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달라스 윌라드 편집,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중에서

슈마허 2012. 1. 28. 23:35

 

달라스 윌라드 편집,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중에서

 

 

 

1.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성과주의적 방식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야. 나는 중요한 사람이야. 이것을 성취했고 저것을 해냈기 때문이지.’ 이러한 유형의 서술 방식은 수백만 가지도 넘습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왜냐면 자유주의 운동가이기 때문이지.’ 예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만일 이것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식이라면 자기보다 성취가 덜한 사람들을 깔보고 그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께게 될 것입니다.

한편 만일 우리가 전통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이고 “나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노력해”라고 말하며 이러한 점들로 인해 스스로에 대해 기쁘게 여긴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올바른 교리와 생활방식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종교적이 stkfka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그저 열심히 일하여 얻은 성과들에 크게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라 해도 그것이 자기 이미지에 대한 기초라고 한다면, 태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는 다른 방식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과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에 기초한 서술입니다. 은혜 서술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힘으로 그 일을 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돌격” 따위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로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섬기는 이가 되었고 희생하셨습니다. 그는 약하고 임없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약함 속에 성취된 구원은 약함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를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자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높이에도 제대로 부응하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는 실패자입니다. 제게는 자비와 은혜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신 일 때문에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 서사가 주는 의미는, 우리는 아무도 경멸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의 서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라도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금 도덕과 성과주의 서사로 돌아갔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진리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를 혹은 제 이미지의 기초를 그보다 내가 낫다는 데 두지 않습니다! 저를 구원한 것은 그런 조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 은혜의 서사에 조금이라도 기초해 활동한다면, 자기 의나 분열 지향, 비난적인 태도나 정죄 때문에 비난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문제의 커다란 일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열의 일부입니다. 왜냐햐면 종교는 우리 마음 가운데 실족할 언덕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끔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가운데 그들을 희화화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들을 억압하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나 행동은 자기 의에서 비롯됩니다. 즉 스스로 구원에 이르렀다는 사고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또 도덕 성과주의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그러한 것들을 제거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티머시 켈러, 살아 있는 신 : 진리의 배타성)

 

 

 

2. 하나님을 가리키는 자연의 흥미로운 표지들 -> 도덕법칙

 

동물의 왕국에서 인간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을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원칙을 깨뜨릴 자유가 있는 듯하지만 그 원칙 아래 살아갑니다. 옳은 행동이 있고 그른 행동이 있습니다. 인간은 옳은 행동을 해야 하고 그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원칙을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면 변명을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원칙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옳은 것을 어겼을 때에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는 재빨리 반대할 것입니다. “잠깐만요! 제가 알고 있는 인간 문화 가운데는 끔찍한 행동을 장려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도덕 법칙 아래 살아간다고 어떻게 말할 수 가 있습니까>” 글쎄요, 그런 사람들의 문화를 배울 때 우리가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옳은’ 행동이라는 점입니다. 문화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도덕 법칙은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 해동이 옳고 그르냐는 그 문화가 ‘옳음’과 ‘그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도덕 법칙 때문에 인간은 때로는 상당히 극적인 일들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이타주의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무언가 희생적인 일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각에서는 이것이 진화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그의 가족에 대해 이타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진화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타당한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은 그와 동일한 DNA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DNA를 존속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재생산에 적합하게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다윈주의자들의 관점에 부합하는 설명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때 그들이 후에 우리를 도울 것이란 기대를 가진다면, 즉 상호 호혜적인 이타심을 갖는다면, 분명 재생산 적응도를 높이는 데 유익할 것입니다. 또는 하버드 대학 진화 역학 프로그램의 단장인 마틴 노웍(Martin Nowak)이 주장한 것과 같은 논리를 펼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 이론을 가지고 컴퓨터 모델링을 해 본다면, 모든 참여자들이 상대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동할 때 개인에게도 유리한 결과가 돌아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진화적 관점의 이타주의나 게임 이론의 교훈이 주는 또 다른 결론은, 같은 그룹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진화론의 모든 주장은 무의미해집니다. 글쎄요, 이런 주장이 우리 현실에 부합할까요? 이것이 우리가 실제 경험한 것과 맞아떨어지나요? 도덕 법칙이 가장 극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때가 어떤 상황 속에서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가족들, 즉 언젠가는 우리에게 잘해 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도움울 줄 때가 아닙니다. 혹은 우리가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잘해 줄 때도 아닙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경탄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이것야말로 숭고한 인간성의 전형이다!’라고 말하게 하는 것은 자기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철저한 이타주의입니다. 인도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는 테레사 수녀를 보았을 때, 나치의 대학살로부터 이름도 모르는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한 오스카 쉰들러를 보았을 때 그리고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았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웨슬리 오트리는 어떻습니까? 오트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건설 노동자입니다. 하루는 뉴욕 시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젊은 대학원생이 간질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는 철로로 떨어졌습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지요.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웨슬리는 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전히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젊은 학생을 철로 사이의 좁은 틈새로 끌어 당기고 자신의 몸으로 그 학생의 몸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지하철이 지나갔습니다. 기적적으로 거기에는 두 사람 모두가 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철저한 이타주의입니다. 웨슬리와 그 대학원생은 전에 만난 적도 없었고 어떤 다른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됐을 가능성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흔히 구별하듯, 하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뉴욕 시민들은 열광적인 존경과 찬사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희생 정신입니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얼마나 숭고한 행동입니까?

