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이클 S. 가지니가 지음, 윤리적 뇌(2012, 초판 2쇄) 중에서

슈마허 2012. 3. 23. 18:14

 

자유의지, 개인적 책임 그리고 법

 

1. 나의 뇌가 시킨 것인가?

 

신경과학은 행동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 주며,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행동(범죄나 그 반대)의 원인을 뇌 기능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경과학이 행위자의 무죄를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최신의 신경과학적 지식과 법적 개념이 가지고 있는 가정들에 기반하여 나는 다음의 원칙을 믿는다. 뇌는 자동적이고 규칙 지배적이고 결정적 도구인 반면, 사람들은 결정하는 데 있어 자유롭고 개인적으로 책임있는 행위자이다. 교통상황이 물리적으로 결정된 자동차들이 상호 작용할 때 발생하는 것처럼, 책임은 사람들이 상호 작용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개인적 책임이란 공적 개념이다. 개인적 책임이란 집단 안에 있는 것이지 개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지구상의 유일한 사람이라면 개인적 책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책임이란 당신이 타인의 행동에 대해, 그리고 타인이 당신의 행동에 대해 가지는 개념이다.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살 때 규칙을 따르게 하고 이 상호 작용으로부터 행동의 자유라는 개념이 발생한다.

 

 

많은 것들이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학자들은 자유의지 문제를 여러 가지 훌륭한 방식으로 생각해 왔다. 내가 보기에, 기계속의 유령이나 복잡계의 창발적 속성, 논리적 비결정성, 그리고 다른 특성들을 언급하면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뇌는 자동적이지만 사람들은 자유롭다. 자유라는 것은 사회의 상호 작용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해리와 그의 살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의 법체계에서 범죄는 두 가지 규정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actus reus, 즉 금지된 행위, 다른 하나는 mens rea, 즉 범죄를 하려는 의도이다. 해리가 감옥에 가려면, 검사는 합당한 의심 이외에 이 두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일반 용어로 말하면,법정과 법체계는 범죄를 저지른 주체를 결정하려고 열심히 일한다. 그들이 신경과학으로부터 도움을 원하는 건 해리가 '개인적으로 책임있다'고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건 해리인가, 아니면 그의 뇌인가? 이것이 바로 미끄러운 경사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사실상 신경과학은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책임이라는 건 한 사람 이상이 있는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구성물이고 인간 간의 상호 작용에서만 존재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규칙이다. 뇌 스캔에서 볼 수 있는 화소들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증명해 줄 수 없다.

 

 

2. 뇌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 중 참인 기억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풍경이나 경험 그리고 동기를 원본 그대로 저장하는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특정 맥락에 따라 때와 장소에 맞게 정보를 저장한다. 모든 기억들은 시공간의 꼬리표를 달고 있고, 이 꼬리표는 계속 분실되거나 손상된다. 그 결과는? 회상된 기억은 불완전하다.

 

 

기억된 과거라는 것이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뇌는 녹음기가 아니라는 완고한 사실이 특히 법정에서 드러난다. 목격자의 증언은 사법체계에서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을 거대한 창고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 창고를 샅샅이 뒤져서 정확히 저장된 기억을 찾아 그것을 보고할 수 있다고 말이다. 과학은 기억이 그렇게 조직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시회 기관들은 여전히 기억에 대한 오래된 이론을 토대로 일한다.

 

나는 우리 인간 종이 정확한 기억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종종 생각해 왔다. 우리는 하루 종일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만나고 셀 수 없는 결정들을 내린다. 만약 물샐틈없는 논리와 예전에 내린 결정이 낳은 결과들에 대한 증명을 토대로 새로운 결정이 내려진다면 우리는 자동기계처럼 될 것이고, 새로운 도전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핵심을 이해하는 것과 세세한 것을 보고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것을 알면 법정에서 증언이 사용되는 방식이 영원히 바뀔 수 있다. 게다가 기억이 어떻게 실제 상황을 왜곡하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증언을 획득하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야 한다.

 

 

기억 왜곡이라는 오류는 모든 단계 -기억의 부호화부터 그것이 재활성화되거나 재저장되는 매시간까지- 에서 기억을 오염시킬 수 있다. 어떤 오류들은 기억에 잘못된 정보를 추가하고(error of commission) 다른 오류들은 우리가 정보를 망각하거나 내버려두기 때문에 발생한다(error of omission).

