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제사 뒤집어 읽기_ 한국경제신문 게재

슈마허 2012. 1. 7. 11:59

경제사 뒤집어 읽기_ 한국경제신문 게재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지난 4개월간 연재했던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의 '경제사 다시 보기'가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의 '경제사 뒤집어 읽기'로 새 단장해 독자를 찾아갑니다. 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주 교수는 나름의 시각을 갖고 깊이 성찰한 서구의 역사와 경제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것입니다.

 

 

[경제사 뒤집어 읽기]

(1) 최초의 교역선이 `가죽배` 였던 까닭

흑요석과 인류 최초의 국제교역

흑요석(obsidian)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도구로 사용했던 물질이다. 용암이 지표면에서 급속히 굳어지며 형성되는 이 물질은 돌이라기보다는 유리에 속하는데무엇보다도 가볍게 치면 예리한 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석기시대에는 흑요석으로 칼이나 화살촉도끼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흑요석 날이 어찌나 예리한지 심지어 현대에도 어떤 의사들은 수술할 때 강철 메스보다 흑요석 메스를 고집하기도 한다. 강철 메스의 날은 맨눈으로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워 보이지만 배율이 높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흑요석 날은 전자현미경으로 볼 때도 똑바로 나 있으며두께가 3나노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예리하다. 흑요석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물질이 한정된 화산 지역에서만 나오는 데다 생산 지역마다 특이한 구조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흑요석은 자기 생산지를 드러내는 일종의 지문을 갖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흑요석 도구를 분석해 보면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본토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프랭크티 동굴(Frankhthi cave)의 사례를 보자.이 동굴은 약 2만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다 약 3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 중기에 버려진 곳이다. 선사시대에 이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이 계속 거주한 유적지는 흔치 않다. 바로 이곳에서 흑요석 유물이 발견됐다. 그 출처를 조사해 보니 그리스 본토에서 약 120떨어진 멜로스 섬으로 확인됐다. 멜로스 섬은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인 '밀로의 비너스'가 발견된 곳 정도로 유명하지만('밀로'는 멜로스 섬을 가리킨다) 사실 이 섬은 고대에는 자연자원이 풍부하게 생산돼 수출이 이뤄진 중요한 산지였다. 흑요석의 산지와 발견 장소를 놓고 볼 때 선사시대부터 해상 원거리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원거리 교역 역시 마찬가지다. 콜럼버스가 오기 이전 아메리카의 여러 사회에서도 흑요석은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마야 문명에서 전사들은 나무 몸체에 흑요석 날이 박힌 칼을 갖고 전쟁을 했다. 고고학자들은 각각 화산 지역의 흑요석을 구분할 수 있으므로 어느 지역의 흑요석이 어디까지 송출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칠레의 차이텐 화산에서 나온 흑요석은 남북 방향 각각 400떨어진 지역까지 보급됐다. 우리의 짐작과 달리 인디언 사회에서도 상당히 먼 거리까지 재화가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흑요석의 이동을 통해 고대 문명의 원거리 교역을 추적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콜린 렌프루(Colin Renfrew)라는 학자는 기원전 6000년께 중동 지역(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사용되던 흑요석 도구들의 원산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모든 흑요석은 아르메니아 지방의 두 산지에서 난 것이었다. 아르메니아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위치해 있다. 역사가들은 이곳의 화산 지역에서 생산된 흑요석을 배에 싣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타고 내려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여러 지역에 판매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문명 초기의 상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운송했을까그 당시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이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참조할 만하다. 그는 아르메니아에서 출발한 배가 바빌론에 도착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강물을 타고 바빌론으로 내려가는 데 사용하는 배들은 둥글고 전체가 가죽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아시리아에서 상류 쪽에 있는 아르메니아에서 버들가지를 베어 틀을 만들고 그 바깥에 방수용 짐승 가죽을 입혀 선체 노릇을 하게 한다. 그러나 고물을 넓히지도 이물을 좁히지도 않고배를 방패처럼 둥글게 내버려둔다. 그러고 나서 속을 짚으로 채우고 화물을 실은 다음 강물을 따라 떠내려 보낸다. () 배마다 살아있는 당나귀를 한 마리씩 싣고 다니고더 큰 배들은 여러 마리를 싣고 다닌다. 바빌론에 도착해 짐을 다 처분하고 나면 배의 틀과 짚조차 다 팔아버린 다음 짐승 가죽을 당나귀에 싣고 아르메니아로 몰고 간다. 유속이 빨라 강물을 거슬러 항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가 아닌 짐승 가죽으로 배를 만드는 것이다. 당나귀를 몰고 일단 아르메니아로 돌아오면 그들은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배를 만든다. '(헤로도토스천병희 역,《역사I;194)나뭇가지 틀에 짐승 가죽을 두른 형태가 아마도 최초의 선박 형태가 아닐까 짐작된다. 한번 하류 지역에 오면 물건과 배까지 모두 처분한 다음 당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최초의 국제교역 형태 중 하나일 것으로 추론한다.

 

[경제사 뒤집어 읽기]

`국가 밖의 국가` 기업이 조약 체결까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아시아와 유럽이 경제적으로 조우하는 가장 큰 창구는 동인도회사였다. 17세기부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등 여러 국가가 주식회사를 만들어 아시아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언뜻 이상해 보이는 일이다. 근대 초에 유럽이 해외 팽창을 시도할 때 정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정복과 식민지배를 시도할 것 같은데,왜 주식회사를 만들어 해외로 내보냈을까.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2년 늦은 1602년에 건립돼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는 빼앗겼지만 한 세기 이상 세계 최대 규모의 회사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례를 통해 그 사정을 알아보도록 하자.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유럽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인구 100만명의 소국인 포르투갈이 100년 이상 유럽과 아시아 간 무역을 독점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광대한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6세기 내내 유럽의 여타 국가들은 포르투갈의 제지를 뚫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자국 선박을 보내 독자적인 교역 네트워크를 건설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직도 왕복 1~2년이 걸리는 인도 항로는 너무나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각국 대상인들은 리스본이나 앤트워프에서 포르투갈 왕실이 처분하는 아시아 상품들을 구매해 유럽 각지에 판매하는 것만으로 큰 수익을 얻었으므로 굳이 원거리 항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정치적 격변의 결과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당하고(1580~1640) 무역 정책도 바뀌어 기존 아시아 상품 '도매업'에 참여했던 대상인들 중 다수가 배제됐다. 1590년대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은 모험회사들을 결성해 직접 선박을 아시아로 보내기 시작했다. 10여개 회사가 난립해 그중 일부 회사의 배들이 아시아 각지를 항해하며 거래처를 여는 데 성공했다. 아시아 교역의 수익성도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이 회사들 간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이대로 가면 공멸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암스테르담 회사는 라이벌인 젤란드 회사의 배가 접근하면 현지 상품을 선적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방해하고 최악의 경우 직접 공격하도록 사주할 정도였다. 드디어 중앙정부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시도했다. 그동안 각자 활동하던 소규모 회사들을 모아 하나로 합친(Vereenigde) 동인도(Oostindische) 회사(Compagnie)'통합 동인도회사(VOC)'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각 지역 간 투자 지분 비율이사진 배분회사 본부 소재지 등 갈등의 요소들은 정부가 강제로 조정했다. 이런 정책을 편 데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강력한 회사가 활동함으로써 적국인 스페인 · 포르투갈에 타격을 주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탄생부터 정치와 경제가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이와 같은 특이한 성격은 회사 설립시 정부로부터 받은 특허장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우선 동인도회사는 희망봉 동쪽과 마젤란해협(남아메리카 최남단) 서쪽 사이 지역에 대한 항해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그와 동시에 이 회사는 의회를 대신해 조약 체결전쟁 선포요새 건설징병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전쟁과 외교 권한을 일개 주식회사가 행사한다는 것은 정말로 특이한 사항이다. 말하자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국가 기능의 일부를 위임받은 '국가 밖의 국가'가 됐다. 한편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하면서 다른 한편 식민지 사업과 외교 등의 일을 동시에 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회사는 17세기 초 3000명의 군인을 충원했고그 수가 점차 불어나 1750년 즈음에는 17000명에 달했다. 이처럼 자본과 국가가 결합된 방식이 당시 사정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해외 팽창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회사의 아시아 교역 실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인도 직물을 사 가지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판매한 다음,이곳의 후추를 사서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이런 거래의 연쇄가 매끄럽게 잘 이뤄져야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인도네시아 시장에 이미 직물이 포화 상태라 현지 상인들이 동인도회사 상인들이 가지고 온 직물을 사지 않으려 한다든가이곳에서 반드시 후추를 구매해야 다음 거래가 이뤄지는데 후추를 안 팔든가 혹은 값을 과도하게 올려 받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럴 때 유럽 상인들은 가차없이 총칼을 휘둘렀다. 자신들의 거래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동인도회사의 태도였다. '한 손에 주판다른 한 손에 칼'이라고 표현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공정하게 이야기하면 유럽 상인만 이런 것이 아니라 아시아 상인 혹은 세계 대부분의 상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였다.

 

오늘날의 비즈니스 환경을 염두에 두고 수백 년 전 상업세계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때는 아직 해양법보험경찰 같은 것이 없던 때다. 수만리 떨어진 낯선 지역에 뚫고 들어가 이방인들과 거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변배와 상품의 안전을 스스로 확보해야 했다. 더 나아가 무력을 행사해 거래를 유리하게 만들고심지어 무장이 불충분한 배를 만나면 아시아 배든 유럽 배든 거침없이 해적질도 했다. 무력행사와 비즈니스가 결합돼 있는 이 상황을 고려하면 주식회사인 동시에 국가 권력을 위임받은 동인도회사가 왜 효율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상업 세계에 동인도회사가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유럽인들은 시장경제를 확대해 나가면서 그 안에서 수익을 취했지만그들의 시장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또 그것을 유리하게 운영하기 위해 거침없이 무력을 행사했다. 무력이 뒷받침된 시장경제이것이 유럽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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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업의 탄생과 의 탄생

고고학적 발굴 결과, 기존학설 흔들려 농업은 물질 아닌 의식의 변화 후 발생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농업의 탄생일 것이다. 기원전 1만년부터 7000년 사이 세계 여러곳에서 농경과 목축정주가 시작됐다. 방랑 생활을 하던 인간은 이제 마을을 이루어 정착하게 됐고진정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됐다. 농업의 탄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처음 체계적인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호주 학자 고든 차일드(Vere Gordon Childe)그는 1920년대에 '신석기 혁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을 발전시켜 과거 세계사 교과서에는 이런 식의 설명이 제시됐다. 신석기시대에 농업과 목축이 '발명'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정주하게 되고 마을이 만들어진다. 대개 이때 이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물품인 도자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명은 한 곳에서 시작돼 세계 각지로 전파됐는데신석기혁명이 처음 일어난 곳은 근동 지역이다. 그런데 지난 50년 동안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모델은 많이 흔들리게 됐다. 세계 여러곳에서 독자적으로 농업이 시작됐으며 농경, 목축, 정주, 도자기 등의 연관 관계나 등장 순서도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의 말라하(Mallaha) 유적을 보면 땅을 파고 단단하게 나무 골격을 댄 집들이 빙 둘러서 있어 정주 형태의 마을이 분명하지만 이곳에서 발굴된 먹을거리 요소들은 모두 야생의 것이었다. 이 지역 환경이 너무 풍요로워 사람들은 따로 농사를 짓지 않고도 정주해 살 수 있었다. 그러니 꼭 농업의 발달이 있어야 정주 마을이 탄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농업이 이미 시작됐으나 정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도 있다. 멕시코 남부의 테우아칸(Tehuacan) 지역이 그런 예로 이곳에서는 농경이 시작되고 4000년이 지나서야 정주 마을이 생겼다. 도자기와 정주 농경의 관계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나이지리아의 아이르 산지(山地)에서는 기원전 8000심지어 일본은 조몬 시대인 기원전 13000년에 도자기가 등장했지만모두 농업이 시작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와 반대로 근동 지역에서는 기원전 1~7000년에 농경은 이루어졌으나 도자기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업이 먼저 시작되고 그것이 다른 여러 요소를 낳았다고 할 수는 없다. 농업과 정주도자기 등은 지역마다 상이한 순서로 일어났다. 근동 지역에서 보리호밀밀의 재배는 기원전 9500~9000목축은 기원전 8000마지막으로 도자기는 기원전 7000년에 등장했다. 농경-정주-목축-도자기라는 모든 요소를 갖추기까지 수천년이 걸린 이 사건의 연쇄를 두고 '발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요즘은 농업의 시작을 어떻게 설명할까? 여러 학자의 설이 있지만그 가운데 특히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코벵(Jacques Cauvin)의 설이다. 그는 농업의 시작을 물질적인 요소보다는 종교적인 요소로 설명한다. 코벵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무레이베트(Mureybet) 지역을 발굴 조사했는데이곳에는 선사시대의 장구한 기간에 사람들이 계속 거주해 농업이 시작된 시점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핵심 기간인 기원전 1~9500년 중 물질적으로는 큰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변화한 게 있다면 신앙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수세기 동안 집들이 커지고 실내 공간들이 구획됐는데 집안 중심 장소의 진흙 선반 위에 소대가리 뼈를 모시기 시작했고곧 이어 돌이나 구운 흙으로 만든(테라코타) 여성상이 등장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낫의 날에 묻어 있는 물질의 흔적들을 현미경으로 정밀 분석하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주로 갈대를 베는 데 낫이 쓰이다가 다음 시기에는 밀과 보리를 베는 것에 쓰였다.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아직 덜 여문 야생종 이삭을 베었음을 알 수 있다. 재배종과 달리 야생종은 이삭이 익으면 낟알이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전에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수백년 동안에는 흙 속에 밀과 보리의 꽃가루(pollen) 화석이 많이 보인다. 이는 마을 주변에 밭이 만들어졌고 재배가 시작됐음을 뜻한다. 이때 어떤 마을은 규모가 커지고 다른 곳에서는 마을이 사라진다. 이는 필경 수확과 같은 집단노동의 필요 때문에 인구가 집중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처럼 농경이 자리잡아가는 장기간의 발전은 아마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서서히 진행됐을 것이다. 농업의 시작은 어떤 물질적 변화 · 발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 의식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소대가리와 여성상의 등장이라는 '상징 혁명'이었다. 코벵은 이것이 '위대한 여신'이와 연관된 황소 신으로 생각한다. 기원전 8000년대 아나톨리아의 유명한 차탈 휘익 유적에서 보이는 거대한 황소 신을 비롯해 후일 지중해 전역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예컨대 황소로 상징되는 제우스 신)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그 이전에는 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복종하게 됐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냥의 삶에서 인고와 굴종의 농경시대로 이행하면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 논밭이라는 '인공 자연' 공간이 형성됐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이 등장한 것이다. 농업의 탄생은 신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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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물에 빠져죽는 네덜란드 감옥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북유럽의 소국 네덜란드는 17세기 한때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 지위를 누렸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며 '세계의 공장'이 되기 전 단계에 이 나라는 상업 부문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세계의 창고' 역할을 했다. 이 나라의 선단은 남아프리카 희망봉으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청어 잡이나 토탄 채취 같은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던 가난한 국가에서 최고의 부국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겨우 수십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경제가 팽창하고 부가 넘쳐나는 황금기에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부의 증대는 언제나 부의 집중을 통해 일어나는 법이며결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제성장 역시 너무나 큰 빈부격차를 동반했다. 부가 확대되는 곳으로는 주변의 가난한 지역으로부터 빈민들이 몰려오게 마련이다. 고향에서 굶고 있느니 차라리 부자 동네로 가서 한번 기회를 노려봄 직하지 않겠는가. 돈이 넘쳐나는 곳에 가면 최소한 먹고사는 것은 해결할 수 있을 테고운이 따라주면 큰 부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실제 소수의 사람들은 눈부신 사회적 상승을 이뤘다. 빠른 경제 성장기는 빈농 출신이 재벌 총수가 되는 신화적인 일들이 가능한 때다. 야콥 포펜이라는 대상인은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생전에 암스테르담 시장까지 역임했는데그의 아버지는 시장에서 청어를 통에 담는 일을 하던 미천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바닝 콕이라는 대상인의 아버지는 유랑걸식하던 걸인 출신이었다. 이처럼 단 두 세대 만에 사회 최하층에서 최상층으로 수직 상승하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지극히 예외적이었고대다수 사람들은 고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하루 14시간씩 일했다. 당시 유럽 최대의 직물 제조 지역이었던 라이덴 시의 노동자들은 하루 16시간 이상 일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재상 콜베르가 프랑스인이 1주일 일하는 것보다 네덜란드인이 하루에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동 노동도 심각한 문제였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아이들까지 공장에서 일을 시켰는데때로 이웃 도시의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집단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고용주 중에는 아이들을 노예처럼 부리다 못해 일하는 시간 외에는 길거리에 나가 동냥을 하도록 시키는 자도 있었다. 아동 노동 착취가 너무 심해지자 1646년에 라이덴 시 당국이 개입해 어린이들은 하루 14시간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자비로운' 조치를 취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는 주로 검은 호밀 빵과 치즈 위주였다. 가끔 소 내장과 약간의 고기를 넣은 스튜를 먹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맹물에 가까웠다. 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에 절인 청어였다. 많은 사람들이 허기에 시달리던 시절암스테르담 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욕망과 슬픔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으니 빵가게 진열대에 내놓는 과자에 너무 사치스럽게 장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내놓기도 했다. 황금기의 네덜란드는 빠른 경제 성장의 흐름 한가운데에서 소수는 큰 부자가 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회였다. 이런 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병리 현상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부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뭔가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다. 우선 일확천금을 노리는 복권이 대유행했다. 이 시기에 암스테르담의 로또 복권 판매소에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우격다짐을 벌이는 일이 흔히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경향이 강해졌고온갖 종류의 노름이 유행했다. 모두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조바심이 빚어낸 현상들이다. 단기간에 큰돈을 벌고자 하니 온갖 투기 현상이 벌어졌다. 유명한 튤립 광기가 대표적 현상이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기 현상이며자본주의적 심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사건으로 거론된다.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던 튤립의 값이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튤립 재배에 달려들었다. 너도나도 튤립 구근을 사려 하자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고곧 투기 광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수중에 가진 구근만이 아니라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것까지 선매매했고그바람에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뛰었다. 급기야 화려한 불꽃무늬의 꽃을 피우는 구근 하나의 값이 집 한 채와 맞먹을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투기현상이 그렇듯 조만간 거품이 꺼지고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자 막차를 탔던 수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가운데 이 현상도 막을 내렸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사회의 긴장을 높인다. 어차피 자본주의 질서의 핵심은 불평등이고그로 인한 위험을 막는 것이 국가기구의 임무다. 봉기를 막기 위해 국가는 엄격한 조치들을 취했다. 빈민들에 대한 정부의 억압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물이 차오르는 감옥을 들 수 있다. 끊임없이 물이 차오르는 지하 감옥에 가두고는 간단한 펌프 하나를 줬다. 이곳에 갇힌 사람은 익사하지 않으려면 계속 펌프질을 해야 했다. 밤중에도 잠시 눈을 붙였다가는 다시 일어나 펌프를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이유가 빈민은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므로 노동의 소중함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드디어 어느 날 이곳에 갇힌 죄수가 펌프질을 계속하는 대신 죽음을 선택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감옥은 폐쇄됐다. 찬란한 황금기 자본주의 성장의 이면에는 수많은 빈민들의 불행과 국가의 잔혹한 억압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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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대 최고의 상업 민족 페니키아

무역이 없었다면 알파벳도 없었다페니키아인, 3000년 전 지중해 지배교역 위해 문자 발명아프리카 일주

'솔로몬 왕은 에돔 땅의 홍해 바닷가엘랏 근방에 있는 에시욘게벨에다 상선대를 창설하였다. 히람은 자기 수하에 있던 노련한 선원들을 보내어 그 상선대에서 솔로몬의 선원들과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 상선들은 오빌 지방으로 가서 금 사백이십 달란트를 실어 와 솔로몬에게 바쳤다. '(구약 열왕기 9;26~28 · 공동번역개정판)구약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왕의 이야기다. 히람은 페니키아의 번성하는 도시인 티루스의 왕이며에시욘게벨은 홍해 북동쪽 끝단의 아카바(Aqaba) 만에 있는 항구 도시이고오빌(Ophir)은 인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기원전 1000년께페니키아 선원들은 솔로몬 왕을 위해 원거리 교역을 맡아서 해 주고 있었으며인도에 가서 금 420달란트를 수송해 솔로몬 왕에게 바쳤다. 420달란트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13t이니요즘 시세로는 6000억원이 넘는다. 이런 기록에서 보듯 페니키아인들은 고대사에 등장하는 강력한 해상 상업 민족이다. 기원전 1000년 즈음부터 거의 1000년 이상 페니키아는 지중해 세계와 그 주변 지역의 무역을 지배하다시피했다. 페니키아인들의 기원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원래 페르시아 만 연안에 살다 기원전 2200년께 레바논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라는 말의 원래 뜻도 명확하지 않아 자주색 염료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고 향신료 종류나 대추야자나무 열매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대체로 기원전 1200년께에 이르면 이들은 유능한 선원이자 상인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들이 자리잡은 레바논 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중간 위치로 전략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지점인 데다 목재가 풍부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레바논 삼나무는 당시 목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지중해 지역에서 탐내던 귀중한 자원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목재와 자주색 고급 염료 같은 귀중한 상품들을 수출하며 점차 상업 네트워크를 확대해 갔다. 이들은 비블로스티루스시돈 같은 상업 도시들을 세우고 광대한 지역을 오가며 상업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후대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한 가지 발명을 했다. 대규모 국제교역을 하는 데에는 당연히 문자 기록이 필요하다. 이들은 이집트 문자를 변형시켜 사용했는데이것이 나중에 고대 그리스로 들어갔다가 결국 오늘날 알파벳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1000년 이후 지중해는 거의 '페니키아의 호수'가 됐다. 페니키아인들은 역사상 가장 과감한 해상 활동을 벌인 민족이다. 그들은 심지어 야간 항해라든지 원양항해를 처음 시도했다. 이렇게 교역 활동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모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대규모 식민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번성했던 곳은 오늘날 튀니지에 위치한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스페인의 광대한 지역과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후일 카르타고는 식민 모국인 페니키아보다 훨씬 더 강대해져 서부 지중해 전역을 통제하는 강국으로 성장했으나세계제국으로 팽창해 가던 로마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결전을 벌였다가 패배했다. 페니키아의 활동 영역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 대서양까지 팽창해갔다. 기원전 6세기 말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인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한 이후 페니키아의 배들은 대서양과 북해 연안에서 유입되는 원재료들을 4세기 동안이나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이들이 건설한 가디르(Gadir)라는 항구는 나중에 카디스(Cadiz)로 발전했는데이 도시는 스페인에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한 가장 오래된 도시다. 지중해와 대서양 및 북해 연안 일부가 모두 페니키아인들의 상업권에 속했으니당시 그들에게 알려진 세계 전역을 포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페니키아인들의 위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프리카 일주 항해다. 기원전 600년께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는 페니키아인들에게 홍해 바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올 때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오라고 시켰다. 과연 그들은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에 아프리카를 시계 방향으로 일주하고 이집트로 귀환했다. 아프리카 대륙이 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실증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페니키아 선단은 실제로 아프리카를 도는 항해를 한 것일까이 사실을 기록한 헤로도토스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를 타고 리비아(아프리카를 의미한다)를 돌 때 태양이 그들의 오른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다른 사람들은 믿을지 몰라도 나는 믿지 않는다. "배가 남반구를 항해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북반구에만 살던 헤로도토스로서는 이 같은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그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바로 그 사실이 페니키아인들의 아프리카 주항을 입증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근대 초에 포르투갈인들이 대양 항해를 개척해 세계사를 바꾸기 2000년 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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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70%가 이자로7번 파산한 `무적함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근대 국가가 직면한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재정문제다. 국가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16세기 이후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사업인 전쟁이 계속되자 유럽 각국은 엄청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전비는 거대한 규모일 뿐 아니라 급박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내일 거액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오늘 당장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국가재정이 튼튼하려면 경제가 잘 발전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 발전은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로부터 국가가 얼마나 효율적이고도 공평하게 자금을 조달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가 잘 해결되면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고 외부적으로 국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반란이나 심지어 혁명 상황에 직면하게 되며국제 경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한다. 어떤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승자가 되느냐, 패자로 전락하느냐의 여부는 대부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실 재산과 국고가 뒤섞여 있고정부 수입은 주로 국왕 직할 재산에 의존했다. 지방 대귀족이 지배하는 영주령에 대해서는 국왕이 명목상의 상급 지배권만 유지할 뿐 사실상 준()독립 상태였으므로전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게다가 국가 기구의 운영에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한지 체계적인 기준도 없었다. 정부 재정의 개념부터 명료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왕과 정부는 우선 필요한 대로 지출하고 그 다음에 비용을 어디에선가 찾아내는 방식으로 재정을 운용했다. '수입 한계 내에서 지출한다'는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조세 분야의 혁신을 통해 재정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개는 이미 세금을 부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강요하는 수밖에 없었고따라서 심한 조세 저항에 직면하곤 했다. 결국 정부는 차입에 의존하게 됐다. 조세 수취로는 당장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할 때 곧바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곳에서 급전을 빌리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주로 거금을 쥔 대상인들에게 돈을 빌리면서 이자율차입기간기간연장차환(借換) 등 여러 조건들을 놓고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장기 혹은 단기적으로 여러 방식들이 개발됐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 국왕들이 늘 직면한 문제가 바로 차입이었고, 또 새로운 혁신이 만들어진 것도 차입이었다. 조세 수취와 차입 모두 실패한 사례로는 스페인을 들 수 있다. 유럽 전체를 지배해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푸거(Fugger) 가를 비롯한 대상인들로부터 후로(juros)라는 이름으로 600만 두카트라는 거액의 장기채를 기채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이런 거액을 급히 차입할 때에는 장차 들어오게 될 수입을 담보로 사용하는데합스부르크 왕실의 경우에는 몇 년치 정부 수익을 미리 당겨 담보로 삼았다. 5세로부터 스페인을 물려받은 펠리페 2세는 이런 상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15567월 그가 국왕의 자리에 등극해 보니 1561년까지의 국고수입이 전부 저당잡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과도한 정치적 야망으로 전쟁을 계속 치르는 바람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실 스페인 정부의 차입 방식이 문제였다. 정부 차입은 대부분 아시엔토(asiento)라는 단기채 방식이었는데이는 빌린 돈을 언제 어느 곳에서 어느 수준의 이자로 갚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만기가 되어도 거액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펠리페 2세로서는 계속 더 큰 돈을 빌리는 아시엔토를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국유지와 광산이 부유한 상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금을 빌릴 수는 없으므로 국왕은 단기채를 장기채로 강제 전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1557년 펠리페 2세는 아시엔토를 연리 5%의 상환가능 연금(juros al quitar)으로 전환시키는 칙령을 내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급한 재정압박은 피했지만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계속 채무에 시달리던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자율을 강제로 낮추든지노골적으로 파산선고를 하는 것이었다.

