은 마을 사람 – 의 믿음이 두터워질수록 낯선 이에 대한 불신도 커진다. 그리고 특수화된 신뢰가 일반 신뢰를 능가하면 끔찍한 시태가 발생한다. 앤디 그리피스의 낙원에 낯선 이가 들어왔다는 설정보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KKK나 거리의 조직폭력배, 범죄 음모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우슬러너는 이런 집단이 엄청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에 금이 가면 잔치는 끝난다. 하지만 그들의 신뢰는 특수화되어 있다. 집단 내부의 신뢰는 낯선 이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KKK는 결국 비밀모의다. KKK의 조직원들은 외부인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소속원이 누구인지조차 밝힐 수가 없다.
몬테그라노 주민들 역시 특수화된 신뢰에 휩싸여 있다. 그들은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쳐 이웃과는 정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밴필드는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이렇다.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 경쟁자이자 적군이다. 가족 외의 사람은 모두 의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쾌속정 참전 용사부터 DCI 그룹까지 현대사회의 사기극들을 통해 오늘날 타인과의 소통 과정에 도사린 맹점을 비추었다. 이런 맹점은 책에 소개되지 않은 수십 건의 사례에서도 똑같이 존재한다. 선택적 노출, 선택적 지각, 돌팔이 전문가에 대한 맹신, 뉴스의 객관성 상실은 선전 활동을 추진하는 동력원이자 ‘현실 기반 세계’에서 해방된 우리 사회 속 온갖 사기극들의 원동력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다. 통신 기술의 발전은 특수화된 신뢰를 낳았다. 2장에서는 우리가 편향성에 기반해 정보를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쾌속정 참전 용사 지지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케리의 과거 이야기를 신뢰했다. 그들은 특수화된 신뢰로 무장해 쾌속정 이야기의 오점을 지적하는 일반 신뢰에 맞섰다.
이런 현상은 이제까지 소개한 모든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느 현실을 믿을지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 손에 있다는 점이다. 건물로 돌진하는 비행기 사진에서 미사일을 볼 수도, 정부의 공식 발표를 믿을 수도 있다. 2004년 대선에 문제가 없었다는 전문가의 말을 들을 수도, 선거 조작설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텔레비전 뉴스가 모두 편파적이라면 빌 오라일리, 루 돕스, 키스 올버맨(미국의 진보성향 언론인)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의 가치관을 따를 수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모든 영상이 선동가들이 돈을 받고 올린 것이라면, 방금 친구가 보내준 오바마 찬조 영상이 진정한 민중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도, 날조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결국 이 모든 갈림길에는 스티븐 콜베어가 진단한 ‘진실스러움’이 있다. 진실스러음은 곧 우리가 선택을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단순히 현실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을 신뢰하고 다른 현실을 불신하기로 결심하는 행위다. 매 선택에서 우리는 특수화된 신뢰를 형성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게 바로 새로운 매체의 본질이다. 새 매체의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뭉치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들과는 흩어져야 한다.
선택은 곧 누군가를 믿고 나머지를 불신한다는 의미다. 현명하게 선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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