 

하버드 대학교의 대니얼 샥터는 기억 망상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연구에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생략과 위탁의 기본 오류들이 있다고 -그가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고 부르는- 주장했다(Schacter, D. L.(2001), The Seven Sins of Memory, p. 92). 그것들은 소멸 transience(시간에 따라 흐려짐), 정신 없음 absentmindness(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잊어버림), 막힘 blocking(혀끝에 맴도는 어떤 것), 오귀속 misattribution(강간당한 여성이 텔레비젼에서 본 얼굴을 강간범에게 잘못 귀속시킬 때처럼), 암시성 suggestibility(매체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기억을 왜곡), 편견 bias(우리의 편견이 어떻게 기억에 영항을 미치는지), 지속성 persistence(원치 않는 기억을 계속적으로 회상하는 것)이다.

 

 

형법 체계가 기억만큼이나 오류 가능하고 유동적인 것들을 많이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연구 증거들은 충격적이다. 더 나은 인터뷰 기법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더 신빙성 있는 목격자 정보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반면, 기억은 한 사건에 대해 대립되는 양측 모두가 잘못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는 시스템이며, 이 점을 더 많이 알 때까지 우리가 가져야 할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입장은 기억이 정확하다는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대니얼 샥터는 기억이 잘못되는 여러 가지 방식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원래 사건의 맥락인 꼬리표는 분실하고, 과거 사건들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또 다른 맥락의 꼬리표에 끼워 넣는다. 그렇게 기억이 재부호화되면,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는 더 거리가 생기게 된다. 요약하면, 기억은 10월의 잎이 버몬트에서 떨어지는 것만큼 확실히 영광스럽게 색과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 과정을 멈출 수는 없다.

 

 

도덕적 본성과 보편 윤리

 

 

3. 뇌에서 믿음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뇌는 통합된 구조물이 아니다. 뇌는 별도로 계산을 수행하는 여러 개의 모듈들인 신경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결망들은 스스로 활동한다. 예컨대 시각 연결망은 시각적 자극에 반응하고, 시각적 심상 -즉 어떤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 이 일어나는 동안 활동한다. 운동 연결망은 움직임을 산출할 수 있고, 움직임을 상상하는 동안 활동한다. 뇌가 이 모든 기능들을 모듈 체계로 수행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뿔뿔이 흩어져 있는 활동들을 수행하는 100만 개의 조그마한 로봇들 같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합된 행위자로 느끼게 하는 의도와 이유를 가진 하나의 정합적인 자아로 느낀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가?

 

지난 30면간 나는 분할 뇌 환자들, 즉 심한 간질을 완화시키려고 두뇌 반구들 사이의 연결을 절단한 환자들과 작업하면서 드러난 현상들을 연구해 왔다. 내 동료들과 나는 인간을 통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대답은 만약 뇌가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면 뇌의 한 부분은 연결망의 모든 행동들을 감시하고 자아라는 통합된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개별 행위들을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뇌 부분이 좌반구 해석자(Left-hemisphere interpreter)이다. 8장에서 설명된 이런 발견에서 더 나아가, 좌반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보들이 들어오면 논리적으로 맞추어 설명하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할 이미지와 믿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매순간 들어오는 입력 정보를 해석하여 이야기들로 엮어 낸다. 나는 좌반구의 이 부분을 해석자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좌반구가 내적, 외적 사건들을 설명하고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사실들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좌반구 해석자가 얼마나 쉽게 이야기들과 믿음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는 분할 뇌 환자들에 대한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예컨대, walk 라는 단어가 환자 뇌의 오른편에만 제시되었을 때 그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묻자, 죄뇌(언어가 저장되고 단어 walk가 제시되지 않는 곳)는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재빨리 만들어 "콜라를 가지러 가려고 했다"고 피실험자가 말했다.