 

펠리페 2세는 1560년에 정부 파산선고를 했다. 지금까지 국왕이 차입한 자금의 지불을 유예하는 대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기금을 만들어 연 5%의 이자를 지불하며 시간을 벌다가 여건이 좋을 때 원금의 일부를 상환해 부채를 줄이겠다는 안이었다. 그러나 정부 수입이 줄고 전비 지출은 계속 늘자 이 계획도 어그러졌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연이어 정부 파산선고를 하는 것뿐이었다(1575,1596,1607,1627,1647,1653).그러는 동안 국가의 채무는 증가했다. 1560년에 380만 두카트였던 국가 채무는 1667년에는 900만 두카트로 늘었다. 당연히 돈을 빌리는 조건도 나빠져 차입 이자율도 상승했다. 1660년대에는 정부 수입 중 70%가 이자지불용으로 사용됐다. 원금은 물론 갚을 생각도 못하지만 하여튼 그 액수는 정부 소득 10여년치에 해당했다. 근대 초 세계 최대의 식민지를 거느린 스페인은 재정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17세기 이후 변방의 2류 국가로 내려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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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수에즈 운하는 2500년전 완성됐다정복자 다리우스 1세가 첫 완공물의 이용이 이집트의 경제 좌우

기원전 460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두고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이집트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일강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일강의 주요 원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나일(Blue Nile)이며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적도 지방인 부룬디의 한 샘에서 발원해 빅토리아호를 거쳐 흘러오는 백나일(White Nile)이다. 두 원류는 하르툼 북쪽의 누비아 사막에서 합쳐진 후 이집트 국경 안으로 들어온다. 이집트 문명을 지탱하는 귀중한 강물과 토사(土砂)는 이처럼 대부분 국경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매년 여름 나일강의 홍수와 범람은 거의 시계처럼 정확하게 일어난다. 5월이면 북부 수단에서 수위가 상승해 6월에 남부 이집트의 아스완 근처 제1폭포에 도달하고9월이 되면 나일 유역의 범람원 전체가 검붉고 탁한 물 아래 잠긴다. 이 물이 빠지고 나면 두껍고 냄새가 강한 잔존물이 남아 비옥한 흑토가 된다. 이집트가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식량원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농부들은 홍수 뒤에 물에 잠긴 땅에 파종하고 나무 쟁기로 흙을 긁어 덮어준 다음 4~5월에 수확한다. 매년 이런 식으로 농사를 짓는 일이 수천년간 지속됐다. 대개 이 같은 관개농업이 장기간 지속되면 염분화 현상(모세관현상에 의해 땅속의 염분이 식물 뿌리에 달라붙었다가 토양에 남아 해당 지역 전체가 불모의 땅이 되는 현상)으로 문명 자체가 멸망하게 되지만 나일강은 경사가 급해 범람 때마다 토양 오염물을 쓸어가 버리기 때문에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3000년 동안이나 번성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웃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사방으로 트인 지역에 위치한 까닭에 늘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격변의 연속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고대 이집트 문명은 안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지정학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집트의 북쪽과 동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서쪽은 광대한 사막지역이며북쪽은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외부 지역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북동쪽만 지키면 된다. 이런 안정된 여건 속에서 이집트인들은 내세에 더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낙관적인 종교적 믿음 속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이집트 역사에서 외적의 침입 혹은 그 반대로 해외 원정이나 무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트 문명의 흥망성쇠는 놀라울 정도로 나일강 범람의 순환과 일치했다. 범람이 순조로우면 식량 사정이 좋아지고나일강 유역의 상부 이집트와 하류 삼각주 지역의 하부 이집트 사이에 정치적 통합이 달성되며화려한 신전과 기념물이 지어진다. 가뭄으로 나일강 수위가 낮아지면 기근과 분열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가 분열되면 지방 군벌들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출몰하며결국 외적의 침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집트는 '바다 민족(Sea People)'이라 불리는 이방인의 공격을 받았다가 한 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축출한 적도 있고리비아인누비아인아비시니아인의 침공으로 거의 4세기 동안 외국인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위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이집트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해외로 뻗어나갔다. 하트셉수트 여왕 시대가 그런 사례다. 이집트에서 보기 드문 여자 파라오인 하트셉수트는 기원전 1479년에 아문(Amun) 신의 신탁에 영감을 받아 홍해를 넘어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푼트(Punt) 지방(현재의 소말리아 지방)과 해상교역을 시도해 유향과 몰약(종교 의식과 미라의 방부 처리에 사용됐다)과 같은 귀한 상품을 들여왔다. 가장 활발하게 해외 원정과 교역을 시도한 파라오로는 네코 2(기원전 610~595)를 들 수 있다. 그는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키워 멀리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가 시도한 가장 대담한 사업은 역사상 최초로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일이다. 이 운하는 19세기에 만들어진 수에즈 운하와 똑같지는 않아서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동쪽 끝에 흐르는 한 지류와 홍해를 연결했다. 네코는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판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양쪽 바다의 함대를 통합 운영하려 했다. 그런데 무려 12만명의 사망자를 내며 거의 완성 직전까지 갔던 이 사업을 돌연 중단했는데그 이유는 운하가 완성되면 적들이 유리하게 이용하리라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상 수에즈 운하의 건설 작업은 여러 차례 시도됐으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기원전 521~486 재위)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드디어 완성돼 이집트와 페르시아 간 항해가 용이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2세기 초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초기 이슬람 시대에도 운하가 재개통됐지만 그때마다 침니(沈泥) 현상이 일어나 물길이 다시 막혔다. 그 후에도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계획이 여러 차례 논의되다가 1869년 오늘날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됐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집트의 역사는 농업용수로나 혹은 수로로 나일강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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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a로 채권자 숙청프랑스 `왕의 신용` 붕괴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근대 유럽의 중심 국가세련된 문화와 지성의 선구를 자처하던 프랑스 정부의 살림살이는 어땠을까. 파산을 거듭하던 스페인과 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당시 유럽의 큰 나라들은 대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고 또 비슷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는 한 막대한 전비를 조달해야 했고국민들에게 세금을 강요하다 보면 농민 봉기가 이어졌다. 할 수 없이 각종 차입 방안을 강구했으나 속 시원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164811월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선언,원금을 동결하고 이자를 15%에서 6%로 인하했다. 그러나 그 결과 프랑스 재정은 혼란과 부패로 얼룩졌다. 우선 국왕이 새로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졌다. 차입 이자는 30~50%에 달했지만이는 종교적으로 금지된 고리대 수준이었으므로 장부상으로 조작해 이자를 지급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 콜베르는 재정 문제를 확실히 개선해 프랑스의 몰락을 막는 계기를 만들었다. 1659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내는 피레네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는 실로 오랜만에 평화를 맞이했는데이 기회를 이용해 중요한 개선 조치를 단행했다. 콜베르는 우선 정부의 지출과 수입을 모두 삭감했다. 그 결과 1662~1671년 흑자 재정을 이뤘는데이는 근대 프랑스사에서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 1672년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콜베르는 조세를 늘리는 대신 차입을 시도했다(1672~1678).그리고 이 부채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최소화했다. 일부 부채들은 강제 차환(借換)했고일부는 강제로 통합하거나 상환함으로써 장기채 부담을 5200만리브르에서 800만리브르로 크게 줄였다. 이런 문제들을 관장하기 위해 새로운 기관인 차입금고(caisse des emprunts)를 설치했다. 분명 이 시기가 프랑스 재정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개선이 이뤄진 때였다. 만일 이런 식의 발전이 계속 이어졌다면 프랑스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683년 콜베르가 사망했을 때 모든 일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14세는 그동안 콜베르의 '부르주아적인' 쩨쩨한 태도를 경멸했다. 국왕은 정해진 시점에 투자자에게 돈을 되갚는 방식보다는 국왕이 갚고 싶을 때 갚는 방식의 대부를 더 선호했다. 조만간 차입금고도 폐쇄했다. 정부 재정의 관점에서 프랑스가 영국과 다른 길을 간 것은 이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재정 운영 방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국왕이 100여개의 개별 금고를 가지고 있어서 돈이 필요하면 특정 금고에 지출을 명령하는 방식이었다. 이 금고를 담당하는 사람들심지어 직접세 세원을 관리하는 징세관들도 흔히 그 직위를 돈으로 구입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타이유 세1/20세 등 국고로 들어가야 하는 금액을 개인들이 국왕에게 빌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사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개인의 이해와 국가의 이해가 뒤섞였다. 결국 독직과 부정은 피할 수 없고국가와 국민들의 부담만 커졌다. 이런 중간 매개자들을 통해 대귀족을 비롯한 부유층의 자금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국왕에게 차입된 것이다. 때때로 정권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런 중간 매개인들을 '숙청'했으나그것은 늘 사태를 악화시켰다. 루이 14세의 차입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했다. 그가 사망한 17159월 정부 부채는 30억리브르에 달했다. 이 가운데 20억리브르가 장기채이고 그 이자 지급액만 매년 8600만리브르였다. 여기에 더해 92200만리브르의 유동공채(즉 단기채)와 그에 따른 이자 지출이 큰 부담을 주었다. 정부 수입은 이론적으로는 연 8000만리브르였지만3년치 수입을 미리 당겨서 쓴 상태였다. '영광의 시대'라 부르던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아무런 합리적 대책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사망했을 때 루이 15세는 아직 미성년자여서 오를레앙 공 필립 2세가 섭정을 했다. 이때 프랑스가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 나갔는지는 프랑스 재정의 특징나아가 국가의 일반적 성격이 어떠한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처럼 정부가 파산선고를 하는 대신 힘을 동원해 강제로 자금주들을 억압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선 일부 채무에 대해 강제 축소와 통합을 단행하고일부 채무는 고리대라고 우겨서 지급을 거절했다. 더 나아가 섭정은 전쟁에서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 사람들을 조사해 부당 이익을 몰수하겠다며 부정부패재판소를 열었다. 이것이 '사증(Visa)'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1716년의 비밀조사위원회다. 이 위원회는 차입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구실로 8000명을 기소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투옥,혹은 갤리선 노수(櫓手)가 되거나 벌금형을 받았다. 그들이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국가가 그런 방식을 용인 혹은 사주해 오다가 느닷없이 가혹하게 처벌한 것이니 억울할 만했다. 어쨌든 이런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국가가 당장 파산 상태에 빠지는 것은 막았지만이를 계기로 국가 신용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재정 문제는 더 이상 해결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미국의 독립전쟁에 개입해 막대한 자금을 지출했다. 특권층 귀족은 면세 혜택을 누렸고부유한 상인들과 서민들에게만 조세 부담이 전가됐다. 국가 재정이라는 공공 부문을 여전히 징세 청부업자나 재정가(financiers) 같은 개인 업자들에게 의존함으로써 극도의 불공정성과 비효율성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재정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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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중해 문명의 상징 올리브

올리브 나무가 키운 아테네 문명기름 수출해 부족한 식량수입지중해 교역·경제 중심지로 성장어느 날 신들의 모임에서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 신은 서로 아티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무거운 마차를 끌 수 있고 전장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잘생기고 힘센 말'이 깊은 바다에서 튀어나오도록 했다. 그러자 아테나는 신전의 바위 뒤에서 '밤에도 세상을 밝혀주고상처를 낫게 해 주며맛이 진하고 원기를 주는 귀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신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가 전쟁을 상징하는 말보다 인간에게 더 유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아테나 여신에게 아티카 지방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부터 이 도시를 아테네라고 부르게 됐다. 이 신화를 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올리브가 얼마나 중요한 물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올리브기름은 유럽 음식의 가장 기본적인 소스다. 또 조명에 쓰이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전구가 등장하기 전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밤마다 기름램프를 사용해 불을 밝혔다. 사람들은 체육관이나 목욕탕 등지에서도 올리브기름을 많이 사용했다. 운동 전 몸에 기름을 바르고목욕할 때는 올리브기름과 목회(木灰)로 만든 비누 유제(乳劑)를 사용했다. 올리브는 그야말로 지중해 문명의 상징이었다. 올리브나무는 석기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문명 발전과 함께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갔다. 기원전 2000년대 유적인 크레타섬의 미노아궁전 터 말리아에서는 식료품 저장고에 1만헥토리터의 올리브기름을 보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의 1년 수요는 기껏해야 2000헥토리터를 넘지 못하므로남는 양은 주변 지역에 수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올리브기름은 중요한 교역품이었던 것이다. 아테네를 비롯한 소규모 국가들이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했던 것은 국내 농업 생산이 워낙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를 두고 '도시국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시민들 대다수는 시내와 시외의 농지에서 일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 중에서는 드물게 경제에 관한 논설인 '에코노미쿠스'(Oeconomicus:대개 가정론(家政論)으로 번역하는데이때의 economy는 가족과 토지를 잘 관리한다는 의미다)를 쓴 크세노폰은 농업을 찬미하고 상공업을 천한 일로 쳤으며자급자족제도를 이상으로 여겼다. 문제는 그리스 땅이 척박해서 그들의 밀농사만으로는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없어 이집트와 흑해 연안 지방에서 곡물을 수입해 와야 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응한 수출품으로는 도자기포도주와 함께 값비싼 올리브기름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늘 수입이 수출보다 많았으므로 그 차액을 화폐로 지불했다. 아테나 여신의 상징인 부엉이가 새겨진 드라크마 화폐는 원래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이 도시국가의 자율성의 '상징'으로 기원전 6세기부터 주조됐고후대에 높은 은 함유량 때문에 지중해 전역에서 상인들이 선호하는 무역 화폐가 됐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과연 이런 무역이 규칙적으로 이뤄졌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의견을 달리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다. '초보론자(primitivist)' 학파는 아테네의 무역은 주변적인 활동으로서 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대상인들은 대개 외국인이었다. 이에 비해 '근대론자(modernist)' 학파는 고대 그리스 경제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오늘날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알랭 브레송이나 에드워드 코헨 같은 학자들은 심지어 아테네의 경제는 이미 '상업경제'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무역은 정규적이고 조직적이었으며상인들은 어디에서 어떤 상품을 구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정보 수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아테네의 '시장경제'는 오늘날 뉴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개인 창고업자항해인은행가 같은 서비스 제공자들의 복합체가 피레우스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결국 이곳은 지중해 전역의 항구 간 상품 교역의 국제 청산소로 성장했다. 흑해 지방시칠리아이집트 등지에서 도착하는 곡물의 수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됐고이는 지중해 지역 전체의 표준이 됐다. 화물에 물리는 2%의 세금 덕분에 국고는 크게 불어났다. 아테네는 큰 배들이 더 많이 들어오도록 방파제도크준설 서비스 등 인프라를 개선했고화물선을 보호하기 위해 호송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그렇다고 현대 시장경제의 면모를 고대 경제에 너무 과도하게 투사해서는 곤란하다. 올리브기름이 고대인의 일상생활에 지극히 중요한 물품인 것은 맞지만 오늘날의 석유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올리브기름은 계속 고가의 상품이었으나그리스의 식민지가 지중해 전역에 건설되면서 올리브나무 재배도 확대돼 오히려 교역품으로서의 중요성은 떨어졌다. 각 지역에서 자체 생산과 소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리브기름은 오늘날까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일상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물속에서 살다가 기름 속에서 죽는 것은' 답은 물론 생선이다. 우리나라 생선은 매운탕 속에서 최후를 맞지만지중해의 생선은 올리브기름을 뒤집어쓰고 산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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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재정혁명`7년 전쟁` 승리한 영국, 그 비결은 영구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까지 영국의 재정은 혁신을 거듭했다. 이를 흔히 '재정혁명(financial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는 두 시점 간의 차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660년대에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네덜란드 배들이 템스 강을 거슬러 올라와 채섬(Chatham) 해군 공창의 배들을 불사르고 로열 찰스(The Royal Charles)라는 기함을 끌고 갔다. 영국민에게 이 패전의 충격은 대단히 컸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763영국은 7년전쟁의 최대 승리자가 됐고북아메리카와 인도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게 됐다. 두 시점 사이에 영국의 지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 근본 원인은 재정에서 비롯됐다. 1660년대 영국은 조세 250만파운드를 걷는 데에도 허덕거렸다. 그런데 1760년대에는 국채가 13000만파운드였고 공공지출은 매년 2000만파운드에 달했다. 이런 거액을 동원해 자국만이 아니라 동맹국의 전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영국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영국은 국민 1인당 조세 부담 액수가 가장 큰 나라였다. 흔히 엄청난 조세 부담이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프랑스보다 영국의 1인당 조세 부담액이 더 컸다. 조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 국민들이 국가에 더 많은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효율적이면서도 안전하게 돈을 빌려 국정을 운영했다는 것이 바로 재정혁명의 핵심 사항이다. 영국 재정혁명의 주요 내용으로는 대개 영국은행국채주식시장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한 근본 요소는 의회주의라 할 수 있다. 영국 의회는 지난 시대 전제정의 경험 때문에 국왕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줄'을 확고하게 장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회는 "군주들이 돈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우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고마그나 카르타보다 예산 문제를 통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1690년대부터 의회는 국왕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깐깐하고도 인색하게 자금을 주었다. 지출 항목도 지정했고감사도 엄격하게 했다. 당시 장기간의 전쟁(1688~1697)에 직면한 국왕은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게 됐다. 9만명의 육군과 4만명의 해군을 동원하고 동맹국 지원까지 해야 하는 이 전쟁은 그때까지 영국이 치른 가장 값비싼 전쟁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국왕에게 가급적 적은 자금을 주고 아주 꼼꼼하게 통제를 가하려 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비를 마련할 것인가. 우선 돈을 빌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단기차입은 조만간 재정 부담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장기채를 발행하는 수밖에 없지만여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정부의 신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채의 발행 비용이 통상적인 이자율보다 높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금을 조달해야 했던 정부가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 바로 영구채였다. 지금까지 발행했던 유동공채(단기채)를 확정공채(consolidated annuities · 이를 줄여 '콘솔'이라 부른다)로 전환한 것이 핵심이다. 영구채란 말 그대로 따로 정한 상환 기한이 없어 정부가 투자자에게 이자를 영구히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정부가 돈을 빌리기는 하되 그것을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확실하게 이자를 갚기만 하면 되며따라서 이 이자 부담을 위한 소득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원금이 문제가 아니라 이자 지급 정도라면 조세로도 충분하다. 정부에 돈을 빌려준 사람(채권 구입자)이 돈을 되찾고자 하는 경우 정부로부터 상환받는 것이 아니라 채권 시장에서 매각하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국가가 원하는 액수를 빌리되 그것을 갚을 필요가 없고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은 필요하면 시장에서 매각함으로써 되돌려 받는 '신기한'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국가는 단지 세금으로 이자를 지급하면서 채권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면 된다. 이자 부담이 누적돼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막아야 하고그러기 위해서 재정 여건이 좋을 때마다 시장에서 이전에 발행한 채권을 구입해 소각하면 관리가 가능하다. 각국의 군주들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책을 찾게 됐다. 이 방식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했다. 국민의 돈을 모아 정부에 빌려주는 일을 정부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기관이 담당해야 했다. 그 일은 영국은행이 맡았다. 초기 영국은행은 오늘날의 국립은행과는 거리가 멀었고오직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기계 역할만 담당했다. 은행은 예금주들에게 후일 지급을 보장하는 증서(paper)를 발행했는데이것이 시중에 유통된 게 은행권의 선구가 됐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장기채의 환금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채를 구입한 사람의 입장에서 급히 자금을 필요로 하는 경우 채권을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가 이 채권을 다시 사들이고 돈을 환급해 줘야 하지만채권 시장이 잘 작동하면 투자자가 시장에서 채권을 매각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각종 증권들의 매매가 이뤄지는 증권시장의 발전이 중요한 공헌을 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이 제도를 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의 공신력이 한번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국가의 신용을 확보한 것은 결국 의회가 원칙을 확고하게 지킴으로써 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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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제적 가치의 상징 소금

·유럽염세로 손쉽게 국고 늘려정부·민중 갈등혁명으로 번지기도

소금은 생명이다.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체액의 평형이 깨지는데물을 마시지 못할 때보다 더 위험하다. 이런 과학적 설명 이전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금이 생명에 직결된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소금이 떨어졌을 때 바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는 사람들은 유목민이다. 사막을 건너는 유목민들은 물만큼이나 소금 확보 방안을 마련하고 길을 떠나야 한다. 그들은 소금이 묻힌 지층이나 은닉된 곳보관소 등을 여행지도에 꼼꼼히 그려 넣는다. 오늘날에도 이런 행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소금의 수요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생산지는 한정돼 있으므로 당연히 교역이 양자를 연결해 주어야 한다. 아프리카 내륙에서는 먼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소금 무역이 계속되고 있다. 말리의 유명한 타우데니 광산에서 채굴된 암염은 사하라사막 너머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관문인 팀북투를 거쳐 700에 걸친 3주간의 대장정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길에는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타우데니로 돌아오던 낙타대상이 사고를 당해 2000명의 인부와 1800마리의 낙타가 갈증에 시달리다 죽은 1805년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힘들고 위험한 장거리 여행 끝에 전해지는 소금은 같은 양의 황금과 맞교환될 정도로 비쌌다. 값비싼 소금은 경제적 가치의 상징이었다. 급여를 뜻하는 단어 '샐러리(salary)'도 소금(salt)에서 나온 말이다. 귀하고 비싸며 또 교역로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권력 당국의 통제 대상이 됐다. 이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과세 품목도 따로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가 소금 전매제로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119년에는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철술과 함께 소금을 전매품으로 묶었다. 소금 전매는 여러 차례 제정과 폐지를 반복하다 8세기 중반 당 왕조 숙종 때 확고하게 자리잡은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권력 당국이 과도하게 소금 값을 올리려 할 때 소금 밀매업자들즉 염도(鹽盜)가 들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대에는 염적(鹽賊)청대에는 염효(鹽梟)라 불렸던 밀매업자들은 관염(官鹽 · 정부가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소금)보다 질 좋은 소금을 반값에 판매했다. 정부는 이런 자들을 잡아 한 섬 이상 거래한 자는 사형한 말 이상 거래한 자에게는 태형을 가했지만 결코 이를 없애지 못했다. 소금을 둘러싸고 당국과 민중 간에 갈등이 벌어진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특히 프랑스의 염세인 가벨(gabelle)은 앙시앵레짐의 '봉건적 악제'의 대명사로서 흔히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도 거론된다. 1286년 필립 4세 때 임시세로 출발했던 가벨은 14세기 샤를 5세에 의해 경상세(經常稅)로 바뀌었고그 후 8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정해진 가격대로 매주 최소량의 소금을 사도록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17세기 루이 13세의 재상이었던 리슐리외는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손쉽게 국고를 늘릴 수 있는 이 수단에 눈독을 들였다. 국가가 한번 '돈맛'을 알게 되자 소금 값이 극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가격 구성의 대부분은 국가가 거둬들이는 세금이 차지했다. 1630년만 해도 소금 가격은 생산비의 14배였지만 1710년에 이르면 140배로 뛰었다. 자연히 농민들이 비싼 염세에 항의하며 암거래에 가담하고국가가 이를 잔인하게 억압하는 일이 벌어졌다. 1785725알비주아 생마르시알 출신의 푸르니에는 암거래를 하다 잡혀 200리브르의 벌금형을 받았다. 200리브르는 일반 노동자의 1년 평균 수입에 해당한다. 이 벌금을 낼 수 없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체형을 면치 못했다. "형리는 푸르니에를 넘겨받아 옷을 허리까지 벗겨 대로를 따라 끌고 다니다 매질한 다음 뒤퐁 광장에서 그의 오른쪽 어깨에 달군 쇠로 대문자 G의 낙인을 찍을 것을 명한다"는 것이 최종 판결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G는 갤리선(galere)을 가리키니다음 번에 걸리면 갤리선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야 한다는 의미다. 당시 갤리선 노수(櫓手)3분의 1이 가벨 위반자들이었다. 민중 폭동도 빈발했다. 사람들은 세리들을 감금했다가 정부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돼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주동자는 대개 사형에 처해졌고단순 가담자들도 무거운 벌금채찍질갤리선 노역 형을 받았다. 가벨은 프랑스 혁명 중인 1790년 폐지됐지만1805년 나폴레옹이 군비 마련을 위해 다시 부활했다. 프랑스에서 최종적으로 가벨이 폐지된 것은 1946년이다. 국가 권력이 소금을 장악하려 하고 이에 대해 민중이 저항하는 것은 역사의 전 시기를 관통해 나타나는 보편 현상이다. 현대의 사례로는 간디의 '소금행진'이 대표적이다. 193046간디는 수천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3주 동안 400를 걸어 바닷가에 도착한 후 거친 소금을 한 줌 집어 들었다. 이것은 소금세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인도의 독립을 찾자는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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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일으킨 인도면직물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인류 역사를 수놓은 3대 직물 재료로는 중국의 비단유라시아 유목 민족들의 양모세계 각지에서 재배한 면을 든다. 이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아마와 대마사이잘삼 등을 추가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의복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면직물이다.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면직물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입은 의류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화를 재배해 그 꽃에서 얻은 섬유로 직물을 짜는 일은 세계 각지에서 시행됐다.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뿐 아니라 아프리카콜럼버스가 도래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문명권에서도 면직물을 직조했다. 고려 말에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 종자 몇 개를 붓대 속에 몰래 넣어가지고 돌아온 이후 목화가 널리 전파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최근에는 그보다 800년 전인 백제시대의 면직물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이 수입 직물인지 우리나라에서 직접 짠 직물인지 밝히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가장 일찍부터 품질이 우수한 면직물을 짠 곳은 인도였다. 인도의 면직물은 고대로부터 주변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멀리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쪽까지 수출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인도 면직물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모슬린과 같은 고급 직물도 일부 수입됐다. 로마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이 직물을 벤투스 텍스틸리스(ventus textilis)'바람으로 짠 직물'이라 불렀다. 유럽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경제가 후퇴하고 아시아와의 교역이 위축되면서 오랫동안 면직물을 잊고 살았다. 유럽의 풍토는 목화 재배에 맞지 않아 원료를 자체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원면을 수입해 직조하거나 완제품을 들여와야 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과 접촉하면서 다시 원면이 들어오긴 했지만면과 리넨을 섞어 짠 퍼스티안(fustian) 직물을 만드는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 유럽은 오랫동안 순면 제품을 모르고 살았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항해해 들어가서 인도의 면직물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인도에서는 가볍고 시원한 면직물이 크게 발달했다. 최고급 모슬린 천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 만큼 섬세한 품질을 자랑했다. 무굴제국에서 모슬린은 '시트라비랄리'(왕의 모슬린)라 알려졌지만 '샤브남'(아침이슬) 혹은 '아브라완'(찰랑이는 물결) 같은 시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는 직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하다는 의미다. 인도 불상에 표현된 거미줄처럼 가벼운 의상이 그런 천이었다. 후일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 직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1783)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남겼다. 어떤 도시들은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직물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데인도 남부의 캘리컷(Calicut · 인도식 지명은 Kozhikode)에서 유래한 캘리코(Calico)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직물들은 인도양 세계에서 중요한 상품으로 아시아 상인들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유럽 상인들이 아시아에 진출했을 때 그들 역시 현지의 면직물 거래에 뛰어들어 수익을 올렸다. 사실 유럽 상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중세 이래 늘 최고의 품목으로 쳤던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거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산지를 차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참혹한 무력 경쟁에서 네덜란드 측에 밀린 영국 상인들이 어쩔 수 없이 주력하게 된 것이 인도 면직물 거래였다. 그나마 현지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져 아시아 시장 확보가 힘들었던 영국 상인들은 모험 삼아 캘리코를 유럽 시장에 판매했다. 이것이 엄청난 성공을 가져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쟁에서 밀려 할 수 없이 취했던 조치가 영국 동인도회사의 승리를 낳은 이 현상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추는 갈수록 가격이 떨어져 수익성이 희박해진 반면 캘리코는 조만간 '광풍'을 일으켰다. 17세기 중엽 유럽에 처음 캘리코가 선보였을 때는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알록달록한 문양은 너무 천박해 보여서 하녀들도 입기 꺼려해 주로 거실 마룻바닥에 깔거나 벽을 가리는 용도로 쓰였다. 그렇지만 곧 캘리코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고 물세탁이 가능해 편하기 그지없는 데다 그 알록달록한 프린트 무늬가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에 누워있던 천은 곧 귀족과 부르주아의 바지로 돌변했다. 너도 나도 캘리코를 찾았고 수입량이 수십 배로 늘었다. 18세기가 되자 기존 모직과 마직 공업은 직격탄을 맞아 휘청거렸다. 실업 위기에 몰린 직공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캘리코를 입은 여성들을 공격했다. 파리의 한 상인은 창녀에게 캘리코 직물을 입힌 다음 거리에서 옷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자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영국 의회에서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캘리코 수입 제한 혹은 사용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들을 여러 차례 가결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제 문제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산업계 내에서 나왔다. 영국 경제에 지나치게 큰 압박을 가하는 인도 직물을 어떻게 해서든 자체 생산해야 했던 것이다. 수천년간 내려오는 고급 기술을 보유한 인도 방식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는 일이니결국 답은 기계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원면을 수입해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과정을 기계화한 데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아무리 인도의 노동력이 저렴하면서도 기술 수준이 높다한들 기계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19세기에 인도는 고작 원면만 수출하고 오히려 맨체스터의 싼 면직물을 수입해야 하는 참담한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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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그리파와 로마의 상하수도