 

C.S. 루이스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고 있다면, 위대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보살피시고, 선함과 경건함의 본체이시며, 그에게 속한 사람들도 선하고 경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고 있다면, 이 도덕 법칙이 당신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그 법칙이 새겨져 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것을 지향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제게는 이 설명이 훨씬 타당하게 들립니다.

저는 몇 해에 걸쳐 이 같은 내적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실로 긴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서히 저 자신보다 훨씬 위대한 어떤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칸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그리고 점점 더 깊이 경외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좀더 오랫동안, 좀더 진실된 마음으로 그것들을 바라볼수록 그렇습니다. 바로 반짝이는 하늘과 제 마음속에 도덕 법칙입니다.”

 

제 심정이 꼭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를 꼭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다시금 세계의 종교들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각종 종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확실히 전보다는 훨씬 더 잘 준비된 상태여서인지, 유일신을 믿는 주요 종교들 간에는 커다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당수의 핵심 교리들이 실제로 서로 호응이 잘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좀 놀랐습니다. 서로 극단적으로 다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습니다.

이때쯤 저는 편치 않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도덕 법칙이 신의 존재를 가리킨다면 그리고 그 신이 선하고 경건하다면, 반면 저 자신은 그렇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덕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해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때야 하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가진 실수와 결점들 때문에 그런 이미지는 자꾸 물러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연 신과의 관계를 온전히 가질 수 있는지, 갖기를 원하긴 하는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새롭게 알기 시작한 신의 존재 앞에서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점점 커져 가던 불편함의 장막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탐구하던 신앙들 가운데, 이런 상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진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프랜시스 콜린스, 신의 언어 : 과학자가 신앙의 증거를 제시하다)

 

 

 

3. 자유의 지향성

틀 안에 갇힌 정신 세계와는 또 다른 전통을 대표하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20세기 말엽에 쓰인 T. H. 그린(Green)의 책에서 몇 문장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자유는 단지 억압과 강요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다.] 자유는 단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자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넘어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상실된 것을 대가로 하는 한 사람이나 한 집단만이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뭔가 높이 여겨질 만한 자유를 말할 때, 그것은 단지 해 볼 만하고 즐길 만한 일을 하고 즐길 수 있는 긍정적인 능력과 역량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 무언가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자유는 각각의 사람이 자기 동료들의 도음과 그들이 마련해 준 안전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 자유 역시 동료들의 안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 그들을 돕는다(T. H. Green, "Lecture on Liberal Legislation and Freedom of Contract", Lectures on the Principles of Political Obligations, ed Paul and John Morrow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신 세계에도 부합하고, 세상을 향해서도 열려 있는 자유입니다.