 

좌반구에 대한 더 환상적인 예는 신경 장애를 가진 환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편마비(hemiplegia) 증상을 가지게 하는 질병인 불각증(anosognosia)이라는 뇌졸중 합병증을 가진 환자들은 자신의 왼팔이 자신의 것인 줄 모르는데, 왜냐하면 뇌졸중이 우리 몸의 완전성, 자세, 그리고 움직임을 다루는 오른쪽 측두피질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좌반구 해석자는 시각 피질로부터 받은 정보 -팔다리가 몸에 붙어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와 팔다리의 손상에 대한 입력 정보가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조화시켜야 한다. 좌반구 해석자는, 신경 손상이 뇌의 문제이며 사지가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의마한다는 것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사지를 지각하기 위한 신호를 보내는 뇌 영역에 신경 손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좌반구 해석자에 어떤 정보도 보낼 수 없다. 그러면 해석자는 두 가지 알려진 사실, "나는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나는 그것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없다"를 서로 말이 되도록 연결하기 위해 어떤 믿음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장애를 가진 환자들에게 왜 팔을 움직일 수 없는지를 질문하면 그들은 "그건 내 것이 아니오"라거나 "그냥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요" -좌반구 해석자에게 입력 정보가 주어지면 합당할 수 있는 결론인- 라고 말할 것이다.

 

좌반구 해석자는 믿음을 만들어 내는 데에 몹시 능숙한데, 믿음 체계가 무엇이든 그것을 고수할 것이다. 중복적인 기억착오(reduplicative paramnesia)를 가진 환자들은 사람 복제물이나 장소 복제물이 있다고 믿는다. 즉 그들은 기억 속에 또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현재와 섞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손상된 뇌가 해석자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보들을 지탱하기 위해,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교묘하게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느 여성 환자 한 사람은 자신이 치료받고 있었던 뉴욕 병원이 실제로는 메인에 있는 자신의 집이라고 믿었다. 의사가 복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어떻게 여기가 당신의 집일 수 있는지 물으면 그녀는 의사 선생님, 내가 이 엘리베이터를 여기에 설치하려고 얼마나 돈을 많이 들인 줄 아세요?"라고 말했다. 해석자는 입력 정보들을 서로 연관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하려고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환자 자신에게는 '아주 많이 노력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나온 분명한 정보로 느껴질 것이다.

 

우리늬 좌뇌가 자신의 자기 이미지나 지식 혹은 개념틀과 잘 맞지 않는 정보를 만나면, 좌반구 해석자는 그 정보들을 이해하고 매개하기 위해 하나의 믿음을 만들어 낸다. 이 해석자는 패턴과 질서 그리고 인과관계를 추구한다. 해석자가 만들어 낸 믿음들 중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라는 문화 현상이다.

 

 

종교적 믿음은 오랫동안 도처에 존재해 왔다. 인간이 지구에 뿌리 내린 시간만큼이나 세계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 왔다. 잉카인들, 이집트인들, 그리스인들이 세운 과거와 현재의 문명들은 강한 믿음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 이상의 신들을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가 발전하면 과거 인간 문화에서 비합리적 영역으로 간주되는 종교가 가졌던 영향력이 필연적으로 감소될 것이다"라고 이론화했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도 종교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매일 두세 가지의 새로운 종교들이 생겨나며 현재 세계에 1만여 개의 종교들이 있다(세계 기독교 백과사전). 1993년 이후 국영 텔레비전에 방영된 종교적 상징과 영성에 대한 묘사는 400퍼센트 증가했다.

 

교육받은 이들이 종교적 아이디어는 일종의 설명 체계일 뿐이고 개인들의 감정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 집단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 종의 구성원들은 도덕적 선택의 상황을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하버드 대학교의 마크 하우저는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흥미로운 연구를 해왔다. 그는 도덕감 테스트(,moral sense test)라고 이름붙인 도덕 추론 데스트 웹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테스트는 일곱 가지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들은 뒤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도덕적인지를 대답하는 것이다.