아우구스투스의 참모 아그리파사재 털어 수로 보수정치 안정 이끌어

로마는 하루아침에 지어진 것이 아니다. 100만명이 모여 사는 거대 도시 로마유럽과 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제국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50m 높이의 3단 아치 구조를 한 프랑스 남부의 퐁뒤가르 수로교(水路橋)나 영국의 배스에 있는 로마목욕탕 같은 것들은 상하수도 기반시설이 제국 전체에 걸쳐 얼마나 잘 갖춰져 있었는지 보여준다. 로마시의 상하수도 시스템은 1000개가 넘는 분수반(噴水盤)과 급수전(給水栓)11개의 거대한 제국 목욕탕을 비롯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중목욕탕과 사설 목욕탕하수를 모아 티베르 강에 쏟아버리는 지하 하수구를 포함한다.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11개의 수로를 건설해 깨끗한 물을 로마 시내로 풍부하게 공급했다. 이 물은 산속의 샘에서 나온 물을 모아 정화한 다음 로마까지 흘러오도록 만든 것이다. 가압 모터 같은 것이 없던 당시 먼 거리로 물을 보내는 데에는 순전히 중력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원지로부터 로마 시내까지 줄곧 일정하게 경사가 진 수로를 건설해야 했다. 수로 가운데 가장 긴 것은 아쿠아 마르시아였다. 기원전 140년께 지어진 이 수로는 90나 떨어진 아니오 계곡에서 로마시 동쪽 지역으로 물을 공급했는데물이 맑고 차가운 것으로 유명했다. 이 수로는 로마시의 팽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대인 기원전 33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이 수로를 본격적으로 수리한 것은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의 도시로 넘겨주었다"고 자랑한 바 있다. 그런 업적을 이루는 데 실제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아그리파다. 그는 군 사령관으로 전투에 참여하다가 기원전 34년에 로마로 귀환한 후 공공시설물과 축제를 관장하는 조영관(造營官 · aediles) 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계속되는 전쟁과 정치적 갈등으로 로마의 기반시설은 형편없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가장 긴급한 문제는 상하수도 시스템이었다. 조영관이 된 후 그는 1년 이내에 아쿠아 마르시아를 비롯한 수로 3개를 보수하고 1개를 새로 건설해 물 공급량을 크게 늘렸다. 700개의 수조500개의 급수반130개의 물탱크를 만들었고공중목욕탕도 개장했다. 이런 일들은 흔히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했다. 위대한 인물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공공의 선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로마 시대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 공화정 당시 최고의 직위였던 집정관(consul)까지 지낸 다음 그 하위직인 조영관을 맡는다는 것부터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그리파는 로마의 상하수도 시스템 정비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고 전력을 다해 봉사했다. 게다가 시민들에게 장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기름과 소금도 나눠 주었으며심지어 축제 때에는 무료로 이발사도 제공했다. 당연히 그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정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내전을 벌이고 있었으며아직 확고히 권력을 잡기 전이었다. 서민 출신으로서 겸손의 미덕을 지닌 아그리파가 로마의 핵심 기반시설을 정비해 서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 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족한 정치적 측면을 보충해 주었다. 시민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동맹을 눌러 이기고 황제의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아그리파의 업적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상수도 시스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하수도 시스템이다. 로마의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대 하수구)는 기원전 600년께 만들어졌다고 하니로마시 자체와 거의 같은 역사를 가진 셈이다. 원래는 일부 구간만 제외하고는 지상에 노출된 하수도였는데복개공사를 하고 그 위에 건축함으로써 지하 하수도로 변모했다. 시민들의 생활 오물과 오수는 이 하수도에 모아져 시 외곽으로 흐르는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한때 인구 100만명이 살았던 대도시에서 하수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시대 관행 중에는 심지어 시체를 제대로 매장하지 않고 하수도에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자연히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발생하고전염병이 창궐해 도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클로아카 막시마는 막히지 않게 잘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정비해야 했다. 아그리파는 직접 보트를 타고 이 지하 하수도를 조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제국 동부를 직접 통치하기도 하고계속해서 군사 작전에도 참여했으며한때 아우구스투스가 중병에 걸렸을 때에는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런 때에도 그는 로마의 상하수도 시스템 관련 일만은 자신이 직접 챙겼다. 기원전 19년에 다시 사재를 털어 비르고 수로를 건설해 늘어나는 물 수요에 대응한 것이 그런 사례다. 그가 작성한 수도 사업 마스터플랜은 그 후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물 관리 행정의 기본 지침이 됐다. 위대한 제국의 건설 이면에는 위대한 인물의 남다른 공헌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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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 디아스포라` 꽃피운 아르메니아 商人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세계사에는 일찍부터 활발하게 해외 상업 활동을 벌인 민족들이 많다. 아랍 상인들이나 유대인들혹은 화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방인 세계에 뚫고 들어가 거류지를 만들어 한편으로 현지인들과 거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족 상인들과 사업 관계를 유지했다. 이렇게 형성된 상업 거점들을 서로 연결해 네트워크를 이루면 강력한 상업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교역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 · 교역 이산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이런 방식을 극단적으로 확대시킨 민족이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페르시아를 식민화한 것과 다름없었다. (페르시아 황제)는 이들을 에스파한의 외곽지역인 줄파(Julfa)에만 살도록 규제했지만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이곳을 거점 삼아 전 세계로 약진했다. 그들은 우선 인도의 광대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도 남부의 포르투갈령 고아에서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는가 하면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라사에 거류지를 만들고 이곳에서부터 1500나 떨어진 중국 국경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곧 스페인령 필리핀에 모습을 드러냈고반대 방향으로 터키 제국 내에서도 유대 상인들과 경쟁했다. 모스크바공국에서도 회사를 만들어 페르시아의 비단을 들여와 판매했다. 이 비단 제품들은 북극권에 가까운 아르항겔스크를 포함해 러시아 전역에 팔려 갔다. 곧 모스크바로부터 스웨덴으로 진출해 들어간 다음 이 지역과 암스테르담 간 교역로를 통해 서유럽으로 상품을 수출했다. 이제 유럽의 각 지역에 이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17세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 각 지역에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대량 반입하는 비단 제품은 현지 상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1623년 마르세유의 기록에는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들보다 더 탐욕스러운 민족은 없을 겁니다. 이들은 알레포스미르나 등지에서 비단을 팔아 큰 이익을 보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세상 끝까지 달려갑니다. "1649년 프랑스 함대가 몰타 섬 근처에서 영국 배 한 척을 나포해 놓고 보니 그 안에는 400통의 비단이 있었다. 이것은 그 배에 탄 64명의 아르메니아 상인이 리보르노와 툴롱으로 수송하는 상품이었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포르투갈세비야카디스심지어 아메리카의 여러 항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의 고아로부터 스페인의 카디스 항구까지 이동하는 한 아르메니아 상인의 기록을 보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세계 각 지역을 전전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실제 활동 모습은 어땠을까. 리스본의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아르메니아인 대리인의 상업 여행 일지는 이들의 활동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 걸쳐 이뤄졌는지를 증언한다. '다비드의 아들 호반네스'라는 이름의 이 상인은 줄파의 한 자본주와 사업 계약을 맺었다. 호반네스는 '후원자'로 불리는 이 사람에게서 자금을 받아 비즈니스 여행을 수행하며이익이 발생하면 자신이 4분의 1을 받고 나머지를 자본주에게 주기로 했다. 이 기록은 불행하게도 후반부가 유실돼 과연 이 거래가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렸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현재 상태만으로도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실체를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여행은 1682년부터 1693년까지 11년이나 걸렸으며총 여행 거리는 수천에 이른다. 그는 줄파를 출발해 수라트(인도 구자라트 지방의 항구)로 갔다가 여러 도시를 거쳐 티베트의 라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시라즈아그라파트나카트만두 등지를 돌아다닌 후 라사로 귀환했다. 그는 방문지마다 동향인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들과 비즈니스를 수행했다. 그가 취급한 상품은 금보석사향인디고면직물차 등 다양했다. 그 중에는 인디고 2t을 인도 북부에서 수라트로 가져왔다가 시라즈로 보낸 일도 있고100의 은을 거래한 일도 있다. 이런 사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크레디트 거래가 필수적이다. 자금 융통을 위해 그는 여러 차례 환어음을 발행했다. 아시아 내륙의 광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는 호반네스의 사업은 상품과 현찰어음 등이 얽힌 복잡한 거래의 연속이었다. 이 사업은 방랑기 많은 어느 한 상인의 유별난 행위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반네스의 활동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은 거의 100년 뒤에 나온 아스트라한의 아르메니아 법령에 똑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상인들의 사례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첫째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체를 포괄하는 교역 조직망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 세계는 상인과 자본상품이 오가는 '뚫고 들어갈 수 있는(penetrable)' 곳이었다. 둘째아시아의 상업 기반이 생각보다 탄탄하게 갖춰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때 유럽 학자들은 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수없이 많은 소규모 '행상인(pedler)'들이 돌아다니는 초라한 곳으로 그렸다. 장돌뱅이들의 보따리 장사 수준이니 유럽식의 자본주의 발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호반네스의 사례를 보면 그의 사업 규모가 매우 크고 사업 방식이 상당히 정교하게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인도에서 환어음을 이용해 단거리 자산 이동을 하는 경우 한 달 이자비용이 0.75%로 지극히 저렴했다. 아시아 상업 세계는 이방인이 피상적으로 보기보다는 훨씬 발달해 있었으며이 기반 위에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여러 상업 민족들은 초장거리 상업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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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단길의 종점 팔미라

실크로드의 상인은 戰士였다.중국-로마 무역로, 도적 위협 잦아 상인들도 중무장외교능력까지 갖춰

비단은 로마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고가품이었지만 그 먼 길을 지나 로마에 들어왔을 때는 가격이 100배나 올라 있었다. 비단은 금 가격과 같다는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금값'이었으며몇 온스만 해도 보통사람의 1년 소득에 해당했다. 로마 황제 가운데 방탕과 사치로 악명을 떨친 엘라가발루스 황제(재위 218~222)100% 순견 토가를 만들어 입어 질시와 부러움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중국에서 로마까지 비단이 들어오는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후일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육로로서 사마르칸트헤라트이스파한 같은 중앙아시아 중개지들을 통과해 지중해 동부 연안까지 이르는 장거리 운송로였다. 다른 하나는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통과한 후 홍해를 거슬러 올라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오는 해로였다. 두 루트가 너무 달라서 한때 로마인들은 육로로 오는 비단의 생산국은 세레스해로로 오는 비단의 생산국은 시나에라는 서로 다른 국가라고 착각했다. 비단길의 서쪽 끝 지점에서 원거리 교역 네트워크는 로마제국과 어떻게 연결됐을까. 로마제국의 변경에 위치한 교역 도시 팔미라의 사례를 살펴보자.오늘날 팔미라는 시리아의 사막에 폐허로 방치돼 있지만한때는 '사막의 여왕'이라 불리는 풍요로운 오아시스 도시였다. 주변 지역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양염소낙타를 치는 유목민족이 살았다. 농사에 의존해 살기는 힘들었으므로 이 도시는 점차 주변 여러 민족 간에 생필품을 교환하는 교역도시로 성장해 갔다. 기원전 1세기께부터 상업활동이 시작됐다가 서기 1세기 이후 점차 원거리 교역으로 발전한 듯하다. 그런 발전이 이뤄진 데에는 이 무렵부터 수송 수단으로 낙타가 사용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팔미라는 낙타 대상(隊商)을 조직해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서쪽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개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서아시아의 파르티아 제국과 대립하고 있었는데팔미라는 두 제국의 중간에 있었다. 이 도시는 때로 로마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했지만대체로 중립을 표방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사실 지중해 연안과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중개지로 팔미라가 꼭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도적떼가 들끓는 위험한 사막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팍스 로마나'를 구축하면서 상황이 변해갔다. 로마 세력이 팽창하면서 이 지역의 안전이 확보됐다. 공격적인 유목민족의 위협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사업 내로 끌어들여 도시의 번화함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중국과 아시아 각지의 사치품이 팔미라까지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다.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이곳에 와서 상품을 팔면 가지고 돌아갈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인도나 메소포타미아로 발길을 돌렸다. 따라서 팔미라 측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찾아가 그곳에 들어온 상품을 가지고 와서 지중해 방향으로 전해주는 일을 한 것이다. 팔미라는 유프라테스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팔미라의 대상들은 유프라테스강 중간의 두라 에우로포스 같은 교역 중심지를 찾아가 아시아 상품들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원정은 상당한 준비작업을 요했다. 모든 일은 대상의 총 책임자인 시노디아르크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그는 원정 사업에 자금을 출자하는 후원자를 만나 일을 시작한다. 후원자는 아마도 팔미라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으로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전주(錢主) 역할만 한다. 시노디아르크는 그 자본으로 수백 마리의 낙타와 말을 장만하고동물들을 잘 다루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팔미라 주변 촌락의 유목민이 이 일을 맡아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몇몇 부족장은 사막에 있는 자기 부족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한 채 팔미라에 거주하면서 이곳 사업자들과 계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이런 기본 준비를 하고 난 후 시노디아르크는 구체적인 여정을 짜고물과 식량이 있는 곳을 알아보아야 한다. 또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국제관계가 늘 긴장상태에 있기 때문에 외교 교섭도 해야 하며대개는 대상의 안전을 지켜 줄 호위대도 구성해야 한다. 유프라테스강까지 가는 길에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므로 각별한 무장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팔미라 시민 민병대가 자주 고용됐다. 이들은 강력한 궁수로 유명했다. 현재 남은 유적지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원정대는 단도와 검으로 중무장하고 있어 상인이라기보다는 대초원의 기마병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 상업의 실상은 이처럼 무력과 교역이 혼합된 상태였다. 이런 사람들이 중국 비단을 로마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상품을 잔뜩 싣고 팔미라로 귀환하는 대상들은 가격표에 따라 세금을 물었다. 이 가격표가 새겨진 돌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품 세율이 수출품 세율보다 높았다. 이 도시에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지중해 지역으로 계속 가기 위해 팔미라를 통과하는 상품은 면세 혜택을 누렸지만다만 낙타 한 마리당 은화 1데나리우스를 물었다. 이런 관세와 통과세가 이 도시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번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3세기에 로마제국이 분열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일어나 교역로를 봉쇄하면서 팔미라의 무역 활동은 종말을 맞았다. 비단교역은 또 다른 중개지를 찾아갔다. 과거 찬란했던 도시는 오늘날 사막 속에 신기루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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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혁명 통해 `맬서스의 질곡` 탈출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산업혁명 이전의 경제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맬서스(Malthus)적 질곡'이다. 이는 인구론의 저자 맬서스의 주장을 빌려 인구와 농업 생산 사이의 길항관계(拮抗關係 · trade-off)를 설명하는 것이다. 토지가 제한돼 있고 기술 수준이 고정돼 있을 때 자본과 노동을 많이 투입하면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가 증가하면 더 많은 노동력이 농업에 투입되지만 생산성이 하락해 생활수준이 저하되고 결국 인구 감소가 뒤따른다. '인구 감소'라는 이 평범한 표현의 실상은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기근에 시달리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것을 뜻한다. 14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기근과 질병전쟁 등의 위기 상황은 그와 같은 맬서스적 동력이 작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단순히 맬서스적인 힘이 작동했다는 점보다도 그 힘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유럽 각국의 농업 생산성을 장기적으로 추적한 로버트 앨런(Robert Allen)은 농업혁명을 거쳐 맬서스적 질곡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지역'(잉글랜드와 네덜란드)'중간 정도 성공한 지역'(벨기에프랑스)'성공하지 못한 지역'(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 지역)의 세 집단으로 구분했다. 18세기에도 여전히 맬서스적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결핍에 시달렸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연구는 이 시대 사람들의 키의 변동을 분석한 콤로스(John Komlos)라는 학자의 연구다. 징병 대상자의 신체검사 기록을 분석한 그의 논문은 식량이 부족한 시기에 사람들의 키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점을 실증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7였으므로 167로 알려진 나폴레옹은 평균 이상이었고따라서 '나폴레옹 콤플렉스'(키 작은 사람이 화를 잘 낸다는 주장)에 시달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맬서스적 질곡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뚫고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해서 살펴볼 점은 산업혁명 이전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 선행됐다는 사실이다. 근면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일본의 인구사 · 경제사학자인 하야미 아키라(速水融)가 일본의 17세기 농촌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말이었다. 그는 일본 농촌에서 인구 대 가축 비율이 20명당 1마리에서 100명당 1마리로 축소되는 가운데에서도 생활수준이 오히려 크게 개선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자본 비율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경제가 더 발전할 수 있었을까. 농민들은 농서 보급과 농기구 개량시비(施肥)의 개선 등을 통해 가축 감소에 충분히 대응했다. 이는 자본 대신 인력을 대폭 투입하는 방식으로 개선이 이뤄졌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근면 윤리가 작용한 데다일한 만큼 농민들의 소득이 보장되는 제도로 인해 농가에서는 모든 가족이 열심히 일했고 이를 통해 경제 발전이 일어났다는 논리다. 이는 영국식 자본집약적 산업화와 대조되는 노동집약적 경제발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왜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근면혁명 개념을 받아들여 17~18세기 유럽 경제를 설명한 드 브리스(Jan de Vries)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농업 생산성이 크게 증대한 지역에서는 도시화도 크게 진행됐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의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상업 거점 역할을 했다. 이 지역에서는 책 거울 자명종 등 새로운 상품에 대한 욕구가 늘었고이로 인해 경제 전체에 시장의 영향이 크게 증대했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들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장에다 내다 팔 수 있는 환금작물이나 직물 같은 상품 생산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했다. 지금껏 농사일을 도맡았던 젊은 남성들이 시장에 내다 팔 상품을 생산하고그동안 생산 활동에 그리 주력하지 않았던 여성들이나 아이들이 동원돼 자가 소비할 물품을 생산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 '근면하게' 일을 하게 됐고(공급부문)사회 전체적으로 총 수요도 늘어났다(수요부문).이는 자본의 확대 혹은 기술 수준의 향상과 같은 요소 없이 '근면'이라는 동기에 의해 경제 성장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달리 정리하면 공급 측면의 혁신(산업혁명)이 이뤄지기 전에 수요 측면에서 먼저 혁명(근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도시화와 시장의 확대곧 분업에 의한 성장이라는 스미스(A Smith)적 발전을 뜻한다. 기술 진보 없이 단지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 생산을 늘리고시장을 통해 상품을 구매하려는 총 수요가 늘어나는 것 역시 분명 경제 성장의 한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그 시대의 주어진 여건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했다는 것을 뜻한다. 기술 진보가 없는 상황에서 늘어난 인구가 다시 죽음의 재앙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용한 모든 인적 · 물적 자원을 동원한 것이다. 경제사가들은 18세기 유럽 중국 인도 일본의 가장 부유한 지역들에서 모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것이 최종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토지와 삼림 등 기존 자원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은 결국 생태환경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의미한다. 이 상태를 벗어나는 돌파력은 석탄이나 전기 같은 새로운 에너지의 개발과 그를 이용한 기계적 힘을 통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전통경제에서 최종 발전 단계에 도달한 인류는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인간의 근면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동력과 새로운 경제 방식이 필요했다. 그 돌파구를 연 것이 바로 유럽의 산업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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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로마의 노예