정신을 이해하는 전통으로서 근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존재해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으로 대표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됩니다. 그 전통은 현대에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이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에드먼드 후설, 그리고 마틴 하이데거 같은 학자들입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바로 ‘지향성’입니다. 지향성이란 뭔가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한 열린 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정신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지향성을 통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물론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신은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정신의 본질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바로 내면의 빛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스승은 하나님이고, 그 빛이 정신과 상호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이 스스로 창조해 낸 세계가 아닌 하나님이 창조해 낸 세계에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자유를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의지에 대한 적절한 근거를 찾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를 보고 싶을 때, 아무 할 일 없이 뛰어 다니는 아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훈련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서 도저히 앉아서는 들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작품을 연주할 때 우리는 자유를 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파바로티가 무대에 올라 웅장한 아리아를 부를 때 마법과도 같은 그 엄청난 공연을 해낼 때 자유를 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 자신에만 몰입함으로써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유를 얻기 위해 늘 첫 번째 단계를 밟은 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 첫 단계입니다.

(달라스 윌라드, 니체 vs. 예수 그리스도)

 

 

 

4. 종말의 의미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아)

현대인들은 그 ‘고향’에 대한 의구심과 불편함을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문학 작품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불확실성의 효과를 홍수처럼 쏟아 내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유의 문학은 대부분 같은 주제의 변주 형태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모더니즘적인 자아에는 작별을 고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낙관적으로 돌진하는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 영웅적이고 자신감에 차있으며 독립적인 주체는 없습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아’를 맞이하십시오.

새로운 시대의 자아는 다양한 변장을 하고 등장합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방향성을 상실한 자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자아는 종말에 대한 감각이나 미래를 만들어 갈 안정적인 비전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만드는 결과가 급진적인 불안이라고 해도 놀라운 것이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유동상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피터 가브리엘이 작곡한 “런던 밀레니엄 돔”의 사운드트랙을 한 번 보십시오. 이 사운드트랙은 비록 2년 전에 쓰여졌지만, 제가 처음 이곡을 강연에 사용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의 상황에 서늘하리만치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내 균형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움직입니다.

이 거리들, 너무도 단단하고 굳건합니다.

아, 그런데 일렁이는 엷은 연기와 함께

내가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

아래는 솟구치고 위는 내리꽂힙니다.

땅에 닿아 있는 내 무게를 가져가 버리세요.

하늘로 깊이 떨어집니다.

모든 가족들이 참 이상해 보입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상수는

변화에 대한 이 가속률입니다.

 

케임브리지에 있는 제 동료는 우리 사회의 ‘다중 압력’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방향으로 끌어당겨지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는 어지러울 만큼 다양한 선택을 제공합니다. 마구 돌려도 끝이 없을 만큼 텔레비전 채널이 넘쳐납니다. 수천 가지 브랜드의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가공할 만한 수의 웹사이트가 존재합니다. 각종 순위 차트를 석권한 버브(The Verve)의 앨범, “어번 힘즈”(Urban Hymns)를 기억하십니까? 그 앨범은 하나의 스타일을 다양하게 재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콤 쌉쌀한 교향곡”(Bittersweet Symphony)을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는 어느 하루를 살다 가는 수백만의 다른 사람일까?”