 

여러 연령대와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이 테스트를 마쳤고, 그들이 모두 다소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차이가 있다면 그 반응을 해석하는 방식인데, 이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응답자들의 30퍼센트만이 그들의 결정을 충분히 정당화했다. 설명이 충분하려면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사실을 포함해야 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종교적 믿음에 사회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본능적 반응으로부터 시작해서, 개인적 반응을 이해하려는 사회적 지지 체계와 합리화 체계로 진화했다. 다른 역사적 맥락에 있는 사람들, 즉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가지는 사람들 역시 도덕적 입장에 대한 또 다른 이론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애틀랜틱 몬스리>의 필자 중 한 명인 토비 래스터는 종교가 어떻게 발달했고, 사람들을 종교로 이끌고 종교를 번창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랫동안 연구했다. 그는 종교활동이 다원적인 규칙 아래 작동하는 일종의 초자연적 선택을 따른다고 썼다. 수년 동안 지속된 종교적 활동은 건강, 배우자 선택, 그리고 안전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컨대 공동체 구성원을 돌보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다른 공동체보다 병에 덜 걸리게 한다." 몰몬 교도들은 "서로에게 아주 많은 사회봉사를 하는데, 이 모든 것은 공동체 결속을 쌓고" 교회 구성원에게 안정감을 준다. 몰몬 교도들은 "생긴 지 겨우 한 세기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수백만명의 신도가 있고 모든 종류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세계 종교가 되어 가는 시점에 있다..."

 

아프리카에서 성공했던 새로운 종교 활동이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사회적, 영적, 경제적, 그리고 짝을 찾는- 모든 방식으로 살도록 돕는" 경향을 가진다는 발견은 초자연적 선택 이론을 더 잘 지지해 준다. 래스터는 "종교적 경험의 원천은 신비하고, 비합리적이고, 아주 개인적일 수 있지만 종교 그 자체의 원천은 그렇지 않다. 종교는 심리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상, 즉 적극적인 억압이 없는 상태들이고, 집단 행동의 관찰 가능한 규칙들에 따라 발달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는 또한 <다윈의 대성당 : 진화, 종교, 그리고 사회의 본성>이라는 훌륭한 책을 쓴 데이비드 슬론 윌슨의 견해이기도 하다. "종교처럼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소비할 만큼 정교한 것은 세속적 유용성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는 주로 혼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함께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종교 집단이 적응 단위로서 기능하는 메커니즘은 종교를 작지 않은 많은 이들이 수수께끼로 보는 바로 그 믿음들과 실천들을 포함하다."

 

프랑스 국가과학연구센터의 파스칼 보이에르는 문화적으로 성공적인 (영혼이나 신 같은) 종교적 개념들이 번성한 이유는 도덕성, 집단 동일성, 종교적 의식과 감정과 연관되는 사회적 상호 작용에 대한 타고난 인지 능력이 종교적 개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즉 우리의 인지적, 사회적 틀에 가장 잘 맞는 종교적 개념들이 생존하기가 가장 쉽다는 것이다.

 

 

측두엽 간질은 간질의 한 유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종류의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측두엽 간질 발작을 앓는 사람은 항상 의식을 잃는 것은 아니며, 다른 형태의 간질적 발작과 종종 관련되는 경련성 근육 반응을 항상 보이지도 않는다. 측두엽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환자는 눈에 띄게 비정상적으로 될 수도 있다. 또 이상한 소리, 시각, 냄새 혹은 촉각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한 동안 말을 못할 수도 있고, 멍해 보일 수도 있으며, 입맛을 다시거나 옷을 집어드는 것과 같은 반복적 행위를 보일 수도 있다.

 

측두엽 간질을 앓는 사람에 대한 것들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발작이 없을 때에도 발작의 원인인 측두엽 손상에서 생기는 특성들을 종종 보인다는 것이다. 보스턴 베스 이스라엘 병원에 있는 신경학자였던 고 노먼 거쉬윈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거쉬윈드 중후군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 증후군은 다섯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과저술증(hypergraphia)인데 이는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주체할 수 없는 경향이다. 둘째는 과종교증(hyperreligiosity)으로 극단적으로 종교적이고 도덕적 우려를 하는 상태에 빠져 "때로는 여러 차례의 종교적 개종"으로 이끈다. 셋째는 공격성(aggression)으로, 항상 일시적으로 일어나지만 폭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넷째는 고수(stickiness) 혹은 타인에 대한 의존 혹은 달라붙음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째는 변형된 성적 관심으로, 성적 관심이 극단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향이다.