잘나가는 로마의 의사들은 노예였다.장관·약사·교사 등으로 활약부와 권력 누렸지만 차별·학대 받기도

고대 로마는 노예제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노예는 어떤 존재였으며어떤 역할을 했을까이런 문제들에 대해 지난날 역사가들이 제시한 설명은 이런 식이었다. 노예는 대개 전쟁포로 출신이었다. 로마가 팽창을 거듭하던 기원전 3~1세기 중 많은 포로들이 노예로 전락해 이탈리아 반도 내외에 팔려갔다. 이들이 논밭이나 공방광산에서 노역을 하는 것은 로마 경제 운영에 필수적이었다.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노예들은 '위험한 계급'이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기원전 73~71)은 노예계급이 봉기해 기존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한 일대 사건이었다. 지금도 이런 설명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최근 역사가들은 노예제의 또 다른 면모들을 많이 밝혀냈다. 사슬에 묶여 강제노동을 한다는 식의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종류의 노예들도 많이 있었다. 예컨대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조 공방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아주 섬세한 도자기를 생산해 제국 각지에 보급했다. 로마에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노예가 사용됐다. 가장 널리 쓰인 분야는 물론 농업이었다. 다만 순전히 노예들만 일하는 농장은 거의 볼 수 없었고대개 자유민들과 섞여 함께 일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와 남부에는 노예 노동의 비중이 비교적 컸던 반면이집트 같은 곳에서는 그 비중이 훨씬 작았다. 노예들은 가내 하인으로도 많이 쓰였다. 대가문에서는 수십명때로는 수백명의 노예가 존재했다. 서기 61년 노예에게 살해당한 고위 정치인인 페다니우스 세쿤두스는 당시 집에 400명의 노예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노예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이처럼 농업과 가사가 노예 노동의 대종을 차지하지만로마 노예제의 큰 특징은 직능 분화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진척됐다는 것이다. 주인 대신 배를 관리하는 노예 선장 밑에서 자유민들이 노를 젓는 일도 가능했다. 심지어 황실 노예는 오늘날 장관 혹은 청와대 비서에 해당하는 직위의 일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 정부의 행정관들과 서신 교환을 담당했고일부는 시민들의 탄원을 받아 검토하는 일을 했다. 전문적 능력을 가진 노예들은 통역(라틴어-그리스어)이나 회계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런 사람 중 일부는 해방된 후 부와 권력을 누려서 다른 공직자들의 질시를 받곤 했다. 지식인 노예들도 있었다. 학교 교사나 의사약사 중에 노예 혹은 해방 노예들이 많았다. 로마 시민들은 자질이 의심스러운 외국 출신 의사들을 불신하고대신 실력 있는 노예 의사들을 더 신뢰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어의로 유명했던 안토니우스 무사 역시 노예 출신이었다. 역사가들이 많이 주목하는 현상은 관리인(manager) 역할을 하는 노예의 존재다. 주인 대신 공방이나 가게선박을 운영하는 노예는 비록 수는 적지만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로 자기 직장에서 따로 살며 ''(concubine · 이들은 정식으로 결혼할 수 없었다)을 두고 아이를 키우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사업 이윤을 주인과 나누어 가졌으며거상(巨商)으로 성장한 사람은 이렇게 모은 돈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기도 했다. 관리인 노예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주인의 명령을 직접 받는 지배인 타입으로 주인의 지시에 따라 돈을 지불하는 출납원이나 금고를 관리하는 회계원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주인의 사업과 함께 자기 사업을 병행해 돈을 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을 자기 계정으로 하는 식이다. 둘째는 가게나 공방을 주인 대신 관리하는 대리인 타입이다. 이들은 주인의 위임을 받아 경영하는데위임 사항을 가게 정면에 붙여서 고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위임의 범위를 넘는 일을 했다가 잘못되면 고객이 돈을 떼일 우려도 없지 않았다. 셋째는 일종의 위탁 경영인 타입이다. 주인이 일정한 자본을 노예에게 맡겨 사업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따지면 노예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므로 자본을 소유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위임된 자본의 특수성을 인정받았다. 다만 이들이 파산했거나 부채를 졌을 때 주인은 자신이 위임한 자본 금액 한도 내에서만 책임지면 됐다. 노예 경영인이 실제로는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의 사법 문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인들은 노예 경영인이 운영하는 사업의 구체적 사항들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이는 노예가 거의 전적으로 책임지고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리인 노예는 오늘날 회사에서 일하는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받는다. 정말 그럴까지난날의 노예들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너무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도 문제다. 관리인 노예들이 상대적으로 사정이 좋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불평등과 억압 상태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시민들과 달리 노예들에게는 채찍질 같은 체형이 가해졌으며사법 조사를 받을 때면 고문을 견뎌야 했다. 또 남녀 노예 모두 주인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피할 수 없었다. 로마의 노예는 전체 인구 중에서는 소수였다. 로마가 노예제 사회라는 것은 맞지만그것은 쇠사슬에 묶여 농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노예가 사회 전체를 구조적으로 지탱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사회 각 분야마다 다양한 노예들이 경제사회법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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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일감을 줬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증기기관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 발명이지만사실 그 원리는 로마시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다만 그때는 황제가 사는 곳의 문을 자동으로 여닫는 신기한 '장난감'에 불과했고 사회 구조 전체를 혁신시키지는 못했다. 노예 노동력의 존재로 혁신이 전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경제발전이 한계에 다다라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18세기에 증기기관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최초로 증기기관을 발명한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이었다. 그렇지만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많은 결점을 안고 있었다. 2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규모에 엄청난 양의 석탄을 소비하면서도 정작 힘은 성능 좋은 물레방아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결점을 해소해 월등한 성능의 증기기관을 개발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기계공 제임스 와트였다. 1763년 그는 뉴커먼 기관을 수리하다가 이 기관의 비효율성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기관은 중심부에 있는 실린더에 증기가 채워지면 피스톤을 밀어내고다시 실린더를 냉각시켜 진공 상태가 되면 기압에 의해 피스톤이 실린더 쪽으로 밀려가는 식으로 작동했다. 이처럼 매번 실린더를 가열했다가 다시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열의 5분의 4가 낭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1765년 와트는 별도의 증기 콘덴서(condenser · 액화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실린더를 계속 뜨겁게 달군 상태로 유지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발견했다. 이제 뉴커먼 기관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힘이 4배나 강한 기관이 만들어졌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1769년 첫 특허를 받았고, 1776년에 상업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증기기관은 주로 탄광에서 물을 퍼내는 데 사용됐다. 와트는 존 로벅이라는 사람과 동업 관계를 맺고 석탄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데 쓸 증기기관 제작을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 철물 제작 기술로는 거대한 실린더에 정확하게 딱 맞는 피스톤을 만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존 로벅은 큰 이익을 얻지 못하고 파산했다. 다시 매튜 불턴과 동업관계를 맺은 와트는 정밀 기계를 제작할 수 있는 버밍엄으로 가서 드디어 자신이 필요로 하던 것을 찾아냈다. 존 윌킨슨이라는 제철업자가 영국 해군으로부터 의뢰받은 대포 제조용 천공기로 우수한 실린더를 만들어냈다. 이제 두 사람은 영국 의회 법령에 의해 25년 연장된 특허권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불턴과 와트의 공동사업은 기업사(企業史)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다. 불턴의 사업 안목은 와트의 기술적 창의성을 보완했다. 당시 흔히 그랬던 것처럼 사업가가 발명가를 탐욕스럽게 착취하는 일 없이 두 사람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가 불턴은 새로운 시장 기회를 확실하게 파악했고과학자 와트는 그 기회를 충족시킬 새로운 증기기관들을 디자인해냈다.이제 물을 퍼 올리는 분야보다 더 큰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공장들이 작은 강 근처에서 물레방아를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었지만곧 증기기관이 이것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1782년 와트는 회전식 증기기관을 개발했다. 이것이 새로이 형성되던 공장 시스템과 연결됐다. 이제 영국의 산업혁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다.물레방아 동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농촌에 공장을 지어야 했다. 이런 농촌 공장으로는 고아원이나 구빈원 출신 아동 노동자들을 많이 보냈다. 그런데 증기기관은 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공장은 노동자와 석탄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시장과도 가까운 도시로 이동해 갔다. 간단히 말해서 증기기관은 산업의 도시화를 가져왔다. 1782년 단 두 곳의 공장밖에 없었던 맨체스터에는 20년 후 52곳의 공장이 생겨났다.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제로 바뀐 후 많은 노동자들이 공동 구역에서 정확한 시간 일정에 맞추어 일하는 표준화 · 기계화된 시스템이 정착되어 갔다. 와트는 증기압밸브실린더의 디자인들을 계속 실험하면서 증기기관의 개선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 일부를 표절했던 존 윌킨슨을 비롯한 많은 특허 침해자보다 한 걸음 더 앞서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788년 와트는 불턴의 제안으로 기관의 속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조속기(調速機)를 기관에 덧붙였고1790년에는 압력계를 추가했다.처음 사업을 하고 25년이 지난 18세기 말와트의 증기기관은 훨씬 더 강력해지고 연료 효율이 높아진 동시에 크기가 작아지고 운반도 간편해졌다. 이 기관들은 평균적으로 약 25마력을 발생시켰지만 최대 100마력까지 나오는 기관도 있었다. 불턴과 와트가 원래 계약했던 25년간의 공동경영이 끝난 180064세의 와트는 은퇴해서 건강과 부와 명성을 누리며 살다가 1819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장 행복한 노후를 보낸 사업가라 할 만하다.1800년까지 와트의 증기기관은 500대 정도 팔렸다. 이것들은 어디에 쓰였을까. 당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곳이면 모두 증기기관이 사용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석탄 및 주석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데 많이 사용됐다. 고품질 주철 생산을 가능하게 한 용광로용 송풍기도 증기기관이 움직였다. 18세기 말에는 면직물모직물맥주밀가루도자기 공장에 가장 많이 사용됐다. 1786년 런던에 있는 세계 최대의 제분공장에는 2개의 증기기관이 50쌍의 맷돌을 움직였다. 많은 도시에서는 증기기관이 강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기계는 인간을 해방시켰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노예가 많았을 때는 증기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더니정작 증기기관이 등장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노예처럼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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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산업혁명 이전의 에너지

산업혁명 2000년 전에도 증기력 사용했다.로마시대 황제의 자동문에 쓰여풍부한 노예 노동력이 증기기관 발명 막아'마력(馬力 · horsepower):동력(動力)이나 일률을 측정하는 단위.

영국마력과 미터마력(프랑스마력) 두 종류가 있는데1영국마력은 1초에 550파운드의 물체를 1피트 들어올리는 힘이고1미터마력은 1초에 75의 물체를 1미터 들어올리는 힘이다(1미터마력0.9858영국마력).이 값은 제임스 와트가 짐마차용 말을 사용해 시험한 결과 채택한 것인데그 당시 보통 말이 할 수 있는 일의 양보다 50% 정도 많다고 한다. 현재 개량된 우수한 말은 4마력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그러니까 옛날 말은 약 0.5마력오늘날의 튼튼한 말은 4마력의 힘을 낸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마력이라는 단위로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가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었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자.중요한 에너지원으로는 우선 인력(人力)을 들 수 있다. 인간의 근육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모터'여서 대개 0.03~0.04마력의 힘을 낸다고 한다. 대신 아주 다양한 응용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면 힘이 크게 배가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인간은 0.13~0.16마력을 낼 수 있다. 과거에는 과도하게 인력에 의존했다. 17세기에 중국을 방문했던 포르투갈 출신의 마갈리엔스 신부는 대운하의 가장 높은 수문인 천비첩(天妃妾)에서 한쪽 운하에서 다른 쪽 운하로 배를 이동시킬 때 갑문(閘門) 개폐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운하의 양쪽에서 각각 400~500명이 밧줄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력이 너무 풍부하면 발명이 억제될 수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로마시대에 이미 증기력의 원리가 알려져 있었지만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황제의 자동문에만 사용한 것도 로마에 노예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값이 비싸야 사회가 발전하게 마련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축력(畜力)이다. 가축 사용 양태는 문명권마다 매우 달랐다. 이는 신대륙(아메리카)과 구대륙(유럽과 아시아)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아메리카에서 짐 운반용으로 사용된 동물은 사실상 야마(llama · 라마라고도 한다)밖에 없었다. 야마는 실제 힘은 형편없지만 공기가 희박한 안데스 고지대에 적응한 유일한 가축이다. 아메리카의 여러 문명에서 바퀴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유용한 가축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마야 문명의 파라미드는 모두 사람이 직접 돌을 운반해서 지은 것이다. 그 이후 소염소개 등 거의 대부분의 가축이 유럽에서 들어왔다. 그 가운데 운송 가축으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산길을 잘 걸을 수 있는 노새였다. 그 후에는 말과 소가 엄청나게 불어나 아르헨티나의 팜파 지역에서는 20세기까지도 소달구지가 일반적인 운송 수단이었다. 참고로 말과 낙타의 원산지는 놀랍게도 아메리카 대륙인데소빙하기에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육지로 연결됐을 때 이런 동물들이 아시아로 들어가 널리 퍼진 반면 정작 아메리카에서는 멸종해 버렸으니실로 아이로니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구대륙에서는 가축을 아주 다양하게 이용했다. 소와 말은 구대륙 전체에 널리 사용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에서는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인도에서 신성한 암소는 놀고 먹지만 수소는 쟁기를 끌거나 방아를 돌렸고운송에도 널리 쓰여 한번에 소 1만마리를 동원한 곡물 운송용 카라반(隊商)도 있었다. 말은 무엇보다 전쟁 수단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역참제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빠른 운송 수단으로도 애용됐다. 유럽에서는 12세기부터 말의 어깨에 멍에를 메는 기술이 일반화된 후 농업에 많이 사용됐다. 이전에는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는 원시적인 방식이어서 말의 호흡을 힘들게 했지만 신기술 덕분에 이전보다 힘을 4~5배나 더 낼 수 있었다. 한편 대륙 간 원거리 육로 수송에는 낙타가 유용하게 쓰였다. 중앙아시아의 선선한 초원지대와 산악지대에는 쌍봉낙타(camel)사하라사막을 비롯한 더운 사막에는 단봉낙타(dromedary)가 역할 분담을 하며 구대륙 여러 문명권 간 소통을 책임졌다. 산업혁명 이전에 석탄은 기껏해야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고 나무가 훨씬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가정용만이 아니라 산업용으로도 엄청난 양의 땔나무들이 소요됐다. 14세기에 프랑스 디종 근처에서 흙을 구워 타일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가마에 나무를 대기 위해 423명의 나무꾼이 인근 숲에서 일했고 334명의 목동이 운반했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제철피혁설탕 정제 같은 각종 산업은 삼림을 잠식해 들어가는 주요인이었다. 이상 언급한 요소들을 마력으로 환산해 보면 어떻게 될까.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인 브로델은 산업혁명 직전 유럽의 에너지 상황에 대해 축력(1400만마리와 소 2400만마리) 1000만마력인력(5000만명) 600~800만마력나무(2t단 효율이 극히 낮아 30%만 이용됐다) 400~500만마력으로 계산했다. 이것들을 전부 합쳐봐도 현재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다음 시대의 석탄석유전기원자력 에너지 개발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절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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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언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초기 공장의 노동 조건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세기의 급진적인 잡지 '라이언'에는 극빈 가정 출신 소년소녀 노동자들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은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여물통에서 돼지들과 함께 뒹굴었다. 그들은 발길질과 주먹질,성폭력에 시달렸다. 고용주인 앨리스 니덤은 아이들의 귀를 못으로 뚫는 소름 끼치는 버릇을 가졌다.아이들은 겨울 추위 속에서도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지냈고십장의 가학증에 시달린 듯 모두 이가 부러져 있었다. '급기야 적개심에 불타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급습해 기계를 파괴하는 소위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영국 전역에 걸쳐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소요는 귀족과 중산층에 두려움을 자아냈다. 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봉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군대뿐"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노동자들을 강압적으로 누르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자본가와 노동자 간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로버트 오언(Robert Owen · 1771~1858)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인근 뉴래너크라는 산골에 이상적인 작은 공동체를 건설했다. 방이 둘씩 딸린 노동자 가옥이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는 마을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공장 노동에 시달리는 대신 학교에서 공부하며 즐겁게 지냈다. 면직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강압적인 규율 없이도 열심히 일했다. 놀라운 일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면서도 이곳이 막대한 이윤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적을 만들어낸 오언은 1771년 웨일스에서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홉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마포 상인의 도제로 일한 인물이었다. 출중한 사업 능력을 발휘한 그는 18세에 이미 기계 제작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다음에는 한 방적공장의 공장장으로 취직해 승승장구했다. 뉴래너크라는 산골의 공장 하나가 매물로 나왔을 때 그는 자본이 부족한 상태였지만 과감하게 소유주와 담판을 지어 공장을 얻는 동시에 소유주의 딸까지 신부로 맞았다. 그러고는 1년 안에 이곳을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 변모시켜 세계적인 명소로 만든 것이다.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2만명 중에는 러시아의 차르가 될 니콜라이 대공이라든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황자 같은 거물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단지 작은 사업체 하나를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정도를 넘어 인류 전체를 개선한다는 대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뉴래너크는 그 사상의 시험 장소에 불과했다. 그의 사상을 널리 퍼뜨릴 기회가 찾아온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대불황기였다. 폭동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위원회는 박애주의자 오언의 고견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뜻밖에도 '협동마을(Village of cooperation)' 건설 계획안이었다. 800~1200명이 농장과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자급자족 단위를 전국적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기대하지 않았던 위원회는 당황해 그의 제안을 공손히 거부했다. 오언은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에 자기 계획을 설명하는 소책자를 뿌리고실험적인 협동마을 건설에 필요한 모금 운동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거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는 투의 싸늘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겨 실증해 보이기로 맘먹었다. 자신의 뉴래너크 지분을 판 돈으로 미국에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인디애나주의 워배시 강가에 있는 3만에이커의 땅이었다. 182674그는 사적 소유비합리적 종교혼인제도로부터의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정신의 독립선언'을 한 뒤 '뉴하모니'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건설했다. 800명의 이주민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실험이었다. 그에게는 고상한 이상만 있었지그것을 실현할 꼼꼼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2년도 채 안 돼 이 공동체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그는 전 재산의 80%를 잃었다. 다시 시도해 보기 위해 미국의 잭슨 대통령과 멕시코의 산타아나 대통령을 만났지만이들 모두 오언의 위대한 뜻에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자애로운 오언 씨'로 불렸지만그의 협동마을 구상은 조롱거리가 됐다. 그래도 그의 생각에 동조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아 노동계급 일부에서 그의 가르침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원용하기 시작했다. 화폐제 폐지와 같은 너무 급진적인 주장을 다소 온건하게 전환해 생산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 조합들도 대부분 파산으로 끝났지만그 가운데 '로치데일 선구자들'이라는 이름의 소비자협동조합은 살아남아 후일 영국 노동당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끝까지 낭만적 이상주의자로 남았다. 말년에도 거대한 도덕 십자군 운동을 구상했다. '그랜드 내셔널'이라 불린 이 조직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모여들었고이것이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전국 차원의 이 조합은 말하자면 산별노조의 선구였다. 오언은 흥에 겨워 전국 유세를 돌았지만 이 운동 역시 2년 안에 무너졌다. 오언과 같이 낭만적인 방식으로 당대의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가 구상했던 기상천외한 사업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꾸려는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해 보았다는 것이고이런 것이 후일에 싹을 틔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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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물레방아와 초기 산업화

곡물 빻던 물레방아가 철광석을 녹이다증기기관 나오기전 '기계 혁명' 주도용광로 온도 높여 철 대량생산 앞당겨

물레방아는 역사상 최초의 기계식 엔진이라 할 만하다. 흐르는 물 속에 내재된 에너지를 자동적으로 생산적인 작업으로 전환시키는 물레방아는 무생물 에너지를 대규모로 동력화한 첫 번째 돌파구였다. 증기기관 이전 시대의 산업 발전은 결국 물레방아를 어느 정도 이용할 수있느냐에 따라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레방아는 수평 물레방아와 수직 물레방아로 나눌 수 있다. 수평 물레방아는 물이 바퀴를 돌리면 그 위에 평행하게 붙어 있는 맷돌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로 돼 있는데주로 곡물을 빻는 용도로 전 세계에서 쓰였다. 두 명의 노예나 당나귀를 써서 약 1.5마력의 힘을 내는 고대의 맷돌에 비하면 이런 물레방아의 힘은 몇 배는 더 강했다. 수직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바퀴를 물 속에 수직으로 배치해 훨씬 더 큰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수직으로 도는 바퀴의 힘은 캠축과 기어 장치를 통해 전달돼 거기에 연결된 맷돌을 수평으로 돌렸다. 로마 시대에 바르브갈(Barbegal) 지역에서는 10가 넘는 수로로 끌어온 물로 18개의 바퀴를 돌려 일련 공정 모터처럼 사용할 정도로 물레방아 이용 기술이 발전해 있었다. 중세에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 상사식(上射式 · overshot) 수직 물레방아였다. 이 물레방아는 물이 위쪽에서 바퀴 판에 지속적으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기존 물레방아보다 보통 3~5배의 효율에 최대 60마력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물레방아를 이용해 중세 유럽은 일종의 '기계혁명'을 겪었다. 유럽 전역에 물레방아는 몇 채나 있었을까. 1086년 잉글랜드에서 편찬된 '둠즈데이북'이라는 과세 재산 조사집에는 세번 강과 트렌트 강 남부 3000곳의 거주지에 5624채의 물레방아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거주지 한 곳에 물레방아가 2채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율은 유럽에서 인구가 많고 번영을 누리는 지역과 비슷하다. 14세기 초 파리 근처의 센 강에는 불과 1마일 안에 68채의 물레방아가 집중돼 있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모든 작은 하천에는 대개 4분의 1~2분의 1마일마다 물레방아가 있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될 즈음유럽 전체에는 대략 50만채 이상의 물레방아가 있었다. 여기에서 얻는 막대한 에너지는 서구 경제가 산업혁명 단계로 넘어가는 발전 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세기 이후부터 물레방아는 초기 산업에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기계 전동장치플라이휠캠축컨베이어 벨트도르래피스톤 같은 장치들도 이 과정에서 개발됐다. 이 방면에서 가장 앞선 곳은 수도원이었다. 사람들은 수도원 공동체가 이교도 개종고대 문헌의 보존고전 교육의 부활만큼이나 수력공학(水力工學)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대해 잘 모른다. 유명한 신비주의자이자 시토 수도회의 지도자인 성 베르나르가 기거하던 북부 프랑스의 클레르보 수도원이 전형적인 사례다. 이 수도원은 오브(Aube) 강물을 끌어와 물레방아를 돌려 아주 다양한 작업들을 했다. 제분기의 바퀴가 맷돌을 돌려 곡물을 빻고큰 여과기를 흔들어 겨와 밀가루를 분리해냈다. 또 축융(縮絨 · 양모를 서로 엉키게 하여 조직을 조밀하게 만드는 과정) 중인 직물을 내리치는 무거운 해머를 움직이고나무를 톱으로 켜며올리브를 압착했다. 수도원이 마치 공장 같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노하우는 수도원으로부터 도시들로 이전된 후 제지업직물업제철업 같은 중요한 산업들에 다양하게 쓰였다. 그 중 제철업을 예로 들어보자.유럽의 제철소는 수력을 이용하게 된 이후 나무가 울창한 삼림 지대로부터 강변이나 물이 빠르게 흐르는 제방 근처로 이전했다. 물레방아는 우선 해머를 움직여 내리치는 과정에 이용됐다. 최대 3500파운드작은 것이라 해도 150파운드 무게인 기계해머를 분당 200회씩 움직여 철에 거대하고 단일한 타격을 가하며 형태를 잡아나갔다. 14세기 말이 되면서 직경이 수십에 이르는 한 쌍의 가죽 풀무를 물레방아로 움직여 강력한 공기돌풍을 용광로에 불어넣었다. 이런 일을 몇 주 동안 쉬지 않고 하면 용광로 내부 온도를 섭씨 1500도까지 올릴 수 있어 드디어 철광석을 용해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충분한 양의 용해된 철을 주조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조만간 제철업은 전통적인 소규모 수공업에서 유럽 최초의 대량생산 산업으로 전환했다. 1500년께 유럽의 철 생산은 6t에 달했다. 수력 압연 공장에서는 두 개의 철제 실린더가 철을 막대 모양으로 평평하게 만들고회전식 선반(旋盤)으로 절삭해 쇠못을 만들었다. 제철소에서는 불로 달궈진 가단성(可鍛性) 있는 다량의 철을 목조 샤프트(굴대)에 달린 기계식 해머로 내리쳐 다양한 형태로 바꿔 농기구나 공업기구를 만들었다. 또 철이 동시대에 확산된 화약과 결합해 대포와 화기를 만들어내자 유럽의 함선과 군인들은 향상된 무기로 무장했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왜 이런 발전이 지체됐을까. 이슬람 문명권에는 연중 물이 흐르는 작은 하천이 부족해 물레방아 이용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값싼 노동력의 과잉 상태 때문에 기술적 혁신이 그리 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유럽 지역에 작은 하천들이 많이 있었고물레방아로 수력 에너지를 사용한 것은 경제 · 정치적으로 많은 분권적 지역들이 흥기하도록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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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 빠르게 대륙을 접수한 `잡초`

일러스트=추덕영기자choo@hankyung.com

근대 세계사의 특징 중 하나는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인간의 이동이야 원시시대부터 늘 있었지만근대에 들어와 원양 항해가 가능하게 된 이후부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초장거리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 각지에 화교촌을 건설했고1000만명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에 끌려가 일하게 됐으며유럽인들이 미국과 캐나다호주와 뉴질랜드 같은 곳으로 이주해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점은 사람의 이동이 다른 생물종의 이동과 병행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다양한 동식물심지어 병원균이 인간과 함께 먼 곳으로 이주해 갔다. 그 가운데 특기할 사항이 잡초의 세계적 확산이다. 우선 몇 가지 통계를 보자.캐나다의 농지에서 볼 수 있는 잡초 가운데 60%는 유럽 원산이다. 미국의 잡초 500종 가운데 258종이 구세계 원산이며그 중 177종은 유럽 원산이다. 호주에서는 귀화 식물의 총수가 약 800종인데 아메리카 · 아시아 · 아프리카에서 온 것도 있지만 다수는 유럽산이다. 구대륙(유럽 · 아시아 ·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아메리카 · 호주 · 뉴질랜드)으로 많은 식물들이 이주해 가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점은 그 반대 방향으로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두고 한 식물학자는 "식물들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생태계의 규모로 설명할 수 있다. 구대륙은 신대륙에 비해 생태계 자체가 엄청나게 크다. 따라서 수억 년 동안 생물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며 진화했고 그 결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종만 살아남았다. 이에 비해 생태계 규모가 훨씬 작은 신대륙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치열한 경쟁을 겪으며 살아온 나머지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 '유순한' 성격이 된 것이다. 대양에 의해 격절된 상태로 장구한 시간을 살아오던 세계 각지의 생물들은 15세기 이후 인간의 급속한 해양능력 발전으로 인해 갑자기 조우하게 됐다. 그 결과 구대륙의 강자가 신대륙에 들어가 약자들을 누르며 퍼져 나간 것이다. 구대륙의 식물들은 신대륙에서 '잡초'처럼 퍼져 나갔다. 근대 식물학 용어에서 잡초란 메마른 토양에서 급속히 퍼져 나가고 다른 식물들보다 훨씬 빨리 자라는 식물들을 가리킨다. 특이한 점은 구대륙에서는 통상 잡초라고 볼 수 없는 식물들까지 신대륙에서 그런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심지어 나무가 잡초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인도제도에는 유럽의 오렌지가 들어와서 나무로 자라난 다음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복숭아가 미국 남부 지방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프랑스인들이나 스페인인들이 플로리다로 들여온 복숭아가 북쪽으로 퍼졌을 것이다. 복숭아를 먹고 버리면 씨에서 무성하게 싹이 터서 아주 빠른 속도로 넓은 지역을 복숭아밭으로 변모시키고 만다. 영국인 탐험가들이 캐롤라이나로 처음 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에 유럽인보다 복숭아가 먼저 퍼져서 원주민들이 복숭아를 겨울 양식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구대륙 풀들은 신대륙에서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1749년 기록에 의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엉겅퀴 종류인 카르도 데 카스티야가 확산되고 있었는데80년 뒤 다윈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남미의 많은 지역에서 이 풀이 너무나 울창하게 자라 말이나 사람이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게 된 지역이 수백만 평방 마일에 이르렀다. 어떤 종류의 엉겅퀴는 말을 탄 사람 높이만큼 키가 자라나기도 했다. 당시 기록은 팜파의 외래종 식물들이 "쥐나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사람을 따라 다닌다"고 표현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경작지를 만들고 재목을 구하기 위해 숲을 개간해 갔다. 또 소와 말양 같은 가축을 들여와 길렀는데이 동물들은 현지의 풀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발굽으로 짓밟는데다 배설물들을 뿌려서 점차 원주 식물들이 사라져 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나대지에 외래종 식물들이 급격하게 퍼져 간 것이다. 외래종 식물 가운데 예컨대 김의털처럼 극단적인 경우 122만개의 어린 식물이 자라기도 하고어떤 식물은 0.0001g의 초경량 씨앗을 만들어 미세한 공기 흐름으로도 멀리 날아갔다. 이런 풀들은 정말로 근절하기 어려운 잡초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풀들이 온 세상을 뒤덮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잡초는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온 세상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불안정한 땅을 장악하면 그 토양을 안정시키고태양의 뜨거운 광선을 차단하며결국 다른 식물들이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든다. 그리고는 느리지만 더 크고 억세게 자라는 식물들에게 점차 자리를 내 준다. 말하자면 잡초는 생물계의 적십자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불안정한 곳에서 응급조치를 취하지만 생태계가 안정된 상태가 되면 오히려 살아남기 힘들다. 그러므로 사실 잡초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흉악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생태계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근대사는 인간의 이주와 정복교류와 전쟁의 역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것은 생태계의 교환이라는 더 큰 전체 흐름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가축과 작물혹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야생 동식물들거기에 더해 각종 세균들이 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갔다. 인간의 세계화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잡초의 세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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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리대금업과 경제