문화 평론가들은 또한 인공의 자아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공유된 결말에 대한 감각이 결여된 채, 자아는 사회에 의해 부여된 역할의 산물이 됩니다. 그 내적 자아는 각종 역할들을 몰아가고 그 역할들이 서로 충돌합니다. 우리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법을 배웁니다. 역할들 사이를 끼어들었다 미끄러져 나오기를 반복하며 자아를 재구성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나로 만들고 오랜 시간을 걸쳐 지속되어 온, 독특한 개성을 가진 통합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제레미 벡비에게는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이제 ‘제레미 벡비’라는 이름은 탈중앙화된 자아에게 주어진 것으로 현대 문화가 야기하는 다중 압력에 의해 성형된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의 자아에 관한 또 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로 파편화된 자아입니다. 결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면 연속성 역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파편화됩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우만 교수가 우리 시대에 관하여 상당히 오래 전에 출간한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제목이 ‘파편 속의 삶’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 사회는 평생 직장이나 평색 직업의 개념이 사려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직업은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아무런 경고 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풍조는 쏜살같이 흘러가는 주말의 쾌락과 장난처럼 만났다 헤어지는 연애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저 하루 한나절, 하룻밤이면 시작과 끝이 모두 완성됩니다. 그저 소소한 희망과 소소한 결말이 있을 뿐입니다. 위대한 결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현재에만 골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삶의 환경은 폐쇄된 시간, 쏜살같이 지나가는 외침, 사진이 찍히는 순간, 화면 위를 깜박이는 이미지 등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러 가지 역설이 가져다주는 재미가 심심치 않습니다.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건너다니며 연애를 즐기고, 이 인터넷 카페에서 저 인터넷 카페로 옮기며 새 공동체를 찾아다닙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마치 끝이 없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인간의 숙명에 대한 거대한 부정인지를 고민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나는 누구인가’하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고민을 애써 외면합니다. 모잠비크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의 뀅한 눈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파키스탄 국경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피난민들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음악 소리를 더 높입니다. 왜 오늘 하루를 망치겠습니까? 뷰티플 사우스(Beutiful South)가 부르는 노래 가사의 일부입니다.

 

세계가 디즈니랜드처럼 돌아가고 있어

그 안에서 네가 진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는 거인처럼 걷고 싶어하지

하지만 네 발의 신은 풀루토의 신발이야

문제의 해결책이 필요하다면 총만큼 빠른 것이 있을까?

글쎄 미인과 바보들의 입술도 꽤 빠를 걸

세계는 어두움 속에 끝나지 않을 거야

단란한 가족 코미디 같은 결말을 가질 거야

코카콜라의 구름 사이로 빅맥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어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아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들에 저는 두 가지 이미지를 추가하고자 합니다. 먼저 과열된 자아입니다. 스티브 라이히는 그가 작곡한 탁월한 곡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들려줍니다. “내 제작자에게 이 곡을 처음 들려줬을 때의 일이야. 그를 돌아보며 이렇떻게 말한 기억이 나. ‘저 넓은 평원으로 나가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거야.’ 그게 바로 이 곡의 이미지야. 마치 사막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위를 있는 힘껏 달리는 것처럼.” 방향성이 없는 과열된 활동.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 대한 적절한 음악적 이미지인 듯 합니다. 정해진 편성도 없고 진보한 정도나 지금껏 걸어 온 방향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처럼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원을 돌며 왔던 곳에 계속해서 발자국을 찍기만 합니다. 하지만 감히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죽기만을 기다리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없는 과열된 활동이 오늘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물론 라이히가 이런 것을 모두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곡은 어쨌든 지금의 우리 현실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은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시간적 자아입니다. 방향성을 상실하고 인공적이며 파편화되고 과열된 자아의 선택은 자명합니다. 이 무시간적인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는 이런 종류의 감각을 제공하는 음악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목격해 왔습니다. 칠 아웃 뮤직에서부터 스페인 수도원 성가 같은 것까지 다양합니다. 그리고 매우 신중하게 재해석된 빙엔의 힐데가르트 풍 음악까지. 저는 이런 음악이 좋지 않으니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음악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이유는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들을 위해서나 이 세상을 위해 어떤 풍부한 결말이 있기를 깊이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또 이토록 참담한 9/11 이후 오늘날의 현실을 두고 볼 때, 영국에서 그리고 여기 미국에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쏟아져 들어온다 해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혹인 거리에서 혹은 광장에서 대규모 예배를 갖거나 혹은 유사 예배 행사를 벌인다 해도 말입니다. 여기 버클리에서 멀지 않은 광장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모였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종말에 대한 감각이 팽배할 때라면, 누구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종말’이 끝인 동시에 세계의 완성이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말로 들어온 신)

물론, 또 많은 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현상이 그저 현실 도피 정도로 비처질 수도 있습니다. 허망한 것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십시오. 그 교회들의 광장들에서 이야기하는 신이 실제로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면? 물론 저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은 이 세상의 종말을 계획하고 있으며 우리도 종말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게다가 지금 그 종말에 대한 감각을 주기를 원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의를 모으기 위해,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우리를 만나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만의 위대한 결말을 이뤄내는 데 끔찍하게 실패하였을 때,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새 시대를 열어 보겠다는 야망의 정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내겠다는 모든 시도가 엄청난 학살과 파괴를 낳았을 때 신이 인간을 만나 주었다고 말입니다.