 

아주 유명한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거쉬윈드 증후군을 동반하는 측두엽 간질을 앓았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측두엽 간질로 진단받았고, 거쉬윈드 증후군의 모든 특징들을 보였다. 그는 형제에게 하루에 두세 차례씩 다섯 쪽이 넘는 분량의 편지를 썼다. 그의 수많은 그림들은 과저술증과 관련될 수 있고, 이는 그의 측두엽 간질이 악화되면서 그림의 작업량이 증가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젊을 때 그는 신교도적 신념으로 가득 한 전도사가 되었고, 누더기 옷을 입었으며, 먹기를 거부함으로써 그 자신을 벌했다. 그는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 중 하나를 포함한 신비한 시각을 가지기도 했다. 이 위대한 화가는 흥분 상태에서 종종 공격을 했고, 그의 친구 폴 고갱을 쫒아가서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이 사건이 잠잠해졌을 때 반 고흐는 친구를 죽이라고 했던 소리의 근원이라면서 자신의 귀를 잘랐다. 또 반 고흐는 확실히 그의 형제인 테오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테오가 약혼했을 때 반 고흐는 슬퍼서 형제를 위해 기뻐해 줄 수 없다고 썼다. 이 예술가는 한동안 자신과 함께 지냈던 고갱에게도 매우 의존했다. 고갱이 떠나겠다고 했을 때 반 고흐는 그에게 머무르라고 간청했다. 또 성적 흥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측두엽 간질을 앓았던 다른 유명인들 중에는 재기 넘치는 많은 저작을 남긴 도스도예프스키와 루이스 캐럴이 있다. 어던 사람은 캐럴이 발작 동안 보았던 시각적 환상의 영향을 받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썼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기 작가들은 그가 가졌던 종교성과 성적 무관심에 주목했다. 필립 딕, 구스타프 플라우버트, 조너선 스위프트,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아이작 뉴턴, 알렉산드로스 대왕, 표트르 대제, 율리우스 시저 모두 그들의 작품이나 믿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간질을 앓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측두엽 간질과 이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거쉬윈드 증후근이 흥미로운 점은 발작 동안 종교적 체험이 많이 일어나고, 한 발작과 다른 발작 사이에는 신앙심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발작이 종교적 경험을 야기하고 뇌 조직을 과도하게 흥분케 한다면 종교성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뇌 안에 유기체적 기반을 가지는 셈이다. 물론 믿음이 물리적 기반을 가진다고 해서 종교적 믿음을 가진 이들이 모두 발작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니다.

 

측두엽 간질이 종교적 경험을 야기한다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측두엽간질을 가졌을(혹은 적어도 가끔식은 일시적인 측두엽 간질) 가능성에 대한 역사가들의 발견으로부터 나온다. 측두엽간질 증세는 청각적 환상과 시각적 환상 모두-밝은 빛이나 사물이 더 자세하게 보이는 형태를 띠는- 를 포함한다. 의학사가들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인 사울이 발작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그는 밝은 빛을 보았고, 예수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너는 나를 박해하느냐?" 이 경험 후 사울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이름을 바울로 바꾸어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말라리아에 걸렸다고 전해지는데, 말라리아는 고열을 동반하며 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바울은 잠시 동안 시력을 잃었다고 하는데, 드물기는 하지만 이것 또한 발작의 후유증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코린트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힘이 내 안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나는 약하게 됨으로 기뻐하느니....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을 겪는다"라고 이야기했다.

 

간질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교적 인물들은 다른 종교들에서도 나타난다. 마호메트의 계시는 간질 증상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시각적, 청각적, 감정적 요소들을 종종 가지고 있다. 게다가 마호메트는 "뇌 주변에 과도하게 물이 차 있는 채로 태어났고, 어릴 때 경련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작이었을 수 있다. 인생의 여정에서 간질적 발작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로는 모세, 석가모니, 잔다르크, 성 세실레아, 성 마르가르테, 성 미카엘, 성 카다리나, 그리고 테레사 수녀가 있다.

 

위대한 종교적 인물들이 간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종교적 믿음의 진리성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간질 경험 후 나오는 계시를 "도스도예프스키의 소설이나 반 고흐의 그림만큼 진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영적인 신이 유한한 존재인 우리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인간은 믿음을 형성하는 기계이다. 우리는 빠르고 견고하게 믿음을 형성하고 심화시킨다. 우리는 믿음의 기원이나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상한 측면들은 잊어버리고 믿음을 우리 삶에서 의미 있는 지도적 존재로 생각한다. 우리는 믿음에 의존하고 그와 모순된 정보가 있어도 그 믿음을 고수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뇌가 하는 일인 것 같다.