대부업자 '샤일록'은 악인이었을까중세 종교적 이유로 고리대금업 탄압돈 흐름 끊어져 시민 봉기 일어나기도"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주지 말라."(구약 레위기 25:37) "오 믿는 자여두 배 또 두 배로 지나치게 탐욕을 부리지 말라."(코란 3:130)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신약 누가 6:35)

고리대금업(usury)에 대해서는 어느 종교어느 문명권도 관대하지 않았다. 고리대금은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는 방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원래 'usury'라는 말은 꼭 폭리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자율의 고하와 상관없이 모든 이자를 가리켰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아예 이자를 받는 게 금지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법에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허용됐지만 중세 이후 다시 금지됐다. 교회는 아주 초기부터 이자 수취를 금지하고(예컨대 314년의 아를 공의회나 325년 니케아 공의회) 세속 지도자들에게 이를 지키라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황제나 국왕들은 로마시대 이래 지속돼 왔고 실제 상거래에서 행해지는 이자 거래를 당장 중단시키지 않고 어느 정도 묵인했다. 이자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된 것은 12~13세기에 상업이 크게 성장한 이후다. 3차 라테란 공의회(1179)2차 리용 공의회(1274)는 고리대금업자가 그동안 받은 이자를 전부 되돌려주지 않는 한 종부성사매장유언장 작성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결정했으며나아가 비엔 공의회(1311)는 고리대금업이 죄가 아니라는 주장은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면 어떨지 몰라도 실제 경제에서 이자 없이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말로 이자 지불을 전면 금지시키면 대금업이 사라질 테고 그러면 경제적 파국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중세에는 가난한 서민들로부터 국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대부에 의존해 살았다. 심지어는 교회도 성당 증축을 위해 돈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고리대금업자라고 하면 샤일록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유대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유대인들이 꼭 대부업에만 종사한 것도 아니고 모든 대부업자가 유대인이었던 것도 아니지만유대인들이 경제적 후진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을 대출해주는 역할을 많이 했던 것은 분명하다. 사실 유대교에서도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는 것은 금지돼 있지만그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으니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신명기 23:20)는 구약 성경의 구절이 그것이다. 이방인에게는 이자 수수가 가능하다는 해석인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며 유대인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사례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들을 보여준다. 필립 미려왕(美麗王 · 얼굴이 잘 생겨서 이렇게 불린다)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과 채권을 몰수했을 때 파리의 연대기 작가인 제프루아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오늘날 기독교도들보다 유대인들이 사업을 할 때 훨씬 너그러웠다. 유대인들이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면 기독교도들이 더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돈을 빌려줄 사람을 찾을 수 없으니 오히려 모두 더 큰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대금업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이자 수수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필립 왕은 1311년 처음으로 '저리'의 이자 수수를 공식 인정했고20%를 이자 상한선으로 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그동안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받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기독교도' 고리대금업자들일명 롬바르디아인들이 축출됐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인들 역시 조만간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리대금업을 억제하는 종교적 요구와 이자 수수가 불가피하다는 경제적 요구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1360년에 유대인들을 용인하는 조치를 취했다가 1394년에 다시 축출하는 혼란스러운 정부 조치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채 문제가 심각해져 파리 시민들이 1306년과 1356년 두 차례 봉기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와 경제의 상반된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난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 것인가. 국왕의 자문관들은 일종의 '미소금융'안을 생각해냈다. 개인 대부업자 대신 공공은행이 서민에게 저리로 대출해주자는 것이다. 1380년대 필립 드 메지에르라는 국왕 자문관은 국왕의 자본으로 공공은행을 설립해 각 시의 지점에서 서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1년 뒤에 돈을 환수할 때 추가로 10%'적선'을 받아 자본금을 늘려 나가자는 진전된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이런 안들을 실행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결국 중세의 '미소금융'은 아이디어에 그치고 말았다.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채무 지불을 유예해주는 정도에 그쳤다. 국왕에게 탄원을 한 사람 중 사정을 감안해 123년 혹은 5년 동안 지불 기간을 연장해주는 '유예허가서'를 발행했다. 이런 특권을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그래도 과거 루이 9(십자군에 참여해 성인 시성을 받은 왕) 시대처럼 채무 지불 유예자의 '십자군 원정 참전 의무'와 같은 조건은 달려 있지 않았다. 국왕 휘하 군인들과 상인들서민들은 자신의 채무 상태가 전쟁이나 자연재해처럼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지 자신의 잘못된 자산관리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고 유예 특권을 누렸다. 아주 천천히 경제는 종교적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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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통치엔 강력한 수단해양강국 포기 `족쇄`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모든 문명이 해결해야 하는 핵심 과제인 치수(治水) 문제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는 중국의 대운하 건설이다. 대운하는 미국 뉴욕에서 플로리다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장장 1600길이로 인간이 만든 가장 긴 수로다. 깊이 3~9m최대 폭 30m의 이 운하는 60개의 교량과 24개의 갑문(閘門)으로 해발고도 차이와 수위를 조절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여러 지방에서 운하들이 불연속적으로 건설됐다. 진 제국이 성립된 이후 기존 운하들을 연결하고 여기에 새로운 운하들을 추가로 건설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이후 수나라 때인 610년에 대운하가 사실상 완성됐다. 수 제국은 500만명의 남녀 노역자를 가혹하게 몰아붙여 단 6년 동안 무서운 속력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운하 건설은 만리장성 축조보다 더 힘든 사업이었다. 이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맨손에 삽 하나로 작업을 했으며그런 가운데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운하는 황허(黃河)와 양쯔강(揚子江長江)이라는 두 강과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세계 최대의 내륙 수상 운송 네트워크다. 사실 북부 중국의 황허 유역과 남부 중국의 양쯔강 유역은 상이한 별개의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중국 문명이 처음 탄생한 황허 유역은 빙하가 물러나면서 생긴 뢰스(loess)라 불리는 누런 옥토(沃土)로 덮여 있었다. 이 뢰스 성분이 강물에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탁한 강물이 됐다. 이 침전물이 하류 지역에 쌓여 황허가 자주 범람하는 것이 역대 제국의 주요 고민거리였다. 북중국 고원지대의 비옥한 토양에서 풍부한 강물을 이용해 수수를 경작하며 황허 문명이 발달했다. 반면 양쯔강 유역은 원래 거대한 늪지여서 문명화된 대규모 정착 사회가 형성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점차 건조화가 진행되고 벼농사 기술이 발전해 결국 이곳이 중국 최대의 식량 생산지역으로 발전했다. 대운하는 이 두 지역을 연결시켰다. 남중국의 테라스식 언덕배기 논에서 생산한 쌀은 내륙 수로를 통해 황허 유역에 위치한 대규모 인구 중심지와 군대에 송출됐다. 이렇게 해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단일한 전국시장으로 통합됐고북방의 호전적 기마 유목민들의 지속적인 위협을 막을 수 있었다. 운하가 중국 통합성의 핵심 요소라는 점은 로마제국과 비교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로마제국에는 중국의 수로와 같은 통합 추진력 요소가 없었다. 유럽의 주요 수상 동맥이라 할 수 있는 다뉴브강과 라인강은 유럽 문명의 초기 허브(hub) 지역인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흐르기 때문에 제국의 통합성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한편 지중해는 개방된 바다이므로 강에 비해 통제가 훨씬 어려웠다. 이 때문에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 대륙은 상호 경쟁하는 다수의 국가들이 분립하는 상태가 됐다. 반면 중국은 로마와 동시대의 제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계속 통합적인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강력한 통합성이 근대에 중국이 세계사 무대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대운하는 제국의 생명선인 쌀 운송을 원활하게 했고조세 수취인 · 관료 · 군인들의 이동이 편리해 중앙정부의 통치에도 큰 도움이 됐다. 운하는 해적이 들끓는 해로를 대신해 제국 전체의 수송을 책임졌다. 중국은 굳이 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갈수록 내향적(內向的)이 됐다. 원래 중국이 바다로부터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명대 초까지 중국은 동남아시아나 인도양 연안 지역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해안까지 대규모 함대가 항해한 유명한 정화의 원정(1405~1433)은 명나라 초 중국의 해상력이 세계 최강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1433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급작스럽게 해상 세계와 절연하고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황제는 칙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외 항해 및 외국인과의 접촉원양항해 선박의 건조를 금했다. 심지어 마스트 2개 이상의 배도 금지할 정도였다. 정화의 거대한 전함들은 방치돼 썩었다. 해군에 종사했던 선원들은 대운하를 오가는 작은 배로 옮겨 탔다. 중국은 자신의 해상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아마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이 해금(海禁) 정책을 취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중요한 점은 중국이 바다를 버리고도 거대한 제국을 훌륭하게 운영할 능력을 구비했기 때문에 그런 방향전환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1411년 새로운 대운하가 완성됐다. 수로는 베이징 너머로까지 확대됐고갑문체제가 더욱 발달해 이제 건기에도 고산지대의 최고점에 달하도록 충분한 물을 대서 연중 운항이 가능해졌다.

 

대운하는 양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제국의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제국의 경제와 행정이 잘 운영됐다는 점은 기근이 들었을 때 운하로 곡물을 날라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탁월한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반면 이런 체제는 내부 혁신성을 떨어뜨리고 외부와 단절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황제와 그 주변의 보수적인 신유교 관료들은 지주계급과 결탁해 상인층을 힘으로 억눌렀다. 또 과도하게 자족성을 고집하다 보니 결국 세계와 단절됐다. 바다라는 중요한 무대를 스스로 버린 이후 중국 해안지역은 당장 왜구의 침탈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 길게 보면 1839~1842년의 아편전쟁 중에 영국의 증기선 포함(砲艦)들이 이 무력한 제국의 내부로 밀고 들어온 것도 먼 연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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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메디치 가문의 흥망성쇠

환전상서 은행가로···교황도 주요고객국제 환어음 이용해 막대한 축적다빈치 등 후원··· 르네상스 꽃 피워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에 소장된 보티첼리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1475~1476)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메디치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메디치 가문과 동업 관계에 있는 델 라마라는 은행가가 주문한 이 그림에는 코지모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와 조반니가 동방박사로 그려져 있다. 14세기 초 단테 '신곡''지옥편'에 자기 가문의 문장(紋章)을 새긴 커다란 돈주머니를 목에 건 채 지옥 구덩이에서 불의 비를 맞으며 '타오르는 땅을 긁고 불똥을 털어내는' 모습으로 그려지던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르네상스 전성기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스러운 인물들로 격상된 것이다.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메디치가의 사업은 그저 그런 수준의 환전상으로 시작했다. 대략 14세기 중엽부터 은행업과 유통업 부문에서 사업이 크게 확대됐지만당시까지만 해도 이들은 수준 높은 사업가라기보다는 마피아 같은 폭력단에 가까웠던 것 같다. 1343~1360년 이 가문 사람들 중 5명이나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업이 한 단계 격상한 때는 조반니가 대 메디치 회사를 세우고 본부를 로마에서 피렌체로 옮겼던 1397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429년에 사망할 즈음 이 회사의 사업 네트워크는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했다. 영국의 양모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모직물플랑드르의 태피스트리이탈리아의 견직물동양에서 들어온 후추와 향신료를 거래했다. 여기에 교황청의 명반(明礬 · alum) 거래가 더해졌다. 명반은 직물에 염료를 고착시키는 데 쓰이는 광물질이어서 유럽 경제 성장에 따라 수요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거의 전량을 이슬람권인 터키에서 수입해 썼다. 그런데 다름 아닌 교황령 내부에서 15세기 후반에 고품질의 대규모 명반 광산이 발견된 것이다. 교황은 신앙의 적인 터키산 명반 수입을 금지시키고 교황청 명반만을 사용하게 했는데메디치 가문이 이 명반의 수출 독점권을 획득했다. 메디치가 사업의 핵심 부문은 늘 은행업이 차지했다. 환전과 대부는 그 자체로 고수익을 가져다 주는 데다 실물 거래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이들을 '상인-은행가'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들은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한 환어음(bill of exchange)을 잘 이용했다. 이것은 자금 대출과 외환거래가 섞인 방식이다. 예컨대 피렌체에서 이탈리아 화폐로 자금을 대출해 준 채권자가 환어음을 발행해 브뤼주의 파트너에게 보내면 그곳에서 채무자의 파트너로부터 북유럽 화폐로 대출액을 회수하는 식이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화폐로 채무를 결제하는 복잡한 관계를 이용해 국제거래의 결제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또 환율 속에 이자를 교묘히 숨겨 교회의 종교적 규제를 피해갈 수도 있었다. 메디치가는 항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권에 자금을 대출해 주며 다양한 사업 특권을 얻어냈다. 이 은행의 주요 고객으로는 역대 영국 국왕부터 부르고뉴 공작교황까지 포함돼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는 보티첼리의 그림에 아기 예수의 발을 감싸 안고 있는 동방박사로 그려진 코지모 데 메디치가 사업을 주관하던 시기였다. 1451년 즈음 사업 네트워크를 보면 로마베니스밀라노브뤼주런던제네바아비뇽 등지에 주요 지점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중 가장 수익이 높은 곳은 동양의 향신료를 거래하는 베니스였다. 각 지점에는 메디치 가문과 친족 관계 혹은 동업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활동했다. 지점들은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사업을 운영하되 피렌체에 있는 본부의 지휘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재벌과 가장 가까운 방식이며이때 메디치 본사는 일종의 지주회사(holding)에 해당한다. 파트너 가문들의 자손들은 각 지점에서 일정 기간 연수를 거친 후 사업을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경제적 · 정치적 힘은 더 커져갔다. 1464년 코지모가 제네바 지점장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명령해 지점 전체를 프랑스의 리옹으로 이전시킨 것이 한 사례다. 이로 인해 유서 깊은 제네바 정기시(fair)는 결정적으로 몰락했고그 대신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리옹이 성장해 갔다. 기업이 정치권과 손잡는 것은 독이 되기 십상이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4세나 부르고뉴 공인 샤를 대담공 등은 거액을 대출하고는 끝내 되갚지 않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국내 정치에서도 정적들이 이들을 압박해 한때 코지모는 베니스로 추방됐고그의 손자 줄리아노는 라이벌 파치(Pazzi) 가문에 의해 잔인하게 암살됐다. 머리에 칼을 맞고 19차례나 단도에 찔려 죽은 것을 보면 대기업 가문 간 경쟁 관계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의 무상함에 비하면 예술과 학문의 후원은 훨씬 빛나는 성과를 냈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마무리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베로키오다빈치보티첼리기를란다이오미켈란젤로 등 기라성 같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후원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와 식사를 같이하며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다.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한 후 모든 것이 끝났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과 그에 뒤이은 광신자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神政政治)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축출됐다. 조만간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복귀하지만(프랑스 왕비를 2명이나 배출했다) 메디치 가문의 사업은 예전과 같은 수준을 되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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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네트워크 확산은 `본국 무관심` 때문

일러스트=추덕영기자choo@hankyung.com

"바다 물결이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 전 세계에 화교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대만의 '중화민국교무통계(中華民國僑務統計)'에 따르면 세계의 화교 수는 3600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동남아시아가 3000만명 이상을 차지하고 아프리카 108000유럽 757000서반구 38200오세아니아 407000명 등으로 나와 있다. 중국 혈통이지만 현지 국가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은 화교(華僑)가 아니라 화인(華人)으로 불리는데이들까지 합치면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중국인들이 오래 전부터 해외 각지로 나가 산 것은 분명하지만화교 수가 이렇게 많아진 것은 그렇게 오래 전 일이 아니다. 16세기께 화교 수는 1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해외로 중국인들이 대거 나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다. 내부 혼란으로 중국 경제가 붕괴 지경에 이르고동남아시아에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 경제를 발전시키며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한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의 광둥성과 푸젠성은 경작지가 협소한 데다 인구 과잉 상태였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 중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20세기 초 화교 수는 700만명이었다가 20세기 중엽에 1400만명으로 증가하고 20세기 말에 4000만명을 넘보게 된 것이다. 처음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쿨리(苦力)라 불리는 하급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화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만들어져 이들이 모두 부유한 상인인 것 같지만실제로는 작은 상점 주인이나 노동자들이 훨씬 많다. 3세계 거주 화교들은 결코 부유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화교들이 현지에서 확실하게 기반을 잡았고또 일부가 사업에 크게 성공해 상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전체 인구의 5%가 안 되지만 이 나라 개인 자본의 70%200대 기업의 75%를 차지한다. 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인 화교가 주요 은행을 지배하고 있다. 이 정도는 아니라 해도 많은 나라에서 화교들이 경제의 특정 부문을 독차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타운페루의 수도 리마 같은 곳에서도 화교들이 소매상점백화점식당 등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외부 사람들이 볼 때 화교들은 다 똑같은 중국인으로 보일 테지만사실 내부적으로 그들 간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서로 언어도 통하지 않고사업상 상호 배타적인 조직을 운영하기 십상이다. 원래 출신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캐나다남미 지역의 화교들은 광둥성 출신이 대다수인 반면 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는 푸젠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화교들의 특징은 같은 고향 사람들 혹은 동성(同姓) 친족끼리 각종 조직을 만들어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화교들이 운영하는 조직은 8000개 이상이며 대부분의 화교들은 이 가운데 몇 개에 가입해 활동한다고 한다. 이처럼 화교들이 그들 간의 조직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고국이 정치적 보호망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화(鄭和)의 원정 이후 시작된 중국의 해금(海禁) 정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근대 이후 중국 당국은 공식적으로 대외 관계에 부정적이었다. 19세기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하고20세기에는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내향성 혹은 대외 기피증은 더 심해졌다. 그토록 많은 중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살지만 정작 본국 정부가 이들을 방치하다 보니 부유한 중국 상인들과 가게들은 걸핏하면 약탈당하고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抑華扶馬 · 화교 세력을 억압하고 말레이계 토착민을 우대함) 같은 현지 국가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화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생존 전략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활한 토끼는 3개의 굴을 가지고 있다(狡兎有三窟)'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하는 한편그들 간 협력 관계를 강화해 온 것이다. 화교들은 독특한 사업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가족 중심적 혹은 가부장적 회사 운영 방식이다. 대규모 회사도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해서 상장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상표가 없는 경우도 있다. 연장자의 상명하달식 의사 결정내부 금융기업의 장자 상속 방식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또 화교들끼리 철저하게 신용을 지켜 수억달러의 공동 투자 사업을 하는데 계약서 없이 식사 자리에서 구두로 결정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지에서 살아가야 했던 화교들의 특별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온 현상이다. 화교들은 현지 사회에 완전히 동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매우 특이한 상태에 있다. 과거에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형성한 이런 관계망이 역설적으로 지구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유연하고도 효율적인 인적 · 물적 기반이 됐다. 오늘날 중국이 세계화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화교 인력과 자본을 이용하려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화교를 두고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부르지만아마도 앞으로는 유대인을 두고 서구의 화교라고 부를지 모른다. 이미 현금성 유동자산만 수조달러를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화교 세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제조직으로 비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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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복식부기((複式簿記)

14세기 이탈리아 회계사 처음 사용아라비아 숫자 도입합리적 계산 확산

'토마소도메네고니콜로 세 사람이 동업 관계를 맺었다. 토마소는 147211일에 760두카트를 투자했고41일에 200두카트를 인출했다. 도메네고는 21일에 616두카트를 투자했고61일에 96두카트를 인출했다. 니콜로는 21일에 892두카트를 투자했고31일에 252두카트를 인출했다. 147511일에 그들은 자기들이 3168두카트 13½ 그로소를 얻었음을 알았다. 각자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을 구하라.'15세기 이탈리아 상인층 자제들이 상업학교에서 공부하던 연습문제의 사례다. 이는 단순한 소매상이나 보부상 수준을 넘어 유럽 전체를 무대로 복잡다기한 동업 관계가 맺어지던 실제 상업 세계를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사업의 실태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러기 위해 모든 거래를 장부에 일일이 적어두고 또 그것을 합리적으로 분류하고 계산하는 방법이 발전했는데그 정점에 이른 것이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였다. 누가 이 방식을 발명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략 1300년께 이탈리아 회계사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대수식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대수식에선 한쪽에서 플러스인 것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면 마이너스가 된다. 이처럼 모든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차변(借邊)과 대변(貸邊)에 같은 금액을 계상함으로써 사업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복식부기의 핵심이다. 이런 방식을 '베니스 방식(alla veneziana)'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아마도 베니스 상인들에 의해 개발됐을 가능성이 있다. 복식부기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많이 쓰였으며 북유럽에는 훨씬 늦은 시기에 도입됐다. 예컨대 16세기에 유럽 최고의 상업 가문 중 하나였던 푸거(Fugger) 가도 복식부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14세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이 점진적으로 복식부기를 채용해간 것은 분명하다. 중세 이탈리아 상인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이 보존된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의 경우 1366년부터 1410년까지 회계장부가 남아있는데1383년 이전에는 장부가 서술문 형식으로 돼 있었다. 이 시기에는 그가 벌인 사업활동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즉 그의 사업이 수익을 내고 있는지 손해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후대의 우리뿐 아니라 다티니 자신도 자기 사업 현황을 대충 감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383년 이후에 복식부기를 사용하고 나서야 사업의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복식부기 방법이 알려진 후에도 많은 경우 장부는 매우 허술하게 기록됐다. 당시 상인들은 요즘처럼 차변 · 대변의 숫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고 '대략' 맞는 정도로도 만족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수지결산을 제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부기의 목적은 결국 수지결산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15세기만 해도 상인들은 오랜 기간 결산을 미루기 일쑤였고때로는 장부책 마지막 쪽이 다 채워질 때 가서야 결산을 하기도 했다. 냉철한 기준에 근거한 합리적 회사 운영방식은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복식부기를 완전한 형태로 정리해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복식부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사람은 베니스에서 활동한 수학자 루카 파촐리(1445~1517). 그의 저서 산수기하학비례와 비례적인 것들의 대전(Summa de arithmeticageometria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14941523)은 웬만큼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배우는 수학 입문서다. 점성술건축조각우주론군사심지어 신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계산과 기록'이라는 장에서 상업 산수와 부기의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 이 부분은 따로 독립돼 나중에 각국어로 번역 출판됐으며19세기까지도 독일과 러시아에서 복식부기 입문서로 활용됐다. 그의 방법을 따르자면 사업 활동은 세 가지 종류의 장부에 순차적으로 정리된다. 우선 모든 거래는 그때그때 비망록에 적어두고다음에 그 내용을 분개장(分介帳)에 정리한 뒤 최종적으로 원장(元帳)에 복식부기 방식으로 분류해 기입한다. 결산은 매년 규칙적으로 한다. 결산을 하려면 따로 종이 한 장을 마련해 왼쪽 편에는 차변 총액오른쪽 편에는 대변 총액을 열거한 후 두 항목을 모두 합산해 비교한다. 손실이나 이익을 합하면 양쪽 수치는 완전히 같아야 한다. 만일 수치가 일치하지 않으면 계산 실수나 누락부정이 있다는 의미이니 그 복잡한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수입이 지출보다 많으면 사업이 성공한 것이고그 반대라면 잠 못 드는 밤이 찾아올 것이다. 파촐리는 이 부분에서 '신이시여!! 신실한 저희 신자들이 그 같은 곤란을 겪지 않도록 보호하소서!!'라는 기도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장부 정리를 잘 해야 수익과 손실을 분간할 수 있고사업의 추세를 잘 판단할 수 있다. 또 그래야 훌륭한 동업 관계도 유지된다. '계산을 자주 하면 우정이 오래간다'는 것이 그의 현명한 주장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라비아 숫자의 도입이 이런 계산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1934C97' 같은 간단한 계산도 알파벳 숫자로 할 때는 실로 복잡한 일이 되고 만다. MCMXXXIVXCVII를 곱하는 것은 (1000100+1000+10+10+101+5) 곱하기 (10010+5+2)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은 합리적 계산의 확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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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열기 잠재운 `골드 러시`

/일러스트=추덕영기자choo@hankyung.com

캘리포니아(California)라는 이름은 스페인 탐험가이자 작가인 몬탈보가 1510년에 쓴 소설에서 유래했다. 그리핀 같은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금이 많이 나며 칼라피아(Calafia) 여왕이 다스리는 이상 국가의 이름이 캘리포니아였다. 일설에 의하면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무나 황량한 풍광을 보고 역설적으로 그렇게 부른 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고착됐다고 한다. 이 땅은 멕시코 소유였지만1846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184822일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통해 미국에 넘겨졌다. 조약 체결 며칠 전 캘리포니아 내륙 산지에서 금이 발견됐고곧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다음해인 1849년에 구름처럼 몰려든 이 사람들을 포티나이너(forty-niner)라고 부른다. 널리 알려진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은 포티나이너의 슬픈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금 러시(gold rush)는 미국 동부에 살고 있던 미국인들뿐 아니라 세계 각지 사람들에게 금을 캐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었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캘리포니아에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 프랑스인들도 적지 않은 수를 차지했다. 프랑스인들은 해외 이주나 심지어 해외여행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유포된 것은 19세기 말 프랑스 민족주의가 강화돼 '아름다운 프랑스'를 떠날 이유가 없다는 식의 신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상당수의 프랑스인들이 미국 각지로 들어갔다. 그 중 유명한 인물로는 장루이 비뉴가 있다. 그는 1826년에 동료들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 가서 양조장을 지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1829년에 감리교의 영향으로 하와이에서 알코올 제조가 금지되자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곧 고급 포도주 생산에 성공해 '캘리포니아 포도 재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몰려온 것은 1848~1849년 이후의 일이다. 1848년 북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영토가 폭발적으로 팽창했지만구대륙 유럽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넘치던 해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분출된 시민의 자유와 민족의 권리를 다시 억압하려는 보수 체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혁명과 민족주의 혁명산업화의 진전으로 생겨난 노동계급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 등 여러 움직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해 말 이런 혁명 운동들은 거의 대부분 억압됐다. 많은 활동가들이 당분간 혁명의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바로 이 순간에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미국은 여러 의미에서 기회와 꿈의 땅으로 인식됐다. 1849년에 약 4만명의 프랑스인이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이 가운데 절반인 2만명 정도는 1848년 혁명에 참여했거나 그 이상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해 초 봄부터 프랑스 전역에 캘리포니아 금 열기가 넘쳤다. 신문에는 "수백 마일의 땅에 금이 섞여 있어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수 세기 동안 일해야 금을 다 채굴할 수 있다"거나 "1m만 땅을 파면 금이 나온다"는 식의 과장된 기사들이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극장에서는 '새크라멘토의 금 채굴업자' 같은 연극이 공연됐다. 캘리포니아의 금광 지도가 나돌았고분명 사기성 짙은 회사들이 이미 금광 지역 땅을 사두었다며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캘리포니아 이민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도주의 단체들도 생겨났다. 이런 일들을 지켜보던 마르크스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에게 금광의 꿈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대체했다"고 탄식했다. 프랑스 정부까지 한몫 거들었다. 복권을 발행해 1등에게는 거액의 상금을 주고5000명에게 캘리포니아 항해 운임을 대주었다. 분명 지난 혁명 때 폭동에 가담했던 불온한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내버리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이 모두 '실업자와 창녀'였다는 말은 틀린 주장이었고 번듯한 상인기술자지식인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외지에서 큰돈을 번 다음 다시 귀국하려는 생각을 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천국과 거리가 멀었다. 아직 항구시설이 건설되지 않아 뭍에 오르려면 짐을 등에 지고 뻘밭을 걸어가야 했다. 이 때 이미 짐작했을 터다. 그들은 허름한 창고 안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고식량이 부족해 계란 하나가 1달러에 팔렸다.