예수의 죽음 속에서, 신은 우리가 가진 순진한 낙천주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억압의 피해자였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의해 영광스럽게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당시 종교는 순전히 인간적인 소망으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잔인할 만큼 압제적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로마 제국은 정말 많은 측면에서 참으로 위대했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는 부패하고 잔혹하게 독재화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급격하게 방향성을 상실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핵심 정체성이 붕괴 직전에 있는 듯 보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끔찍하게 파편화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의심합니다. 또한 제자들에 의해, 군중들에 의해 그리고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찢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은 인내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참으시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런 종류의 것을 음악에서 듣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간 제가 들어 본 것이나 찾아낸 것들 가운데 쇤베르크의 제자,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이 작곡한 곡만큼 여기에 가까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 작품은 그의 어머니의 장례 행진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작품은 거의 2분 동안 타악기의 웅얼거리는 듯한 연주로 시작됩니다. 느리고 낮게 종을 때리는데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소리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급격하게 치솟습니다. 갑자기 침묵을 깨며 사방으로 치고 나옵니다.

죽음이란, 물론 제가 지금껏 말한 모든 것 위를 맴도는 현실입니다. 모든 결말들의 최종 결말입니다. 이 현실이, 충만한 종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위협합니다. 이 현실로 인해 우리는 어떤 것도 너무 간절히 바라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목을 사로잡은 방법입니다. 그가 우리를 그 지점에서 만나십니다. 모든 헛된 소망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모든 순전히 인간적인 희망이 사르라진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종류의 희망이 솟아납니다. 3일이 지나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결말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음을 발견합니다.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고, 손과 발에 못자국,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진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새롭게 부활했습니다. 이전보다 더 넘치는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떤 결말을 고대하게 되었을까요?

예수가 죽음에서 일어난 것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승인입니다. 또 그의 내면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에 대한 동의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다. 그가 너희에게 종말에 대한 새 의미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 세상과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의 종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전에 꿈꿀 수 있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이다.” 여기 우리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결말이 있습니다. 이 결말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안목을 가지게 되면, 새로운 종류의 자아가 부상합니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입니다. 인간이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결말을 향해 낙관적으로 달려 나가는 모더니즘적인 자아가 아닙니다. 항상 불안정하고, 종말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자아도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음악적 자아, 혹은 찬양하는 자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이 자아를 주로 음악을 사용해 묘사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농담이 섞여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여러분이 음악적인 재능이나 소양이 보족하면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다른 종류의 음악은 그 존재에 대해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놀랍도록 강력하게 하나님이 주신 종말의 의미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종말의 의미를 품고 살아가는 것)

로마서 8장, 바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는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18, 22-25절)

 