 

 

4. 보편 윤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발전하는 인간의 지식은 좋든 싫든 지구상 모든 인간들의 머릿속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하버드 광장부터 스리랑카의 외딴 마을까지, 모든 사람들은 유전자, , 인터넷, 좋은 삶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

 

커다란 동물인 우리 같은 인간들 1만 명이 약 5000세대 전에 세계를 배회하고 있었다. 1만 명이 우리 유전자의 기원이며, 99퍼센트가 똑같다. 이후 여러 문화들이 분주하게 생겨났고 비틀거리며 발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 로크, 데카르트, 아퀴나스, 다윈, 홉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고 오늘날까지도 공감을 준다. 삶의 태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당시에 이용할 수 있었던 정보에 기초하여 세계를 훌륭하게 설명한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종교 활동들은 도덕적 규약들 및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상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 모든 규약들과 이야기들은 우리의 풍부한 과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풍부하고, 은유적이고, 매력적인 생각들 -철학적이든, 과학적이든, 혹은 종교적이든- 이 모두 나름의 강력한 증거를 가진다고 해도 그것들이 결국 꾸며낸 이야기라는 점은 가혹하고 냉담한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대학들은 이 이야기들을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매일 가르치고 있다.

 

더 환성적인 것은 새로운 과학적, 역사적 자료들이 자연과 인간의 과거에 대한 이론을 지지한다고 해도 인간 본성이란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스티분 핀커가 최근 대통령 생명윤리위원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서구 지성사에서 인간 본성의 존재는 광범위하게 부정되었고, 이를 보여 주는 세 가지 대표적인 인용구들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 호세 오르케가 이 가세트의 '인간의 본성이란 없다.' 인류학자이자 대중적 지식인인 애슐리 몬태규의 '인간의 본능이란 없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 두뇌는 충분한 범위의 행동들을 다 할 수 있고 아무런 성향도 없다.'"

 

하지만 고정된 특성들과 상황들로 표현되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고정된 심리적 특성들은 아기 때부터 존재하고,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기술들과 능력들을 소유하며, 이 모든 것들이 인간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도 안다. 또 우리가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도 안다. 우리는 커다란 동물이다. 인간의 기원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은 안락하고 감언이설이고 자극적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며낸 이야기들이다.

 

 