 

금광을 발견해 거부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는 제법 도시다운 모양을 갖추어갔다. 1852년 이 도시 인구 5분의 1 이상이 프랑스인이었다. 이들은 영어를 하지 못하므로 다른 미국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프랑스 구역에서 자기네들끼리 살았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내륙의 여러 지역에 퍼져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그곳에서도 이들은 주말에 모여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힘차게 부른 다음 정치 문제를 토론했다. 1848년 구대륙의 뜨거운 혁명 열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신대륙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꿈으로 이어졌다. 캘리포니아는 혁명적 이상주의와 일확천금의 기회주의가 교묘하게 뒤섞인 상태에서 형성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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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근과 풍요의 반복

농업 덕에 풍요?오히려 대기근 불렀다경작지 늘어도 地力약해져 1인 생산 급감'죽음의 공포' 지나자 다시 풍요의 시간이

과거에는 음식이 풍족하던 시기보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가 훨씬 많았다. 인류의 역사는 차라리 기근의 연속에 가까웠다. 보나시라는 중세사 연구자에 의하면 750년부터 1100년 사이에 유럽 대륙 전체에 기근이 들었던 시기가 29차례라고 하니대략 12년마다 한 번꼴로 대기근을 겪었던 셈이다. 유럽 문헌 가운데 가장 처참한 기근 기록으로 알려진 라울 글라베르의 연대기는 1032~1033년의 참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가축과 가금류를 다 잡아먹고 난 후 사람들은 끔찍한 배고픔에 사로잡혀 어떤 더러운 것들도 다 먹어치웠다. 어떤 이들은 나무뿌리와 수초를 먹어 죽음을 면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의 분노를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 시기에 오 불행이여기아의 광증은 인육을 먹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던 일이다. 여행자들은 그들보다 힘센 사람들에게 잡혀서 몸이 절단돼 불에 구워졌다. 아사를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은 잠잘 곳을 마련했다고 생각한 곳에서 밤에 맞아 죽어 그곳 주인의 배를 채우는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일이나 계란으로 아이들을 으슥한 곳으로 꼬여서 죽인 다음 먹어버렸다. 도처에서 시체를 파내어 요기를 했다. 마치 식인 풍습이 정상적인 관습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시장에 인육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그 사람은 체포된 뒤에도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를 땅에 묻었더니 다른 사람이 파서 먹었다. 그 사람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의 다른 기록들에도 기아영양부족질병전염병 기사들이 넘쳐난다. 1066년부터 1072년까지 브레멘에 기근이 극심해져 '많은 빈민들이 광장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1083년에도 '많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1094년에는 독일 주교들이 마인츠 종교회의에서 돌아오다가 '암베르크의 교회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마룻바닥을 가득 덮고 있는 시체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왜 유독 11세기에 이렇게 기근이 심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때가 경제적 팽창이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회가 안정을 찾고 새로운 농업 체제가 확립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이런 시기에 오히려 간헐적으로 파국이 찾아온다. 당시의 농업 성장은 인구 증가를 가능케 했지만 사실 그 성장은 내부적으로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개간을 통해 경작지를 늘렸지만 그런 곳은 지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농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면 전체적인 농업 생산은 늘어나지만 1인당 생산은 줄어든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후가 다소라도 불순하면 농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고그로 인해 발생한 식량 부족 사태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잉여 인구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이처럼 주기적인 참사를 겪으면서도 12~13세기에 농업 생산과 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했지만 이런 취약한 성장은 장기적으로 역전을 피할 수 없다. 1270년께 유럽의 경제 성장이 정지했고14세기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후퇴 양상을 보였다. 다시 과거와 같은 참상이 벌어졌다. 여러 차례 심각한 기근을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영양결핍과 허약증을 겪게 되었다. 1347년 이후 유럽 대륙을 강타해 인구 4분의 1~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의 창궐은 우연이 아니라 흉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구가 격감하면서 유럽 사회는 멸망의 위기에 빠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는 팽창기의 시작 단계와는 반대 방향의 힘이 작용한다. 즉 전체 생산은 감소하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지력이 좋지 않았던 한계지(限界地)를 버리고 지력이 좋은 땅에 집약적으로 노동을 투입하면 1인당 생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그것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어느 때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페스트가 지나간 1388년에 피아첸차 시는 풍요의 도시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운 성찬을 즐기고 있다. 특히 결혼 피로연에서 이 현상이 더욱 심하다. 만찬은 우선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무엇보다도 설탕 과자로 시작한다. 첫 번째 코스로 테이블마다 한두 마리의 닭과 큰 고깃덩어리를 대접한다. 이것은 큰 냄비에 아몬드설탕여러 향신료를 넣어 조리한 것이다. 다음으로 닭자고새토끼멧돼지사슴 같은 고기가 나온다.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육류를 먹었던 호화로운 시기다. 독일의 사례들을 연구한 빌헬름 아벨에 따르면 15세기에 1인당 연평균 육류 소비량은 100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다시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영양결핍주기적인 기근 사태로 이어진다. 오랜 기간 인류는 이처럼 인구와 식량 간의 모순 속에서 살아왔다. 인구가 늘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것이 결국 위기를 초래한다. 그러면 인구가 감소해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결국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마치 역사의 긴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되는 장기적인 인구 증감 사이클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며역사의 기본 구조였다. 사람들이 풍족하게 잘 먹는 것은 그 중간의 아주 운 좋은 예외적인 시기에 국한됐다. 이런 구조적 현상이 깨진 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육체는 일상적인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진화해 왔으므로 요즘 같은 영양 과잉 상태에 대해 우리 몸은 채 대비가 돼 있지 않다. 비만이 문제가 된 것은 그야말로 최근이며이런 상황은 역사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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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 19세기 수천만명 아사엘리뇨제국주의 `합작품`

일러스트 =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19세기 후반은 전 지구적 재난의 시기였다. 한꺼번에 그렇게 광대한 지역이 재해를 입은 사례는 없었다. 1876~1879년과 1889~1891년에 세계 여러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한반도를 비롯 인도 브라질 러시아에 기근이 심했고에티오피아와 수단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할 정도로 사정이 처참했다. 1896~1902년에는 열대지방 전역과 중국 북부에 계절풍이 불지 않는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이때 말라리아와 페스트,이질,천연두,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해 이미 기근으로 약해진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기상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열대 동태평양 지역의 급속한 가온(加溫) 현상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북동부 전역에서 계절풍 약화와 가뭄을 발생시킨다. 이를 엘니뇨현상이라 한다. 반대로 동태평양이 비정상적으로 냉각되면 이 현상이 역전돼 '원격 연계'된 지역들에서 비정상적인 강수 현상과 홍수가 발생한다. 이것이 라니냐현상이다. 인도양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서 엘니뇨와 라니냐 두 현상이 연계돼 차례로 반복되는 시소 현상을 엘니뇨 남방 진동(El Nino-Southern Oscillation)간단히 줄여서 ENSO라 한다. 19세기 후반 일련의 사태는 최근 500년 중 가장 강력했던 ENSO 사태의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자연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문제와 연관돼 더욱 악화됐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 세 차례에 걸친 가뭄과 기근질병의 파고 속에서 최소 3000만명에서 5000만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회안전망의 파괴와 약탈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정말 예외적으로 거대한 재앙이 닥친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대량으로 굶어죽을 만큼 곡물이 부족한 경우는 없다. 어딘가에 식량이 있지만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분명 제국주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 국가들과 일본은 천재지변의 사태를 악용해 공유지를 몰수하고 농장과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을 싼값에 구하는 식으로 식민지를 강탈했다. 제국의 영광의 이면에는 처참한 식민지 상황이 놓여 있었다. 인도의 사례를 보자.인도의 철도는 기근을 구제하는 치유책이라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기근을 더 악화시켰다. 곡물상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곡물을 해외로 수출했다. 1877~1878년 인도에서 유럽에 수출한 밀은 32t으로 사상 최대였다. 당시 굶어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들개만이 이 지역에서 제일 살찐 동물이었다. 국내에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근 지역의 식민지 경제 발전으로 노동력 수요가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이 쿨리(苦力 · 노동자)가 돼 해외로 떠났다. 쿨리들의 선상 식사량은 하루 쌀 570g부식 450g에 불과해 2차대전 때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의 규정 식사량보다 적은 상태였다. 마이소르 지방에서는 오직 공포정치로써만 질서를 유지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들판에서 이삭을 줍다가 잡히면 낙인이 찍히고 코를 베이거나 살해당했다. 미친 사람이 시체를 파먹거나 사람을 죽여 삶아먹는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주민들이 지주와 촌장을 공격해 가족들을 살해하고 곡물 창고를 약탈했다. 오랜 가뭄 끝에 마침내 비가 와서 농사가 어느 정도 회복됐을 때 그 동안 체납된 세금을 걷기 위해 데칸 고원에서 군사 작전이 벌어졌다. 그동안 버텨왔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최후의 일격이 됐다. 황하 유역에서도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 사람들은 지붕 이엉으로 쓰인 썩은 고량 줄기를 먹으며 버티다가 나중에는 아이들을 내다 팔아 식량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이 지하 동굴에 모여 살다 차례로 죽어갔다. 산시성(陝西)의 큰 현에서는 10~20만명이 사망했고 작은 현에서도 5~6만명이 죽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 그 구덩이들은 만인묘(萬人墓)라 불렸다. 부모들이 포기한 아이들은 비밀 장소로 옮겨져 잡아먹혔다. 사람 고기가 노상에서 공개적으로 판매됐다. 부모들은 친자식을 잡아먹을 수 없어서 다른 가족과 아이들을 교환했다. 산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도와 중국에서 피해가 이토록 엄청나게 커진 것은 마을과 국가의 구호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청나라 전성기 때 국가의 구호체계는 대단히 훌륭했다. 1743~1744년 엘니뇨 때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시절 피에르에티엔 빌이라는 외국인이 중국의 구호체계를 기록한 바 있다. 흉년이 들자 관리들은 즉각 곡물 창고에서 식량을 꺼내 농민들에게 지급했다. 해당 지방의 곡물 비축분이 충분치 않자 대운하를 이용해 남부 지방에서 대량의 쌀을 수송해 왔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8개월 동안 200만명의 농민을 부양했다. 같은 기간 유럽에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한 것과 비교하면 중국이 유럽보다 훨씬 나은 구호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세기 후반에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수많은 아사자가 나온 것은 국가 시스템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엘니뇨현상만으로 처참한 비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으며제국주의의 침탈과 그에 동반한 국가기구의 능력 상실이 피해를 키운 것은 분명하다. 흔히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 대해 천재(天災)이자 인재(人災)라고 이야기하는데19세기 후반의 대재앙이야말로 글로벌 차원에서 벌어진 천재 겸 인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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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최초의 `글로벌 경제` 이슬람 제국

한 손에는 '쿠란'··· 다른 손에는 '경제'유연한 소통으로 다양한 문명 융합상업 중시 ··· 종이·농산물 등 확산

이슬람교만큼 광범위한 지역에 빠르게 팽창해간 종교는 없을 것이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망(632) 이후 10년 내에 아랍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서부이란을 정복했다. 팽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랍의 선박들이 키프로스(649)카르타고(698)튀니지(700)지브롤터(711)를 정복한 후 마침내 스페인을 정복(711~716)했다. 동쪽 방향의 팽창 과정을 보면 650년대에 이란 고원의 사산 제국을 무너뜨렸고 그후 발크사마르칸트부하라 등 중앙아시아의 주요 오아시스 지역들을 지배했다. 더 나아가서 터키 부족들의 요청으로 아랍군이 당나라의 서쪽 변경 지역까지 진공해 탈라스 강변에서 당나라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터키 족이 중국 문명권에 들어가지 않고 이슬람권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이는 중앙아시아의 역사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남쪽으로는 아랍인들이 인도로 항해해 들어가 711년에 힌두 · 불교 문화권이었던 신드(Sind) 지방을 정복했다. 그후로는 동남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으로 이슬람교가 확산돼 갔다. 이처럼 이슬람교의 성립 이후 130년 정도의 기간에 아랍군과 선박은 지브롤터부터 인도에 이르는 엄청난 지역을 지배했고중국 및 유럽과 마주하며 그 내부로 침투할 길을 찾고 있었다. 이런 경이로운 팽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알라의 위대한 뜻이었다는 이슬람교 내부의 해석은 물론 역사학적 설명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재물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탐하는 아랍의 호전적 전사들이 메뚜기떼처럼 몰려갔다는 식으로 비하하는 19세기 유럽 학자들의 설명 역시 사실과 크게 다르다. 오늘날 학자들은 7~8세기 아랍 군대가 대단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는 점새로운 물자 공급 지역과 교역로를 차지해야 하는 경제적 욕구가 커졌다는 점종교적 열정의 분출에 동반된 정치적 에너지를 바깥으로 발산시켜야 했다는 점 등을 거론한다. 아랍 · 무슬림의 팽창은 정치 · 군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잘 계산된 조직적 팽창인 것이다. 이슬람 세계는 글로벌 세계질서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이슬람권'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이 세계의 실체는 하나의 종교권 혹은 하나의 문명권 이상의 것이다. 이슬람권은 아랍 세계페르시아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인도북아프리카스페인 등 실로 다양한 문명들을 포함하는 '초문명'이다. 여러 다양한 문명 요소들이 이 안에서 활발하게 소통하고 융합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오해하듯이 종교가 모든 것을 철저히 지배해 질식시키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어떤 지역보다 유연한 소통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흔히 초기 이슬람권에 대해 '한 손에는 칼한 손에는 쿠란'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지배 지역에 이슬람교를 강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식이다. 이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 피지배민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형제가 되든지그렇지 않으면 세금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기존 종교를 믿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아랍화''이슬람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아랍의 지배를 받아 아랍 문화가 사회에 널리 퍼지는 것이고후자는 주민 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것인데 이 둘이 항상 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아랍의 발전된 과학과 문학음악농업 기술 등을 받아들여 아랍화는 많이 진전되었지만 기독교를 그대로 유지하는 주민이 많아 이슬람화는 불완전했다. 반면 이란은 아랍 문화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페르시아 문화를 유지했지만 이슬람화는 크게 진척돼 조로아스터교를 거의 완전히 대체했다. 종교가 다른 부문을 완전히 질식시키지 않는 유연한 태도는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슬람권은 광대한 지역에 펼쳐져 있어서 상이한 물품들이 서로 교환됐다. 문화적으로 매우 다른 지역 간에도 하나의 종교하나의 공통언어(아랍어)가 쓰여서 소통이 편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하마드 자신이 상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종교적으로도 상업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그 결과 유라시아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넓은 지역에 무슬림들의 상업 네트워크가 확산됐고이것이 경제 · 문화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이슬람 문명은 쿠란을 읽는 '책의 문명'이었다. 책의 제작에는 제지술이 필수적이다. 중국에서 개발된 제지술은 8세기 중엽 중국 · 아랍 간 탈라스 전투 당시 아랍인들에게 전해진 후 종내 이슬람 세계 전체에 확산됐다. 8세기 말 바그다드에 처음 제지용 물레방아가 선을 보인 후 900년에는 이집트에 도입됐고12세기에는 모로코와 스페인에서도 종이가 만들어졌다. 곧 이 기술은 유럽 전역에 확산돼 인류 지성사(知性史)의 흐름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농산물의 보급 역시 중요한 요소다. 아랍인이 인도의 신드 지방을 정복한 것은 유라시아의 농업 구조를 변화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많은 작물과 과일채소들이 인도에서 아라비아로 전해지고 그곳에서 다시 이슬람권 각지로 퍼져갔다. 경질 밀사탕수수바나나오렌지레몬라임망고수박시금치아티초크가지그리고 무엇보다도 면화가 이슬람권더 나아가 세계 각지로 보급됐다. 농사보다는 교역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아랍인들에 의해 농업 혁신의 기초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슬람권은 최초의 '세계경제'라 할 만하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는 여기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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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고무 탐욕`그 뒤엔 `콩고의 절규`

일러스트 = 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유럽의 소국 벨기에는 산업화와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 말 일약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민하게 좇아간 이 나라는 철도를 건설하고 각종 산업을 발전시켜 국력을 키운 다음 다른 강대국들을 따라 아프리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자국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거대한 '콩고자유국(Free State of Congo)'은 벨기에 식민지라기보다는 사실상 국왕 레오폴트 2세의 개인 사업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예무역 철폐와 기독교 전도 등 온갖 아름다운 명분으로 치장했지만 콩고에서는 최악의 착취가 일어났다. 이 지역 산물로는 다이아몬드와 상아도 있지만 가장 수익이 높은 것은 고무 수액이었다. 19세기 이전에 고무는 고작 덧신이나 방수 옷감을 만드는 데 쓰였다. 고무의 용도가 이처럼 제한적이었던 것은 기온이 내려가면 딱딱하게 굳고 기온이 올라가면 끈적거리는 성질 때문이었다. 찰스 굿이어라는 미국 발명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황처리법(vulcanization)을 발견한 후 고무는 온도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강도와 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쓰임새가 거의 무한대로 넓어졌다. 존 던롭이 공기를 채워 넣는 튜브형 고무 타이어를 발명한 후 자전거가 대중화했다. 곧이어 자동차 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자연히 자동차 바퀴에 들어가는 고무 수요도 증가했다. 새로운 기계가 등장하고 신산업이 발전할 때마다 고무 수요는 폭증했다. 거의 모든 기계에 동력 전달충격 완화전기 절연을 위한 고무 부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는 곧 고무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무를 확보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19세기 말까지 가장 중요한 고무 생산지는 브라질이었다. 그런데 과도하게 고무 수액을 채취하다 보니 이곳의 고무나무가 멸종 위기에 놓였다. 영국은 교묘하게 고무나무 씨앗을 훔쳐 와서 런던의 큐 식물원에서 묘목으로 키운 다음 인도실론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식민지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영국은 농장에서 안정적으로 고무를 얻는 길이 생겼다. 다만 나무가 완전히 성숙해 수액을 채취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890년대부터 고무 가격 폭등은 피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콩고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실제 수익이 적어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레오폴트에게 고무 호경기는 하늘이 부여한 기회였다. 콩고에서 1의 고무를 수집해 앤트워프 본사에 보내는 데에는 1.35프랑의 비용이 들지만그곳에서 10프랑에 팔렸으므로 수익률이 무려 700%였다. 1890년과 1904년 사이 콩고의 고무 수익은 96배나 늘었다. 당시 콩고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식민지였다. 사실 야생 고무 채취 사업에는 수송비를 제외하면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노동력뿐이었다. 콩고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는 나무는 긴 넝쿨이 나무를 타고 30m 높이까지 올라가고 그곳에서 가지를 쳐서 다른 나무로 뻗어가는 특징을 지녔다. 원래는 이 넝쿨의 표면을 살짝 벤 다음 그곳에서 나는 수액을 받아야 하지만 넝쿨을 완전히 절단하면 더 빨리 채취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넝쿨이 죽기 때문에 관리들이 금지시켰지만 누구나 그런 식으로 일했다. 그 결과 마을 가까운 곳의 넝쿨들이 사라져갔다. 이제 수액을 채취하려면 점점 먼 곳까지 가야 했고또 점점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이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고무 채취 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 그들은 마을을 덮쳐 여자들을 볼모로 잡은 다음 마을 사람들이 고무 수액을 가져와야 풀어주었다. 더 많은 양의 고무를 얻기 위해 잔혹한 방식의 할당 제도가 도입됐다. 한 사람이 2주 안에 말린 고무 3~4을 바쳐야 했는데이 양을 채우려면 숲속에서 한 달에 24일 정도 일해야 했다.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시코트(chicotte · 하마 가죽을 말려서 만든 나선형의 채찍)로 매질을 당했다. 맞다가 의식을 잃는 것이 태반이고 100대 정도를 맞으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고무 채집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군대의 공격을 받고 몰살당했다. 유럽 장교들은 아프리카 동맹군에 학살을 대행시키면서 일을 제대로 했다는 증거를 요구했고그래서 아프리카 군인들은 시체의 오른손을 잘라 훈증 처리해 가져왔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때로 사냥에 총알을 사용하고는 산 사람의 오른손을 절단해 오기도 했다.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방식 역시 강압적이었다. 한 장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흑인 100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재소에 물자가 풍부하게 들어오더군요. " 어떤 주재소장은 권총으로 흑인의 귓밥을 쏘아 구멍을 뚫는 것이 취미였다.