1, 새창조 : 첫째, 하나님이 주신 결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새 창조를 향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종말’은 어떤 것입니까? 이 세상을 떠나 완전히 별개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의 재창조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가능케 한 소망입니다. 이 세상이 재창조될 것을 소망하는 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영원한 세계가 아니고, 칸트가 말하는 흐릿하고 알려지지 않은 본질의 세계도 아닙니다. 밝게 빛나는 파란 하는 너머의 동화 나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입니다. 재창조를 위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바로 이 세상입니다. 파괴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최후의 심판을 거친 이 세상입니다. 악으로부터 자유하고 고통이 사라진 이 세상입니다. 수많은 차원이 더해진 이 세상입니다. 바로 새로운 색과 어조가 분출하며, 역동적이고 환희에 찬 끝없는 춤 속에 새로운 리듬과 연주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 그 종말은 어느 이국 땅에 맞이하는 거대한 락 콘서트 같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연주 때문에 불쾌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는 코드가 세 개뿐이라고 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아이리쉬 댄스같이 열정적인 춤곡을 아무리 연주해도 결코 피곤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춤곡의 절정에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그 모든 새 창조를 축하하는 이들을 이끄는 혜수 그리스도의 실재를 환영하는 순서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진정으로 완전하게 살게 된 이들을 이끄는 머리가 되실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의 가족으로 입양될 것입니다. 비인간화되는 것이 아니라 재인간화되는 것입니다. 재창조, 이것이 그를 믿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2. 종말을 맛보기 :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종말의 감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지금 그 종말을 맛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서 결말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모든 사건의 종합은 그 이야기의 임시적인 마지막 부분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잠시, 그 결말이 이야기의 한가운데 주입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결말을 미리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보며 최종 결말이 일찍 드러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은 미래에 있을 새 세상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망했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재건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활은 종말의 예고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보다 더 좋아집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이 부활하신 예수는 그의 영을 보내어 우리가 이 세상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맛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속에 미래를 가지고 오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역할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주피터”를 아시는 분이 있을 텐데요. 그 3악장 중간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 표 11-1 모차르트의 교향곡 주피터 3악장 중간 부분의 결말

이것이 대체 뭐죠? 이것은 결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서양 음악에서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종결을 알리는 기법입니다. 만일 관현악 편성을 갑자기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차르트가 곡을 끝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행하던 것을 완전히 멈춘 것이지요. 하지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 표 11-2 모차르트 작품 번호 551, 교향곡 41번 C장조, 주피터 3악장 트리오

그 결말(표 11-1)이 알고 보니 새로운 8마디 악절의 첫 번째 마디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대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말인가요, 시작인가요? 답은, 둘 다입니다. 모차르트는 마무리 기법과 시작 사이의 모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말이 너무 일찍 찾아왔고 그렇게 해서 새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 일찍 찾아온 종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기법이었습니다. 혹은 교향곡의 새 악절이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3. 현실 도피가 아니다 : 그리 오래지 않은 언젠가, 저는 서부 앤젤레스 하나님의 교회(the West Angeles Church of God)에서 이렇게 찬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환희가 솟구치는 가운데 말입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에 방문할 때면 그 교회를 자주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 교인들은 소망에 찬 찬양이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제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소외된 자들을 교육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법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더 나은 주거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씁니다. 그 교회 교인들의 그러한 활동을 통해 저는 이 세상에서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신음하는 세상 속으로 다시금 힘차게 들어가게 하는 진정한 소망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들은 바울의 비전은, 이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을 위한 비전이었습니다.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 물론 그들 자신도 탄식하는 피조물 중 하나이지만 종말에 대한 예고편을 가져다주며, 또는 그것을 증거합니다. 감정적인 회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앞서 인용한 버브의 앨범을 다시 한번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소리를 듣기 원해

내 안에 있느 고통을 일깨워 줄 소리

 

4. 음표 사이의 음악을 듣기 : 물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절망적인 상황을 버텨 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어럽게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주신 종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종종 ‘음표들 사이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매우 훌륭한 CD가 최근 발매되었습니다. 그 CD에는 현존하는 바이롤린 솔로 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의 연주가 실려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 세바스천 바흐의 파르티티 D단조, 샤콘느입니다. 한 독일인 음악 교수가 말하길, 바흐는 이 작품을 작곡할 당시, 여러 합창곡과 성가 선율을 염두에 뒀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선율을 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교수는 거기 음화 음 사이로 그 선율이 흐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합창곡들은 모두 죽음과 부활에 관련이 있는 곡들입니다. 그리고 바흐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이 갑자기 죽은 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힐리아드 앙상블이라는 합창단은 바이롤리니스트와 협연으로, 바이올린 파트가 연주되는 가운데 바흐가 작곡 당시 염두에 두었다는 합창곡을 불러 녹음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도 음과 음 사이의 선율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바이올린 파트가 훨씬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저는 열아홉 살이 되기까지 기독교와 관련된 것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저의 가장 큰 두려움 가운데 하나는 제가 가진 모든 관심사들, 특히 음악적인 관심들이 갑자기 한 켠으로 밀려지고 삶이 훨씬 재미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색으로 가득하던 세상이 갑자기 흑백으로 변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 예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음악은 이제 제게 훨씬 더 아름답게 들리고 제 영혼을 훨씬 강하게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음과 음 사이의 선율’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음악이란 매체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음악을 쓸 수 있게 허락하셨을까? 어떻게 그런 영감을 주셨을까? 어떻데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상 연주되는 음들을 더욱 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만일 식물학자든 의사이든 혹은 경제학자나 수학자이든 여러분에게 필요한 기술은 음과 음 사이를 듣는 것입니다.