우리 인간 종이 도덕 감각, 즉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는 기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은 최근까지만 해도 생물학적 사실보다는 행동 분석을 통해 더 많이 논의되어왔다. 만약 이 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면, 도덕적 상황에서의 뇌의 작동에 대해 거의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현대의 사회과학자들은 인간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제임스 윌슨은 그의 고전적인 책 <도덕 감각 The Moral Sense>(1993)에서 사회과학적 연구 분석 방법을 사용했지만 "진실은, 만약 존재한다면 세부사항들 안에 있다... 나는 '가치'를 증명할 '사실'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의 도덕적 관습과 도덕 감각의 진화적, 발달적, 그리고 문화적 기원을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이 기원의 단일성을 발견하리라 생각한다. 단일성을 통해 인간 본성에 관한 일반적이고 비임의적이고 감정적으로 강력한 것을 더 잘 인지할 수 있다"리고 인정했다.... 윌슨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과학적 방법이 도덕성을 설명하는데 얼마나 부적절한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과학적 발견들이 도덕성의 존재와 힘을 지지해 준다." 윌슨은 인간의 도덕 감각이 타고난 것임을 보여 주는 사례들을 철학사뿐 아니라 진화론, 인류학, 범죄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까지 광범위하게 검토했다. 그는 지성인들의 논의를 이끄는 보편적인 도덕적 본능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사실, 이 도덕적 본능은 너무 본능적이어서 종종 간과되기도 한다. "인간 보편성에 대한 많은 논의들은 법과 실천들에 대한 탐색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규칙의 형태로 굳이 언급될 필요가 거의 없다..." 이런 보편적인 것들 중 가장 상위의 규칙은 살인과 근친상간은 잘못된 것이고, 어린이들을 돌봐야지 버려서는 안 되며,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되고, 가족에 충실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윌슨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디. 도덕적 추리에 대해 뇌에 기반을 둔 설명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련의 연구들은 이제 과학적으로 설명되었다. 감정 처리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들은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할 때에는 활성화되지만 또 다른 도덕적 판단을 할 때에는 활성화되지 않는다. 도덕적 결정의 본성에 관해 수년 동안 제시되어 온 논의들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현대 뇌 영상의 발달로 해결되고 있다. 즉 도덕적 믿음에 의거한 행동은 감정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당면한 도덕적 문제를 고려할 때 활성화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뇌의 자동 반응으로부터 도덕적 반응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진화심리학은 도덕적 추론이 인간 생존 -사회에서 행동하는 데 있어 어떤 규범을 인지하고 타인과 자신에게 적용하는 능력은 생존과 번성을 돕는다- 에 유효하다고 지적한다.. 윌리엄 D. 캐시비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환경에서 번성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추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추리 능력이 진화에 의해 형성된 뇌 안에 갖추어여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런 문제들이 바로 인간 뇌의 독자성, 즉 인간 조건에 대한 진짜 비밀들이다. 오래전에 수행된 연구는 이미 뇌의 본질적 기능이 결정을 내리는 것, 즉 뇌가 의사 결정 도구라는 것을 인정했다. 인간 의식의 어떤 차원도 사회적 문제들, 즉 사회 집단에서의 위치와 상황에 대해 우리가 온종일 내리는 시시각각의 판단들보다 더 많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비교할 필요성 같은 것들 때문에 뇌 용량이 거대하게 확장되었고 그 결과 거대한 대뇌피질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도덕적 추론을 하는 동안 활성화되는 특정 뇌 영역을 검토하는 실험을 하려면 먼저 도덕적 추론 자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도덕 이론들을 다 검토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 가지 대표적인 서양 철학이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임마뉴엘 칸트의 의무론,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이다.

 

캐시비어는 이 세 가지 철학 이론들을 검토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이 설명들은 각기 다른 뇌 영역과 관련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할 수 있다. 전두(칸트), 전전두, 대뇌변연계, 그리고 감각(), 모든 것을 적절하게 통합시키는 행위(아리스토텔레스)." 이 설명은 다음 질문의 핵심을 건드린다. 뇌 안에 도덕적 추론의 중심이 있는가?

 

도덕적 인지에 대한 연구는 세 가지 주요 주제들을 다룬다. 도덕 감정, 마음 이론, 그리고 추상적인 도덕적 추론이다. 행동의 동기가 되는 도덕 감정은 섹스, 음식, 목마름 등과 같은 기본 충동을 조절하는 뇌 줄기와 대뇌변연계 축에 의해 주로 움직인다. 마음 이론은 타인의 생각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 마음 이론을 근거로 우리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즉 마음 이론은 사회적 행동을 지도하기 때문에 도덕적 추론에 본질적이다. 7장에서 논의했던 '거울 뉴런', 안와 전두피질, 편도의 내측 구조, 그리고 위관자 고랑이 마음 이론을 처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추상적인 도덕적 추론은 여러 뇌 시스템들을 사용한다는 것이 뇌 영상에서 밝혀졌다.

 

연구자들이 제기하는 추상적인 도덕적 추론의 딜레마는 손수레 문제로, 9장에서 이 중 한 종류에 대해 설명했다. 이 문제가 안고 있는 도덕적 딜레마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열차는 선로를 따라 맹렬히 달려오고 있고, 다섯 사람이 앞에 서 있다. 당신은 그 열차가 다섯 사람을 치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신 옆에 있는 변환기 스위치를 당겨서 열차가 다섯 사람을 치지 않도록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출신의 조슈아 그린은 보다 일반적인 두 가지 예를 제시한다. 새로 구입한 차를 몰고 있던 도중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았다고 하자. 그는 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당신의 새 차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될 것이다. 그 남자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도덕적으로 좋은 것인가? 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당신이 100달러를 보내면 열 명의 굶주리는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돈을 보내지 않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그린과 그의 동료들은 어떤 선택을 하든 겉으로는 같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자기 이익을 보존하거나 아니면 당신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득 없이 생명을 구하거나- 첫 번째 시나리오는 개인적이고 두 번째 시나리오는 비개인적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손수레 문제 같은 개인적 딜레마에 대한 판단을 할 때에는 감정 및 도덕 인지와 관련된 뇌 부위가 더 많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런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도와주는 이가 즉각적인 혜택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타적 본능과 감정이 결합되는 신경 구조가 선택되었을 수 있다. 직관적 본능 혹은 도덕성은 진화 과정을 통해 선택된 결과이다. 우리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도록 재빠른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인지 과정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면 우리는 더 잘 생존할 것이다. 돈을 기부하는 경우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이타주의는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 긴박한 필요성은 없다.