 

마을 사람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고무 수액에 흙을 섞자 그것을 흑인에게 강제로 먹인 대리인도 있다. 고무를 채취할 수 있는 넝쿨들이 완전히 멸종할 때까지 열대우림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계속됐다. 20세기 초 지구의 절반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벨기에 등 소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국가의 소유가 됐다. 그들은 본국에서라면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들을 해외에서는 기꺼이 저질렀다. 20세기 경제 발전의 그늘에는 레오폴트 같은 잔혹한 제국주의자의 망령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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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의 굴곡진 평가

추앙받던 淸貧자본앞에선 無能이 되다중세까지만 해도 가난은 덕목근대 들어서 자죄악으로 인식

()를 빈()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어느 문명권이든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보다는 빈을 더 높은 가치더 나아가 신성한 가치로 여겼다. 기독교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반면 빈자들은 성자의 이미지를 띠었다. 예수와 성인들은 쉽게 말해 '거지들'이었다. 부자들이 진정 예수의 길을 좇으려 하면 먼저 가진 것을 모두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따라오라 하지 않았던가.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호의호식은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높은 덕목은 아니며가난하되 덕성을 지닌 청빈(淸貧)이 선비들의 이상이었다. 오늘날 부유함이 반드시 비난의 대상이 아니고 가난이 곧 이상적 덕목이 아니라는 점을 보면 부와 빈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사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 전기만 해도 자기 신분에 합당한 운명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할 뿐이지가난이 곧 고결한 덕목은 아니었다. 사실 이때는 대부분이 다 가난하다 보니 사회적 차별도 거의 없었다. 여기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11~12세기 이후였다. 경제가 팽창하고 상업이 발달해 돈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때는 경제 성장과 종교의 흥기가 함께 이뤄지는 특별한 시기였다. 탐욕이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가난이 영적 가치를 띠게 됐다. 특히 예수와 같이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경우가 가장 존경의 대상이 됐다. 프란체스코파나 도미니코파 같은 탁발승단(托鉢僧團)도 이런 맥락에서 형성됐다. 사회에 부가 쌓이고 빈부격차가 점차 심해지는 시기에 교회 역시 부패한 방식으로 축재에 나선 데 대해 비판이 거세졌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대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스스로 걸인이 돼 고통 받는 하층민 가운데로 들어가 직접 설교했다. 자선의 이념이 만개한 것도 같은 시기의 일이다. 자선이란 일종의 '되사기'였다. 불어로 자선을 뜻하는 'rachat'라는 단어는 '다시(re-)''사기(achat)'를 합친 말로이는 이전에 죄를 지어 잃어버린 덕()을 돈을 주고 도로 산다는 개념이다. 바로 여기에 빈민의 기능이 있다. 그들은 부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다. 빈민들은 물질적 혜택을 받는 반면 부자들은 구원을 보장받고 더 나아가 부를 정당화 내지는 과시할 수 있게 되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중세 말의 대위기는 이 모든 흐름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큰 변화였다. 기근이 거듭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파탄나면서 수많은 빈민들이 삶의 기반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세 도시에는 걸인들이 넘쳐났다. 147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107명의 걸인이 세금을 냈다는 기록에서 보듯 구걸이 전문 직업이 되기도 했다. '장님 걸인의 길드'처럼 조직화도 되고심지어 피렌체에서는 3인의 거지가 회사를 결성하기도 했다. 도시의 외곽지역에 본격적으로 빈민촌이 생겨나고 이곳이 범죄의 온상이자 사창가로 변했다. 이제 가난은 품격 있는 종교적 개념으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가 됐다. 예수와 성인들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우아한 개념상의 빈민과 달리 실제의 빈민은 천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였다. 마치 그때서야 처음 깨달았다는 듯이 사람들은 빈민들이 도둑질을 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고 비판했다. 당국은 허가 없는 구걸을 금지하고 수없이 밀려오는 유랑민들에 대해 성문을 폐쇄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16세기 경제가 다시 팽창 국면으로 돌아서고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빈민에 대한 시각과 정책은 결정적으로 변했다. 한마디로 과거에 빈민은 종교적 구원이라는 기능을 띠고 있었던 반면 이제는 공공선(公共善)을 저해하는 역기능적인 존재가 되었고곧 가혹한 탄압이 뒤따랐다. 근대국가의 빈민 정책은 요양소에서 빵을 나눠주는 식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끝없이 밀려드는 빈민 앞에서 어느덧 억압적인 조치로 변질되곤 했다. 예컨대 1535년 파리 고등법원에서 통과된 '빈민과 구걸에 관한 법령'"몸 성한 걸인들은 공공 취로 사업을 위해 출두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든지 "이곳 출신이 아닌 걸인은 3일 내에 파리를 떠나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17세기에는 중앙정부가 나서서 빈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감옥에 가두는 유명한 '대감금' 현상이 일어났다. 빈민들을 사역소에 가두고 일을 시키는 내용의 영국 빈민법(Poor Law)은 차라리 '빈민억압법(Law against the Poor)'에 가까웠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근대국가와 자본주의의 성장은 인간관계의 악화라는 대가를 치렀다. 자본주의 체제는 재화의 생산을 거의 무한정 늘리면서도 모두를 부유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다수의 빈민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빈민문제는 자본주의 성장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문제로이에 대한 대응은 근대 사회의 핵심 과제였다. 원래 고대적 혹은 중세적 경제 관념에서 재화는 하늘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준 선물(don)이었으며신의 속성은 우리에게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per-) 준다(don)는 것이었다. 'pardon'의 본래 의미가 이것이다. 많은 문명권에서 탐욕을 비판하고 가난을 칭송한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허여한 것을 소수가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과 무관치 않다. 이런 의식을 벗어던진 현대사회에서 그렇듯 과연 경제와 윤리는 전혀 별개의 것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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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궁전` 백화점돈으로 행복을 팔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결핍의 시대였다. 흉년이 들면 귀족이든 하층민이든 배고픔에 시달렸고공업 생산도 사회 전체의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기계화된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이뤄져 물품이 넘쳐나게 됐다. 예컨대 기성복 생산은 1890년부터 1900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났고1914년이 되면서 또다시 두 배 증가했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중산층을 넘어 노동계급 상층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재가 보급됐다. 대중소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업과 유통 역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서 다양한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데는 구둣가게처럼 한 가지 상품만 파는 소규모 가게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상품을 파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백화점이었다. 흔히 역사상 최초의 백화점으로 치는 것은 1852년 파리에서 문을 연 봉 마르셰(Bon Marche)였다. 창업주인 아리스티드 부시코는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개념의 판매 방식을 만들어냈다. 큰 빌딩 전체를 거대한 소매상점의 복합체로 만들어 부문(department)별로 소비품을 모아놓고 팔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서 '백화점(department store)'이라는 말이 생겼다. 대량으로 물품을 들여와서 판매하니 일반 소매점보다 가격이 15~20% 정도 저렴했다. 가격은 고정돼 있었다. 이 역시 당시에는 아주 새로운 현상이었으니일반 시장에서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아 상인과 손님 간에 값을 놓고 흥정을 벌였다. 게다가 부시코의 백화점에서는 반품과 교환이 자유로웠는데이 또한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이런 특징들을 갖춘 백화점은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봉 마르셰가 개점한 185250만프랑이었던 판매액은 1860년에 500만프랑1870년에는 2000만프랑으로 뛰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백화점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파리에 라파예트와 프렝탕런던에 휘틀리해로드셀프리지베를린에 베르트하임도쿄에 미쓰코시뉴욕에 스튜어트필라델피아에 워너메이커상하이에 융안(永安) 등이 들어섰다. 20세기 초가 되면서 캐나다브라질멕시코호주남아프리카터키 등 세계 각지에 백화점이 생겨났다. 이 백화점들은 나라를 넘어 대개 비슷한 면모를 보였다. 그 특징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화려한 건물에 최신 기술을 이용해 멋있는 분위기를 자아내서 소비의 궁전으로 꾸민다는 것이었다. 1927년에 개장한 뉴욕의 김벨 백화점에는 엘리베이터가 27군데나 설치돼 있었다. 이보다 약간 늦은 1931년에는 서울에도 종로 거리에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이 설립됐는데화재 사건 이후 1937년에 건물을 다시 지을 때는 국내 최고인 6층 건물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 대량생산과 대중소비 시대에 중요한 점은 봉급생활자들 스스로 그런 상품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중절모나 비단 슈미즈를 소유하면 지위가 올라가고 그만큼 행복해진다고 설득해야 했다. 여기에서 광고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백화점 소유주들은 소비재에 대한 욕망을 '창출'하기 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신문광고 공세를 펼쳤다. 20세기 초에 신문은 거의 백화점 광고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화점이 주요 타깃으로 상정한 사람들은 우선 중산층이고 다음에는 이들을 뒤따르려는 노동계급 상층이었다. 진짜 최상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상 치수를 파일로 간직하고 특별 고객 관리를 하는 전문 상점에서 옷을 맞췄다. 하층민에게 백화점 상품은 아직 그들의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백화점 운영자들로서는 이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기 위해 중산층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예전에는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의복을 입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서 귀족이 아닌 사람이 화려한 레이스를 사용하기만 해도 벌금을 물렸다. 이런 규범들이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상류층을 모방하려 했다. 백화점 상품은 최고급품은 아니지만 대신 유행에 민감한 신상품이었다. 백화점은 사람들에게 시대에 뒤처지지 말고 패션에 따르도록 부추겼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 돈을 쓰도록 유도했다. 대부분은 자기 아이들만은 자신들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다. 아이들이 장래 상류층이 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아동용 의복이나 가구에는 관대하게 돈을 썼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소비를 결정하는 중요한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시장은 여성들이 마음 놓고 다니기에는 다소 위험하고 불결한 곳이었다. 여성들이 점차 살림의 주도권을 잡고 소비품도 직접 고르는 시대에 백화점은 깨끗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고또 여성 판매원을 많이 고용해 여성 고객을 응대하려 했다. 독일에서는 1907년에 백화점 수가 200개가 됐는데여기에서 일하는 피고용인의 80%가 여성이었다.

 

대중소비 시대에 사람들의 가치 체계는 점차 바뀌어 갔다. 이제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무엇을 소유하는가'가 점차 중요한 지표가 됐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더라도돈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다. 20세기 초반에 백화점은 자본주의 시대의 삶의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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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산 토끼 12마리, 호주를 점령하다

일러스트=추덕영기자choo@hankyung.com

북아메리카의 오지브와족 신화에는 나나보조(혹은 마나보조)라는 거대한 토끼 모양의 신이 등장한다. 위닌와라는 인간 어머니와 에방기시목이라는 아버지의 영혼 사이에 태어난 네 아들 중 하나인 나나보조는 이 땅에 보내져서 인간을 교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지어줬고사람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줬다. 최근에는 이 신화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돼 나나보조가 폴 버니언(Paul Bunyan)이라는 거인 벌목꾼과 40일 동안 싸워 그를 죽이고 숲을 지켜낸 것으로 그려졌다.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공헌하고 자연을 지켜내는 토끼 신이 이채롭다. 토끼는 엄청난 번식력 때문에 이처럼 생명과 풍요의 상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토끼는 한 배에 4~12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이 새끼들은 금방 자라 6~7개월 후면 임신할 수 있다. 토끼가 구애 작업에 돌입해 일이 '성사'되기까지는 30~40초면 충분하다. 임신 기간 30일이 지나면 다음 세대가 태어난다. 이처럼 번식 속도가 빨라 이론상 한 쌍의 토끼가 1년에 최대 800마리의 집단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고기나 가죽을 얻는 용도로 토끼는 아주 좋은 가축이다. 그렇지만 역사상 토끼의 번식력이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일찍이 1420년에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의 마데이라 제도(諸島)에 유럽인들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토끼가 환경 재앙을 초래한 적이 있다. 마데이라(Madeira)라는 이름이 포르투갈어로 '나무'라는 말인 것처럼 이 섬은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름답던 섬은 조만간 인간과 토끼 때문에 황폐화됐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원재료와 땔감으로 사용했고토끼는 그곳 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식생을 파괴했다. '나무로 된 보석'이라 칭송받던 마데이라의 일부 섬들은 사람이 살기 힘든 흉물스러운 곳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몇 백년 후 호주에서 더 큰 규모로 토끼의 재앙이 반복됐다. 19세기에 들어온 유럽산 토끼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토끼가 처음 들어온 곳은 호주 남동쪽의 타스마니아(태즈메이니아) 섬이다. 여러 기록을 볼 때 19세기 초 이 섬에 유럽산 토끼가 들어와 큰 수로 불어난 것은 분명하다. 주민들이 기르던 토끼들이 사육장에서 벗어나 야생으로 돌아가 번식하기 시작했다. 수천마리씩 떼 지어 다니는 토끼들이 풀을 먹어치웠고 나무껍질을 갉아먹는 통에 많은 나무들이 죽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호주 본토에서 일어난 사태와 비교하면 피해가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이 섬의 생태계가 파괴되거나 논밭이 망가질 정도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토끼를 잡아먹는 포식동물들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토에서는 문제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토끼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859년에 토머스 오스틴이라는 농장주가 12마리의 회색 토끼를 들여온 것이 그 시초다. 이 사람은 영국에서 이주해왔는데떠나온 고향에서 주말마다 즐겼던 토끼 사냥을 이곳에서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에 영국에 있는 조카에게 토끼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조카는 원하는 만큼 토끼를 구하지 못하자 집토끼를 몇 마리 함께 보냈다. 아마도 이처럼 다른 종 사이에서 생겨난 잡종이기 때문에 더 강한 적응력을 지녔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론한다. 역사는 때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원인에 의해 크게 굴절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의 농장이 있는 빅토리아주는 겨울 날씨가 비교적 온화하기 때문에 토끼들은 1년 내내 번식할 수 있었다. 10년 후부터는 매년 200만마리씩 사냥을 해도 토끼 수가 계속 불어났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급기야 5~6억마리에 달했다. 양 목장이 큰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생태 환경 전체가 파괴될 위험까지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토끼 수를 통제해야 했다. 토끼 굴을 갈아엎기도 하고 불도저나 트랙터를 동원해 깔아뭉개기도 했다. 폭약으로 날려버리기연기 집어넣기덫이나 독약 풀어놓기여우나 흰담비 같은 천적 풀어놓기 등 가능한 모든 일을 했지만 토끼의 가공할 번식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07년에는 토끼가 호주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600에 이르는 펜스를 설치했지만이는 토끼의 점프 능력과 땅파기 능력을 모르고 한 일이었다. 토끼들은 물과 풀을 찾아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갔다.

 

1950년에는 토끼에게 치명적인 다발성 점액종(粘液腫) 병균을 퍼뜨리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브라질 토끼가 보유한 이 병균은 유럽산 이종(異種) 토끼에게는 치사율이 99.8%나 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이때 80%의 토끼가 죽어서 개체 수는 1억마리로 감소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천성적으로 이 병에 내성을 가진 토끼 수가 불어나 점차 치사율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91년에는 다시 2억마리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늘날에도 호주에선 토끼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야말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통제되지 않는 힘은 자칫 큰 병폐를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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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와 비교우위이론

"박사님은 셜록 홈즈를 잘 모르시는데같이 살게 되면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실 겁니다. " "그 사람한테 뭐 안 좋은 점이라도 있나" (중략)"아니오. 그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셜록 홈즈는 해부학에 조예가 깊고또 화학자로서는 일급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체계적인 의학 공부를 한 적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분야는 산만하지만희한한 지식을 머리에 잔뜩 담아두고 있어서 교수들까지 놀랄 정도입니다. "아서 코날 도일(Arthur Conan Doyle)<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는 불후의 명탐정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話者) 존 왓슨(John H. Watson) 박사는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귀환한다. 런던에서 하숙집을 찾던 왓슨은 과거 자신의 수술조교였던 스탬포드 군으로부터 룸메이트가 될 셜록 홈즈를 소개받게 된다. 스탬포드 군은 홈즈를 괴짜로 평가하지만 왓슨은 오히려 홈즈에게 큰 흥미를 보인다. 왓슨은 결국 홈즈와 베이커가 221B번지에서 같이 하숙을 하게 되는데이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수많은 사건들을 함께 해결해 나간다. 홈즈와 왓슨 콤비의 탄생왓슨은 홈즈 이야기에서 사건을 기록하고 수사를 돕는 조수 역할을 한다. 몇몇 사건들에서는 홈즈보다 더 열정을 보이면서 수사에 뛰어드는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왓슨의 본업은 의사이다. 왓슨은 <네 사람의 서명>(The Sign of the Four)에서 만나게 된 메리 모스턴(Mary Morstan)과 결혼을 하는데그 이후로는 베이커가의 하숙집을 나와 개업의로서 영업을 하면서 틈틈이 홈즈를 돕는다. 홈즈에게 있어 왓슨은 속마음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소중한 동료이지만 왓슨의 의학적 지식이 홈즈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왓슨의 서술에 의하면 홈즈는 화학과 독성물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해부학에 체계는 없지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홈즈는 실제로 <피부가 하얘진 병사>(The Adventure of the Blanched Soldier) 등의 작품에서 의학에 대한 상당한 조예를 드러낸다. 홈즈는 체계적으로 의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지식이 깊고 머리가 비상하기 때문에 의사가 되었다면 왓슨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홈즈는 탐정의 길을 버리고 의사를 택하는 것이 나았을까이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단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로서 왕진을 다니는 홈즈의 모습이 어색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논리적 대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홈즈가 탐정 일에 전념하는 것은 경제학에서의 비교우위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비교우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우위를 알아야 한다. 한 경제주체가 어떤 활동을 다른 주체들보다 더 잘할 때 그 주체는 그 활동에 절대우위(absolute advantage)를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즉 절대우위란 개념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활동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홈즈는 세계 최고의 명탐정으로왓슨보다 사건 추리에 뛰어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홈즈는 추리에 있어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다. 홈즈의 절대우위는 추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홈즈는 깊은 관련 지식과 뛰어난 분석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학에 있어서도 절대우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홈즈가 의사가 되었다면홈즈가 추리와 의학 모두에 절대우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리에 전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바로 비교우위이다.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는 한 경제주체가 수행하는 어떤 활동의 기회비용이 다른 주체들보다 낮은 것을 뜻하는 용어이다. 어떤 활동에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활동을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회비용이란 어떤 활동을 함으로써 포기해야 것의 가치이다. 홈즈가 의사가 되었다면 영국은 세계적 명탐정을 잃어버리고수많은 사건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홈즈의 최대 숙적 모리아티 교수(Professor Moriarty)는 경찰을 조롱하며 엄청난 범죄들을 계속 저질렀을 것이다. 따라서 홈즈가 의사가 되는 것의 기회비용은 매우 크다. 하지만 홈즈가 사립탐정이 되는 것의 기회비용은 이에 비해 굉장히 작다. 홈즈가 의사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국이 큰 피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왓슨의 경우에는 어떨까왓슨 또한 추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홈즈의 추리에 매번 탄복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가 탐정이 된다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탐정 사무실에 파리만 날릴 것이 분명하다. 그가 의사를 계속 했다면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으므로 왓슨 입장에서 탐정 일을 하는 것은 기회비용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의사를 하는 것의 기회비용은 이에 비해 작을 것이다. 비교우위 의해 국제무역 발생두 사람의 기회비용을 비교해보면 홈즈는 탐정 일에왓슨은 의사 일에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교우위이론은 각자가 비교우위를 가지는 활동에 특화를 하면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잘 하는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는 비교우위이론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국제무역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국제무역은 절대우위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지만선진국이 후진국에 비해 거의 모든 상품 생산에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절대우위론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무역이 발생하는 원인은 잘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19세기 초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가 비교우위이론을 내놓으면서 비교우위에 의해 국제무역이 발생하고이것이 모든 나라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리카도는 영국 하원의원을 역임했는데당시만 해도 그가 의회 연설에서 비교우위론을 이야기하면 다른 의원들이 이를 어려워하며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홈즈는 탐정으로서왓슨은 의사로서 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명콤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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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착권 헐값에 샀지만모기진흙과 7년 사투

/일러스트=추덕영기자 choo@hankyung.com

1914년 파나마운하 개통으로 미국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양 고속도로는 정치 · 군사 · 경제적으로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을 긴밀하게 통합시켰다. 그런 전 지구적 통합이 초래한 변화 과정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운하는 미국의 엄청난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졌고미국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미국의 성장에 중요한 촉매로 작용했다. 과거 미국 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가려면 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케이프 호른을 돌아 25000에 달하는 거리를 항해해야 했지만파나마운하 개통 이후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통이 빨라졌다. 이제 대륙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통해 서부의 광물과 농업 자원을 미시시피 유역오대호동부 해안의 산업과 연결시켜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운하는 또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하나로 통합시켜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다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미 16세기에 스페인 탐험가 코르테스가 제시했지만 실제로 이 계획을 추진한 것은 수백 년이 지난 1880년이었다. 그 전 해에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 자작이 다시 이 사업에 달려들었다. 그는 중남미의 짧은 지협에 운하를 파는 일은 훨씬 쉬울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사정이 전혀 달랐다. 수에즈는 덥고 건조하며 평평한 지역이어서 공사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 부족 정도였다. 그와 반대로 파나마는 물이 지나치게 풍부해 강이 넘치고 진흙더미가 흘러내리는 데다 치명적인 질병을 옮기는 모기가 서식하는 무더운 열대지방이었다. 드 레셉스가 막대한 손해를 입은 채 물러나자 1903년에 미국이 이 사업을 인수했다.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설비 일체를 4000만달러라는 헐값에 인수했다. 운하 건설 지역의 치외법권을 사들이려는 계획이 콜롬비아 상원에서 부결되자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나라 내정에 간섭해 파나마를 아예 독립국가로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미국은 수시로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노골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카리브해를 마치 자기 나라의 호수처럼 만들고는 본격적으로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지협을 가로질러 해수면 높이의 깊은 물길을 파내는 드 레셉스의 계획을 되살리려 했지만태평양 방면과 대서양 방면 사이의 수면표고(水面標高) 차이가 컸기 때문에 결국 갑문(閘門)식 운하 건설로 방향을 잡았다. 전체 사업의 큰 그림은 양쪽에 초대형 호수를 만들고중간 지역에 수로를 뚫어 양쪽 호수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물길을 낸다는 것이었다. 우선 거대한 댐을 건설, 카리브해로 흘러드는 차그레스강을 막아 세계 최대의 인공 호수인 가툰호를 만들었고다음에 반대편 파나마만 쪽에도 미라플로레스호수를 만들었다. 그 중간의 구릉지를 파서 15길이의 쿨레브라 수로를 여는 것은 현대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사업이었다. 강철로 된 거대한 계단식 갑문을 만드는 데 사용된 콘크리트 양은 당시까지 단일 공사로서는 세계 최대를 기록했다. 이 계획의 성공 여부는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때 전체 노동자의 80%까지 무력화시켰던 말라리아와 황열병 같은 열대 질병을 억제하는 것걷잡을 수 없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차그레스강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가장 어려운 숙제로서 거대한 진흙더미가 흘러내리는 산을 뚫고 길을 내는 것이 그 문제들이었다.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매년 33000~4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해 끊임없이 땅을 팠다. 그들은 찜통더위나 폭우 속에서도 밤낮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산을 폭파시키고바위와 흙더미를 옮기고우기에는 반복되는 산비탈의 진흙 사태로 흙더미 아래 묻힌 공사용 기계를 파내야 했다. 쿨레브라 수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파낸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50~60대의 거대한 증기 굴착기가 하루에 열차 500대 분량의 흙을 퍼냈다. 이 작업 시스템의 생명은 대형 철도망이었다. 기차를 통해 기계를 운반하고 거대한 흙을 날랐다. 19135월 드디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작업을 진행하던 두 대의 굴착기가 만났다. 몇 달 후인 191310, 워싱턴에 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운하에 물을 채우기 위해 둑을 무너뜨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사는 정해진 기한에 맞추어 끝났다. 191481537500만달러를 투입한 초대형 사업이 완성된 것이다.

 

어느 면에서 보건 운하는 대성공이었다. 개통 후 10년 이내에 운하는 매년 약 5000척의 선박이 통과하는 수로가 됐다. 1970년까지는 매년 15000대가 넘는 배들이 10~12시간 걸리는 이 운하를 통과하며 1억달러가 넘는 통행료를 지불했다. 그 후 주기적인 확장과 개선 작업이 이루어져 대규모 전함이나 초대형 유조선 또는 거대한 화물 컨테이너 수송선도 운하를 지나갈 수 있게 됐다. 이런 변화는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의 통합을 뒷받침하는 해운 혁명의 근간이 됐다. 이 혁명은 세계의 항구를 변모시켰다. 짐을 선착장에서 하역하는 대신 컨테이너를 직접 기차나 트럭에 실어 최종 목적지로 보내게 된 것이다. 85년 동안 미국이 관리해 온 파나마운하 운항권은 20세기 마지막 날인 19991231일자로 파나마에 이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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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프랑스의 가장 추웠던 겨울