 

5. 지체와 침묵 : 다섯째, 종말에 대한 의미를 품고 산다는 것은 지체되는 종말을 기다리며 침묵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읽은 바울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춰봅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지체는 전체의 일부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침묵의 시간들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시간들. 하나님이 긴 휴가를 떠나신 것 같은 시간들. 은혜가 더 이상 놀랍게 느껴지지 않는 그 시간들 속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사건이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약속이라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럴 때 그 침묵의 시간들은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6. 다양한 차원에서 소망하기 : 여섯째, 하나님이 주신 종말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차원에서 소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우리가 이해해야 할 핵심은 이것입니다. 한 차원의 모든 해소나 결말은 또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파동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언제나 새로운 차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 성경의 하나님은 단순히 신비로운 방식으로 운행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파동으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 이상의 레벨에서 살도록 초대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소명을 줍니다.

…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차원 이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오직 한 가지 차원에서만 소망을 품고 산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소망하기를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더 높은 파장으로 우리를 조율해갈 때 우리는 결코 소망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소위 포스트모던 문화는 우리가 ‘평평하게’ 살아가도록 종용합니다. 그저 아주 짧은 단파장에 의존해 살도록 합니다. 하루하루 자잘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차원에서 소망하기를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소망의 맥락 속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대한 서로 다른 소망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매우 작은 것 위에 큰 것을 세우기도 하십니다. 우리 삶의 매우 단기적인 일상에서 하나님은 위리가 다시 소망할 수 있게 될만한 놀라운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십니다.

 

7. 즉흥 연주처럼 살기 : 일곱 번째, 하나님이 주신 종말의 감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든 주어진 대로 즉흥 연주를 하는 것을 뜻힙니다.

여러분 중에는 공으로 저글링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있을 텐데요. 저글링을 할 줄 하는 사람들이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로 가르치는 것은 바로 놓아버리는 법입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능은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잡는 데 온 힘을 쏟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제대로 던지는 법입니다. 잡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것입니다. 결말이 하나님에 의해 보장되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주어진 것을 마음껏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레미 벡비, 종말의 의미)

 

 

 

5. 외치는 소리의 메아리들

 

어떤 한 사람이 방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깥의 아무도 볼 수는 없지만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대화의 내용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일이 벌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인류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알게 모르게 듣게 되는, 네 가지의 메아리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 정의 : 네 가지 중 첫 번째는 정의입니다. 이것은 제가 C. S. 루이스에게 정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으로,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의 시작도 바로 이 정의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이 세계의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일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 사회 속에 뭔가 크게 잘못된 것들을 발견하고, “좋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해결해 내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전 세계 모든 정치인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과 의제를 가지고, 이런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문즈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개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잘못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 내가 또 그랬네!”라고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의미로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혹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무언가 잘못 튕겨져 나와 제자리로 되돌릴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굳이 정의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 필요가 없습니다.