 

이런 사실은 도덕적 진리가 정말 보편적인지, 아니면 단지 개인적인 의견이나 직관적 본능일 뿐인지의 중심 문제들로 돌아가게 한다. 언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외부적 진리를 지각하거나 내적 태도를 표현하는가? 뇌 영상은 뇌가 기본적인 도덕적 딜레마에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딜레마에 직면한 순간 모든 사회적 자료나 우리 각자가 소유하는 개인적인 생존 이익, 문화적 경험 그리고 우리 종의 기본 기질이 하위 의식적 메커니즘으로 흘러 들어가고, 행위든 휴식이든 그것을 추진하는 하나의 반응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 이것이 윌슨이 이야기하는 도덕적 섬광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인간 종을 보호해 주는 접착제이다.

 

9장에서 보았듯이 마크 하우저는 이 문제를 언급했다. 만약 합리적 과정을 거쳐 도덕적 판단이 내려진다면 다른 문화, 연령, 성별의 사람들이 공통적인 문제에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을 예측할 수 있다. , 결정을 내리는 데 이용 가능하고 명확히 표현된 정당화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우저는 성, 나이, 문화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피실험자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이 책을 통틀어 주목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도덕적 판단은 직관적이다. 우리는 한 상황이나 의견에 반응을 하고 왜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느끼는지를 설명한다. 즉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자동적 반응을, 즉 두뇌 도출적인 반응을 한다. 우리는 그런 반응이 절대적 진리에 대한 반응이라고 믿는다. 나의 제안은 그런 생각이 해석자인 뇌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것이 절대적인 '옳음'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도덕적 규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도덕적 판단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린이 지적하듯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과 자신의 돌봄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결국에는 옳은 것 같다.

 

뇌는 사회 집단의 도덕적 규약을 발전시키는 생산적 역할을 하면서 타인의 마음 상태를 고려한다. 보편적으로 인정된 자기 생존 메커니즘들은 함께 협력해 왔고, 사회적 배경에서 작동되곤 했다. 진화는 인간뿐만 아니라 집단을 구하는데, 집단을 구하는 것은 또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읽게 되었다.

 

 

모의 이론과 이론-이론 간의 긴장은 다시금 보편 윤리의 딜레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규칙 집합에 의존하는 도덕적 진리는 우리가 학습해야 하는 규칙들인가? 아니면 감정이입을 통해 행동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도록 갖추어진 시스템을 사용하는 뇌의 결과로 도덕적 진리가 생겨나는가? 그 답이 무엇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규칙들은 존재한다.

 

우리는 견고한 진리들로 만들어지는 보편 윤리가 아니라, 맥락적이고, 감정에 영향을 주고, 생존을 돕게끔 고안된 구체적인 상황들로부터 만들어기는 보편 윤리를 찾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고 의존해서 살아갈 그런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란 것이 맥락적이고 사회적이며 신경 메커니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알면, 윤리적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신경윤리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은 다음이다. 우리가 뇌의 신경 구조를 바탕으로 사물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주어진 특정 맥락에서 가장 좋거나 논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는 직관적 본능을 논의하는 것이다.

 

나는 보편 윤리가 가능하다는 견해에 분명한 입장을 취해서 그것을 이해하거나 정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생각이고 일견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다른 출구는 없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믿음과 인간 경험의 본성이란 것이 얼마나 편향적인지, 그리고 우리가 과거 이야기들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는지를 알고 있다. 어떤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가 이것을 안다. 현대 과학의 과제는 인간이 어떤 자연 질서를 믿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그 질서가 어떻게 특징지어지는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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