다섯 살 난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는 놀이터에 한 번 나가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루이스의 요점이기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불공평해.” 아이들이 어떻게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까요? 그 아이들이 정의의 본질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공정과 불공정,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감각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는 데서 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그 메아리를 듣게 되는 기인한 목소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슬람인이든 어떤 신앙을 가졌든, 세속적이든 현대인이든 포스트모던인이든 우리 모두가 정의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2. 영성 :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에서 이야기한, 그 외치는 소리의 두 번째 메아리는 영성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30년 전에 “현대 사회 속의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면, 아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사람들은 세속주의로 가득 찬 멋진 신세계와 함께 영성을 제거해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영성은 다시금 폭발하듯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를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다양한 차원의 피조물이고 복수의 층위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삶과 세상과 인간의 존재에는 우리가 실험관이나 은행 계좌에 넣을 수 있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이 ‘뭔가 저 밖에 있는’ 듯 보이는 것을 파고들 수 있을까요? 영성은 종종 난해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평생을 바쳐 어떤 영성의 길을 추구해도 결국 자신이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으로는 정말 가려운 곳을 긁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대부분의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인간 삶의 또 다른 차원을 탐험해 보는 일은 모든 사회 속에도 존재하고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에도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에게는 혼란스럽게 보입니다. 그런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그것이 과연 우리를 어디고 이끌지 알 수 없습니다.

 

3. 관계 : 이번에 말씀드릴 세 번째 메아리는 바로 관계에 관한 의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데 늘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문제는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촌 가족으로서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쟁을 둘러싼 산업이며 전쟁의 소문들 그리고 인류의 3분의 1을 경제적 풍요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제 거래들, 더 나쁜 것은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 경제적 발전 전망을 아예 어둡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좀더 나은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쓰든 관계는 어려워지기만 한다는 점도 잘 압니다.

대부분의 사적인 차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간의 우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가장 친밀한 괸계들, 가족 관계나 결혼 관계조차도 유지하기가 참 어려워졌습니다. 설령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에게,, “오늘은 꼭 이 문제를 바로잡고야 말겠어” 하고 다짐해도, 우리는 여전히 관계를 망치곤 합니다. 따라서 관계는 정의나 영성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우리는 관계에 있어 뭔가를 잘못하기 일쑤입니다.

 

4. 아름다움 : 네 번째 메아리는 아름다움에 관한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비엔나에 있는 다락방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거기에서 오래된 종이 한 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피아노를 위해 쓰여진 듯한 악보 원본이었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그 손으로 쓴 악보를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가만, 좀더 두고 보니 왠지 모차르트가 직접 쓴 안보인 것 같습니다. 피아노로 가져가서 연구즐 해 보니, 정말 모차르트의 작품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우리가 처음 듣는 곳입니다. 참 멋진 일이지요! 그런데 대체 그 악보는 무엇일까요?

수수께끼는 거기서부터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악보에는 피아노가 잠시 연주되지 않는 부분에는 뭔가 빠진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주가 다시 시작되면 아까와는 좀 다른 연주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연주는 절정을 향해 올라가는 듯한 멋진 구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악보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좀더 큰 작품의 피아노 파트에 해당하는 악보였던 것입니다. 피아노와 협연하는 현악 사중주 또는 오중주 작품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바이롤린 소나타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진 것은 피아노 파트뿐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참 아릅답기는 하지만 동시에 참 괴로운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은 그것 너머의 아름다움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아름다움과 대면했을 때 처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이 세계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미완성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슨 뜻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혼란은 좀더 큰 전체에 속하는 일부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큰 총체의 한 부분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톰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중에서

 

우연히도 저는 이 비유를, 실제 필라델피아의 한 도서관 사서가 베토벤의 악보를 발견하기 한두달 전에 썼습니다. 그 악보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대푸가의 원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예술을 모방한 삶의 놀라운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역시 우리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란한 일몰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일몰 후에는 어두움이 깔립니다. 또 우리는 화사하고 싱싱한 꽃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하지만 그 꽃은 곧 시들고 맙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천진난만함과 지혜로운 노인이 풍기는 고고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아름다움도 곧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문화는 죽음이란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체 하지만, 모두를 그것이 엄청나게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사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정의, 영성, 관계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네 가지 모두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메아리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메아리들은 고집스럽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쯤에서 이런 주장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목소리의 메아리들이 존재하고, 메아리가 있다는 것은 어떤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 그것은 신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는 그 길로 들어서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저 여러분이 그러한 메아리를 가슴 속에 품고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를 깊이 성찰해 보며, 예전에 그것에 관해 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는 것입니다. 신이 말씀해 주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지요? 왜냐하면 제 책은 기독교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귀 기울여 들어 보십시오.

(톰 라이트, 순전한 그리스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