태양왕 아래 얼어죽은 60만명1709년 겨울 평년보다 20도 낮아기근·질병에도 왕은 전쟁에 몰두

겨울 추위가 가장 심했던 때는 언제일까. 우리는 과거의 기후를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지구는 더워지는 걸까추워지는 걸까. 최근 기후사(氣候史) 분야에서 괄목할 발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 역사학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상당히 유용한 힌트를 제공한다. 프랑스에서는 겨울 추위가 극심했던 해로 1879년과 1956년을 들곤 했지만최근 연구자들은 아마도 1709년 겨울이 그보다 더 심해서 이때가 지난 500년 중 가장 추웠던 시기였으리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루이 14세 시대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생시몽은 이 당시의 날씨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겨울 날씨는 혹독했다. 추위가 어찌나 심한지 베르사유궁 방 안 찬장에 보관해 두었던 헝가리 화장수(로즈마리 성분이 첨가된 알코올 방향액)엘릭시르 시럽도수가 가장 높은 리쾨르주의 병들이 모두 터졌다. 빌르루아 공작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는 유리잔에 얼음이 떨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의 난방 시설이 형편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울의 방'을 데우는 설비라고는 그 거대한 살롱 양쪽 벽에 붙어있는 벽난로 두 개가 전부라 아주 추운 겨울이면 왕이 식사하는 식탁 위의 포도주가 얼어붙는 일도 있었다. 1709년에 유독 기온이 내려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두 해 전인 1707년 지구상에 4개의 거대한 화산이 거의 동시에 폭발한 것이 원인일지 모른다. 이탈리아의 베수비오산그리스의 산토리니섬일본의 후지산인도양 서쪽의 레위니옹섬의 화산이 폭발해 몇 해 동안 화산 분출물들이 대기 중에 퍼졌다. 이것이 햇빛을 가려 대기 온도를 내렸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그 때문인지 1708년 여름 온도부터 예년보다 낮더니겨울에 맹추위로 이어진 것이다. 마르셀 라쉬베르라는 학자는 170812월 중순부터 17093월 중순까지 모두 7번의 한파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1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계속된 네 번째 추위가 가장 심해 기온이 영하 10도에서 시작해 영하 20(120)까지 내려갔다. 파리에서는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날이 19일 연속돼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파리나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한겨울에도 영하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당시 추위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상학자는 발트해의 보트니아만에 자리잡은 시베리아 유형의 고기압이 남쪽으로 북극권의 찬 공기를 내려보내 유럽 대륙 거의 전체를 냉각시켰다고 분석한다. 그렇지만 유럽 전체가 똑같은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영국네덜란드프랑스 북부 지방보다는 지중해 연안지역이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터키까지 피해가 미치지는 않았다. 북유럽에서도 덴마크와 스웨덴이 극심한 추위에 떨었고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순드(Sund) 해협이 얼어붙었지만 남서쪽에서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는 맹추위를 피해갔다. 추위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다. 프로방스와 랑그독 등 남프랑스 올리브나무들은 거의 다 얼어 죽었고그 후 올리브 재배 면적은 1709년 이전 수준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겨울 작물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어 봄과 여름에 심각한 기근사태를 가져왔다. 추위와 식량 부족은 다시 질병과 높은 사망률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추위는 우선 기관지심혈관 관련 질병을 악화시켰다. 많은 노인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더 심각한 상황은 4월에 시작됐다. 식량 부족은 곧 영양불량 상태를 초래해 많은 병사자가 나왔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부패한 고기나 오염된 음식을 먹다가 소화불량에 걸리고 이질티푸스열병에 시달렸다. 먹을 것을 요구하는 폭동도 빈발했다. 이 현상을 연구한 역사가의 분석에 의하면 17092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155번의 식량 폭동이 일어났고그해 여름에 다시 38번 더 발생했다. 다행히 그 다음 해 농사가 어느 정도 안정돼 더 극단적인 희생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1709년 한 해의 희생자만 해도 엄청났다. 이 해에 굶어죽은 사람은 60만명으로 추산된다. 저명한 역사가 르루아라뒤리는 여기에 더해 출산 감소 20만명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근의 시기에 출산이 줄어드는 것은 잘 알려진 현상이다. 그런 것은 차치하고 실제 사망자만 놓고 보더라도 18세기의 60만명은 인구 비율을 고려하면 오늘날에는 그 세 배인 180만명에 해당한다. 이는 1차대전의 희생자와 맞먹는 수치다. 극심한 겨울 추위는 세계대전만큼의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저온을 비롯한 자연재해는 인간에게 큰 피해를 주지만실제로 얼마나 큰 피해를 당하느냐는 해당 사회가 어떤 식으로 거기에 대비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해마다 태풍과 홍수가 발생하지만 방글라데시가 입는 피해와 일본이 입는 피해는 다르다. 선진국이란 이런 자연재해에 대비한 인프라가 탄탄하게 갖춰진 국가라는 한 역사가의 말은 실로 타당하다. 1709년 루이 14세는 유럽의 패권을 노리고 많은 국가들과 무모한 전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추위와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할 여력도 의지도 없다. 흔히 말하는 대로 천재(天災)는 동시에 인재(人災)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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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엔 식량 남아도는데3억명 굶주리는 인도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인도는 정말로 특별한 나라다. 20세기 중반한 세대 만에 기적 같은 농업 혁신을 이루어 한때 외국에 곡물을 수출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엄청난 기근에 시달렸다. 이 나라에서는 현재도 11억 여명 중 3억명이 굶주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인도는 늘 기근 문제에 시달렸다. 그 이유는 식량 생산이 불충분해서가 아니다. 사실 식량 생산 총량으로 보면 모든 인도인이 충분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빈곤층의 식량 구매력이 부족해서 이 사람들에게 식량이 돌아가지 못하고 수천만t의 식량이 창고에 쌓인 채 썩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의 기근 문제는 농학적인 문제 이전에 정치적 문제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인도는 식량 증산을 국가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그렇지만 인구 증가율이 너무 높아 기근과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64~1965년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네루가 사망하고 파키스탄과 전쟁에 들어가는 동시에 몬순(인도양의 계절풍)이 순조롭지 못해 식량 생산이 20%나 감소한 것이다. 사회적 불균형이 극히 심한 비하르주에서는 10만명이 아사했다. 인도 정부는 급히 1000t의 쌀과 밀을 수입해 위기를 넘겼다. 그러고 나서 그해부터 전력을 다해 '녹색혁명' 사업에 매진했다. 녹색혁명은 농학과 경제학 두 측면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선은 벼와 밀의 생산 증대를 위해 멕시코와 필리핀의 농업연구소에서 선진 농학자들이 개발한 기적의 종자들을 도입했다. 다행히 식량 생산이 크게 늘었다. 이렇게 증가한 곡물 수확을 선용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도 펼쳤다. '인도식량법인(Food Corporation of India)'을 설치해 식량의 구매 · 운송 · 보관 · 분배를 관리했다. '공공분배 시스템(Public Distribution System)'이라는 기구를 통해 16000만가구곧 전체 인도 인구의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지원했다. 처음에 이런 정책은 위험을 감수하며 고수확 품종을 실험해볼 수 있는 중농층 이상에게만 유리해 오히려 농민 간 빈부격차를 확대시킨다는 비판을 받았지만중장기적으로 농업 생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1960년부터 2000년까지 40년 만에 밀과 벼 생산량은 8000t에서 2900t으로 2.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인구는 2배 증가했으므로 전체적으로 식량 사정은 크게 나아졌다. 녹색혁명은 또 다른 혁명들을 동반했다. 지금까지 활용하지 못하던 메마른 땅에 땅콩유채해바라기아주까리 같은 유지작물(油脂作物 · 기름을 짜기 위해 기르는 농산물)이나 면화 등을 재배해 수익을 개선시킨 '황색혁명'축산업을 발전시켜 세계 1위 우유 생산국이 된 '백색혁명'도 일어났다. 이런 성과는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농업상의 성과가 인도의 빈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회적,환경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거나 혹은 새로 생겨난 것이다. 인도 인구의 3분의 1은 여전히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하는 상태다. 이들은 생산성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는 건조지역 주민이거나경제 발전에서 배제된 하층민들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사정이 더욱 악화했다. 강경한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어 각종 보조금 혜택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식량 구입비료와 종자 구입 보조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런 정책에 의존한 인도 농업은 그동안 이룩한 성과를 많이 잃어버리고 생산이 급감했다. 그러는 동안 환경 문제도 심각해졌다. 펀자브 같은 곡창지대의 토양에는 비료와 농약 성분이 깊이 스며들어갔고무리한 관개 방식을 지속하다 보니 세계 최악의 염분화 현상(지하수의 수위가 높아질 때 모세관 현상 때문에 염분기가 지표면에 올라와 쌓임으로써 지력을 떨어뜨리는 현상)이 진행됐다. 국가의 개입이 약해지자 물 관리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농업이 피폐해지자 농민들의 자살이 속출했다. 외국 기업의 국내 진입으로 식용유 제조와 같은 기존 농업 연관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이런 가운데에도 인구는 관성적으로 계속 증가했다. 2%의 성장률을 지속하면 35년마다 인구가 2배로 늘어난다. 2025년에는 인도 인구가 15억명이 돼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결국 인도에 사상 최악의 기근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선은 새로운 차원의 농업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생산력이 높은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는 '초녹색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다른 한편 생산성을 높이면서도 환경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는 '이중 녹색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이와 연관된 것으로 유전공학 발전에 힘입어 빈민들의 영양 문제를 해결해주는 종자 개발도 진행 중이다. 아미노산을 강화한 감자철분을 비롯한 필수영양소들을 두루 갖춘 '황금 벼(golden rice)' 같은 것들이 그런 사례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으로 과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3세계의 빈곤 문제는 과학기술에 의존해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의 문제다. 여성들이 교육을 받지 못해 여전히 다산다사(多産多死)의 인구 구조가 지속되고공평치 못한 분배 결과 대량의 곡물이 창고에 쌓여 있는데도 사람들이 굶는 상황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과학기술의 힘과 정치적 개선이 병행돼야만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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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브라질 이름에 새겨진 허영의 상처

브라질나무 눈물로 물들인 붉은 벨벳귀족이 입던 의류 염색재료로 각광붉게 배어난 땀...수탈의 상징 되기도

15004월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지휘하는 함대가 남아메리카 해안에 도착했을 때그곳에는 석기시대 수준의 주민들이 부족 단위를 이뤄 살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곧 이 광대무변의 땅을 자신의 영토로 선언했다. 브라질이라 불리게 된 이 땅은 19세기에 독립할 때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았다. 브라질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늘 안개에 싸여 있어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7년에 하루만 모습을 보인다는 아일랜드 신화 속의 섬 브라질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브라질나무에서 국명이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유럽 선원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브라질나무가 널려 있었다. 원래 브라질나무란 아시아에서 자라며 붉은색 염료 물질을 가진 다른 나무를 가리켰다. 가루 형태의 이 염료는 고급 직물 염색에 쓰이는 고가 상품이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에서 비슷한 종류의 나무를 발견한 데다 여기에서 더 고급스러운 염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 나무를 베어 유럽에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나무를 브라질나무라 부르게 됐고 조만간 이 지역의 이름이 아예 브라질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어로는 이 나무를 파우 브라질(pau brazil)이라 하는데 '파우'는 막대기라는 뜻이고 '브라질'은 잉걸불을 가리키는 '브라사'(brasa)에서 나왔다고 한다. 페르남부쿠 지방에서 많이 난다고 해서 파우 페르남부쿠라고도 부른다. 사실 요즘처럼 많은 색을 사용하게 된 것은 19세기 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인공 염료를 개발한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나무 곤충 조개 광물 등에서 얻은 천연 염료로 색을 냈는데 이런 염료들은 대개 지독히 힘든 노동을 통해 아주 소량만 얻는 귀중한 물질이었다. 그 때문에 아름다운 색깔은 그 자체가 부와 권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국왕이나 대귀족고위직 사제들만 특정한 색의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제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엄청난 부를 쌓은 상인이 귀족 색깔의 옷을 입으려 하고 이에 대해 귀족들이 '사치제한법' 같은 것을 만들어 한사코 막으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로마 황제 네로는 자주색이 황제의 색이므로 누구도 이 색을 사용하지 못하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색깔이 신분 · 계급의 문제가 된 것이다. 브라질나무에서 얻는 붉은색(Natural Red 24) 염료인 브라질린(brazilin)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기를 얻던 최고급 물질이었다. 이 염료는 고급 직물의 염색에도 쓰이고 화가의 물감이나 붉은 잉크에도 들어갔다. 문제는 이 나무를 가공하는 과정이 도저히 사람이 하기 힘든 고역이라는 데 있었다. 염료를 만들려면 대패질을 해서 가루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나무가 너무 단단해 대패질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일반인 중에 월급을 받고 이 일을 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네덜란드에서는 이 일을 교도소 재소자에게 시킨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사역의 원칙은 아주 단순했다. 재소자들은 하루 종일 브라질나무를 대패질해 톱밥을 만드는데 저녁에 그 양을 재서 규정량을 넘기면 밥이 나오고 그렇지 못하면 굶는 것이었다. 불쌍한 재소자들은 오직 밥을 먹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대패질을 해야 했다. 이 때 날리는 붉은 가루가 땀에 섞이면 마치 피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들이 입는 우아한 벨벳 의류 뒤에는 이처럼 가혹한 착취의 역사가 어려 있다. 인력뿐 아니라 자연의 개발과 착취 역시 과도한 지경에 이르렀다. 브라질 염료가 갈수록 인기를 얻자 이 나무가 대량으로 벌채됐다. 이는 원래 포르투갈 국왕의 독점 사업이었지만 무허가 사업자들도 달려들었고 이 나무를 운송하는 선박을 노리는 해적들도 출몰했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벌채를 하다보니 해안가와 내륙지방 곳곳에 자생하던 이 나무들도 18세기부터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브라질나무는 소위 후계림(後繼林 · 화재나 나무 전염병벌채 등 숲을 교란시키는 요인이 발생한 이후 오랜 기간이 지나 원래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 중간적인 상태에 있는 숲)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어서 생장 조건이 까다로운 편이다. 자연 상태라면 그런 조건을 갖춘 곳에서 서서히 자라나겠지만 대량으로 벌채하고 난 후 인공적으로 숲을 복원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현재 브라질나무는 세계자연보존연맹에 멸종위기종으로 등록돼 있다. 브라질나무는 현악기의 활을 만드는 최적의 재료이기도 하다. 조만간 이 나무의 거래가 공식적으로 금지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의 활을 다른 재료로 만들어야 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 국제 페르남부쿠나무 보존계획 같은 기구에서 이 나무의 보존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 이 기구의 회원들 대부분은 현악기 활 제조업자들이다. 만일 이것마저 실패로 끝나면 탄소섬유로 만든 활을 써야 할 것이다. 혹시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미묘하게 달라지게 되는 건 아닐까. 500년 전 포르투갈 선원이 브라질 해안에 도착한 사건은 귀족들의 옷을 우아한 색으로 물들이는 일로부터 불쌍한 재소자들의 피땀 어린 노동을 거쳐 바이올린 연주자의 손끝에서 춤추는 활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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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들의 음료` 초콜릿

카카오콩 100개의 가치는 노예1명이었다.마야인에겐 신성함의 상징이자 화폐중세 유럽에선 수도사·귀족의 사치품

1727년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폰 린네는 카카오를 테오브로마 카카오(Theobroma Cacao)로 명명했다. 이는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원래 의미했던 그대로 '신들의 음료'라는 뜻이다. 카카오나무를 처음 재배한 사람들은 서기 600년 즈음부터 1000년까지 번영을 누렸던 마야인들이었다. 이때 카카오는 신성함의 상징이었던 게 분명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12일이 되면 카카오를 선물하고성년식을 치를 때면 꽃잎을 넣은 빗물에 카카오 가루를 녹여 몸에 발라준다. 죽은 사람의 무덤에도 카카오 콩을 담는 그릇을 부장품으로 넣었다. 신성한 가치는 곧 세속적 가치로도 전환됐다. 카카오 콩은 마야 사회에서 가장 귀한 상품이자 동시에 교환화폐 역할을 했다. 노예 한 명은 카카오 콩 100토끼 한 마리는 10개와 교환됐다. 이 상품은 카누를 이용해 마야 전 지역에 소통됐다. 마야 문명은 아직도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원인에 의해 10세기 즈음 갑자기 쇠락해 갔다. 그 후 14~16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아스텍 문명에서 카카오 콩이 다시 등장했다. 이곳에선 카카오나무를 '카카후아틀'이라 부르고 그 음료를 '소코아틀'이라 불렀다. 아스텍어로 '쓴 물'이라는 뜻을 지닌 '소코아틀'이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영어의 초콜릿(chocolate)이나 불어의 쇼콜라(chocolat) 같은 단어들이 나왔을 것이다. 소코아틀을 만드는 법은 이렇다. 카카오 콩을 볶은 다음 맷돌로 갈아 물에 갠다. 여기에 옥수수 가루용설란 꿀피망바닐라를 비롯한 향신료를 첨가한다. 이 용액을 거품이 일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나무 도구로 친다. 아스텍 문명에서도 이것은 신성한 음식이었다. 아스텍 신화에 의하면 낙원의 정원지기인 날개 달린 뱀 케찰코아틀이 지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코코아나무를 주었다. 비의 신에게 부탁해 그 나무를 키우고여인들을 시켜 열매를 갈아 음료를 만들게 했다. 이 음료는 무엇보다 황제와 귀족혹은 전사의 음료였다. 목테수마 황제는 금으로 만든 잔으로 하루 50잔씩 마셨다고 한다. 아스텍 문명의 실상은 무력으로 정복한 많은 피지배 집단들의 연맹체에 가까웠다. 후일 유럽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쉽게 동맹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원한에 사무친 피지배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에는 주변 각지의 피정복민들이 바치는 카카오 콩이 매년 20~30t씩 들어왔다. 1504년 콜럼버스가 네 번째로 아메리카 대륙에 찾아왔을 때 온두라스 해안에서 인디오 추장으로부터 카카오 콩을 선물받았다. 최고의 물품을 선사한다는 의미였을 테지만 정작 콜럼버스는 그 가치를 전혀 몰랐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인 1519코르테스가 목테수마 황제로부터 카카오 콩을 받았을 때에는 이제 그 의미를 감지했을 것이다. 2년 뒤그가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했을 때 황궁의 지하 창고에는 2만개의 카카오 콩이 보관돼 있었다. 그는 이 중 일부를 유럽의 황제인 칼 5세에게 보내면서 "행군하는 병사가 한 잔만 마셔도 하루 종일 힘을 내게 하는 음료"라고 설명했다. 유럽에 들어온 카카오는 병사보다는 주로 수도원 수사들의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 다만 음료 제작법이 조금 수정돼 사탕수수 설탕계피후추정향 등이 추가됐다. 핫초콜릿이라 부르게 될 이 음료는 더 달콤하고 향이 좋은 데다 칼로리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특히 금식 기도 기간 중에 이 음료를 마시면 기갈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건 금식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해 1569년 교황 피우스 5세는 이 음료의 복용은 금식을 깨는 것이 아니라는 공식 결정을 내렸다. 수도사들은 이것이 '영혼의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음료라고 주장했다. 영양학적 분석에 의하면 초콜릿 안에는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신경전달 물질이 들어 있다고 하니 16세기 수도사들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조만간 이 음료는 종교 영역에서 벗어나와 왕실 사람들과 귀족부유한 부르주아들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사용됐다. 마드리드에서는 핫초콜릿 가게들이 생겨났다. 곧 스페인 음료는 프랑스 왕실로 전파됐다. 루이 13세와 결혼한 안루이 14세와 결혼한 마리-테레즈 모두 스페인 출신으로 핫초콜릿 '중독자'에 가까웠다. 루이 14세의 애첩 중 한 명인 멩트농 부인도 이 부드러운 음료의 맛을 배워 축제일에 베르사유궁에서 핫초콜릿을 마시도록 했다. 당시는 무엇이든 궁정에서 인기를 얻으면 곧 전국의 내로라하는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따라하는 것이 관례였다. 베르사유와 파리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조만간 전 유럽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기호품이 됐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상황 변화에 능통하게 적응해 전 유럽에 코코아를 판매하는 중심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초콜릿은 화려한 변신을 시작했다. 빈에서는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 초콜릿'을 내놓았고이탈리아에서는 사랑의 힘을 배가하는 음료로 애용됐다. 카사노바가 대표적인 예다. 스위스의 앙리 네슬레는 농축 우유와 초콜릿을 섞어 밀크 초콜릿의 대부가 됐다. 프랑스의 약제사 므니에는 쓴 약에 초콜릿을 입히는 법을 개발했다가 아예 초콜릿 정제(새알 초콜릿)를 개발했다. 수요가 늘자 카카오 생산도 세계 식민지 전체로 확산됐다. 멕시코 원산이었던 이 상품은 오늘날 가나(세계 1위 생산국) 나이지리아 카메룬 등 아프리카 지역과 남미의 브라질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신들의 음료는 어느덧 세계인의 기호품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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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조개화폐가 어떻게 아프리카까지

그래픽=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인류사의 초기부터 수없이 많은 물품들이 돈으로 사용됐다. 금 은 구리 주석 같은 금속이 많이 쓰였지만 이 외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보리고대 그리스에선 소사하라 지역에선 암염일본에선 쌀아메리카에선 비버 가죽2차대전 직후 독일에선 담배가 화폐 역할을 했다. 이런 상품화폐 가운데 가장 오래 전부터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쓰인 것이 조개화폐다. 조개가 화폐로 쓰인 사례는 중국 인도 아프리카 호주 아메리카 등 거의 모든 대륙에서 찾을 수 있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의 비스마르크 제도에서는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 조개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아무 조개나 다 화폐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카우리'라 불리는 조개(개오지)가 가장 널리 쓰였다. 이 조개는 인도 남서쪽의 몰디브 제도에서 많이 생산됐다. 놀라운 점은 이곳에서 나는 카우리 조개가 벵골 지방이나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아프리카에까지 수출됐다는 사실이다. 14세기 기록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 몰디브 제도의 카우리 생산과 아프리카 수출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몰디브 제도에선 조가비를 화폐로 사용한다. 그곳에선 조가비 100개를 야쓰야흐700개를 팔12000개를 카티10만개를 부쓰투라 한다. ()흑인들도 자기 나라에서는 조가비를 화폐로 쓰는데말리와 주주에서는 금화 1디나르에 조가비 1150개를 거래하는 것을 보았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정수일 옮김)사실 중국에서는 이 조개가 아주 먼 고대부터 쓰였다. 고고학자들은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드럼 모양의 용기에 카우리 조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이때 이 조개가 화폐로 쓰였는지는 불명확하다. 부장품이나 의례용품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이 조개의 모습이 여성의 성기와 너무나 닮아 생산과 풍요를 상징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종교적 · 상징적 가치의 상징은 결국 세속적 가치를 나타내는 데도 쓰였을 테지만정확히 언제부터 이것이 화폐로 쓰였는지는 불명확하다. 원대와 명대에 카우리 화폐가 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전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다. 다만 재() () () (貿) () () 등 재물과 관련한 많은 한자가 조개패 변을 갖고 있는 것이 조개화폐의 사용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 보배 역시 어원은 '보패(寶貝)'라 한다. 중국 남부의 윈난(雲南) 지방에서는 17세기까지도 일상생활의 소액 거래에서 카우리가 널리 쓰였다. 몰디브산 카우리가 시암과 버마를 지나는 육로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17세기 중엽에 카우리가 퇴출됐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지역 경제가 크게 융성하자 카우리 같은 저급 화폐보다는 더 발전한 화폐가 필요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면 카우리의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에 불편했던 것 같다. 또 이 시기에 윈난 지역이 중국 문화권에 흡수됐는데지배의 상징으로서 중국식 화폐 주조를 받아들였다는 점도 고려할 요소다. 몰디브에서 생산한 카우리가 점점 더 아프리카 방면으로 많이 수출돼 윈난 지역으로 들어오기 힘들어졌다는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몰디브산 카우리가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수출된 것은 일견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수천를 넘는 그 먼 지역까지 전해졌을까. 아마도 초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자체 생산한 다른 종류의 조개화폐가 쓰이다 나중에 몰디브산 조개화폐로 대체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론한다. 몰디브에서 워낙 대량으로 채취한 까닭에 단가가 아주 낮아 그토록 먼 거리를 이동해서도 현지 조개화폐보다 싼 가격에 공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가 화폐가 고가 화폐를 밀어내는 일종의 그레셤의 법칙이 작용한 셈이다. 처음 몰디브산 조개를 아프리카에 수출한 사람들은 북아프리카 상인이었지만아시아의 바다에 유럽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수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연결돼 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영국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의 카우리 무역이 큰 수익을 내는 것을 보고 여기에까지 손을 댔다. 그들은 큰 배에 바닥짐(ballast)으로 카우리를 실어 본국에 들여왔다가 아프리카로 재수출했다. 마침 노예무역이 대규모로 진행돼 이에 대한 결제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 시기에는 팜오일 무역과도 연결됐다. 이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 계속 카우리가 아프리카에 들어와서 해당 지역의 화폐로 쓰였다. 카우리는 워낙 소액 화폐였기 때문에 같은 금액의 거래에도 금이나 은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소 한 마리를 사려면 카우리 몇 만개를 주어야 하므로 그것을 세고 운반하는 데 꽤나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점 외에는 원론적으로 조개라고 해서 금이나 은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그 지역 경제를 훌륭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16세기 이후 세계 경제를 활성화시켰다고 거론되는 은과 비교해 보자.은은 멕시코와 페루에서 대량 생산돼 유럽으로 들어갔다가 그중 일부가 아시아로 송출돼 현지 물품과 교환됐고해당 지역에 남아 화폐로 사용됐다. 몰디브에서 생산된 카우리는 유럽으로 갔다가 아프리카로 재수출돼 노예나 팜오일과 바꿔졌고 현지 화폐로 쓰였다. 양자 간에 본질적 차이는 전혀 없어 보인다. 고대 중국으로부터 20세기 초 아프리카까지 이 민망한 모양의 조개는 다양한 사회문화 현상과 결합하면서 동시에 세계 화폐의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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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기초 `애국적인 해적`이 일궜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영국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에 최강대국으로 군림했지만 사실 중세까지는 보잘것없는 변방의 2류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국의 국운이 꽃피어나기 시작한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 시대였다. 장차 세계 최대의 식민제국으로 성장할 기반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영국은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갔다. 그런 움직임의 선두에 서 있던 세력은 다름 아닌 해적들이었다. 존 호킨스프랜시스 드레이크월터 롤리 같은 인물들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해적이 됐다. 닐 퍼거슨은 그의 저서 제국에서 이 시기 영국을 아예 '해적국가'로 규정하는데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영국이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 최강의 식민세력인 스페인을 눌러 이겨야 했다. 스페인은 중남미 대륙의 거의 대부분과 플로리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아시아에도 필리핀이라는 식민 거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일 대영제국이 그렇게 주장하기 이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1558~1598)가 먼저 "내 영토에는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특히 멕시코와 페루에서 생산되는 금은은 스페인 왕실의 소중한 수입원이었다. 아메리카의 귀금속은 카르타헤나베라크루스놈브레 데 디오스 같은 항구에서 선적돼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의 세비야나 카디스 항에 들어왔다. 해적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탐나는 먹잇감이라 할 만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16세기 내내 앙숙이었다. 스페인이 가톨릭의 최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반면 영국은 독자적인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다음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직접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라도 양국 선박들은 공해상에서 서로 상대방 배를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국왕은 민간업자에게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해 해적 행위를 공식화했다. 더 나아가 국왕이 '해적 사업'에 투자하는 일도 빈번했다. 존 호킨스가 그처럼 국왕의 호의를 입어 해적사업으로 성공한 초기 사례 중 하나다. 그는 15644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했다. 이 사업에는 전국의 대귀족들이 출자했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도 자신의 700t급 선박 '지저스(Jesus)' 호를 선단에 참여시켰다. 호킨스는 베네수엘라에서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탈해 돌아왔다. 이 사업의 수익성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그는 같은 사업을 한번 더 시도하게 됐다. 1567년 호킨스는 다시 6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로 향했는데이때 그의 조카인 드레이크도 동행했다. 그렇지만 해적질이 항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베라크루스 항에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은 16척으로 이뤄진 스페인 선단과 조우했다. 스페인 배들의 포격을 받아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나포된 후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이 사건으로 양국의 외교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에 복수하고자 절치부심했다. 그는 안틸레스 제도에서 밀수 행위를 여러 차례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지리와 바다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1572년 국가로부터 약탈 허가를 받은 다음 선단을 이끌고 스페인 식민지로 향했다. 그가 노린 곳은 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캐낸 금은을 선적하는 중심지인 놈브레 데 디오스 항구였다. 그는 단 몇 시간의 공격으로 도시를 정복하고스페인 지사의 관사에 보존돼 있던 100만파운드에 달하는 금진주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재화 획득으로 만족하지 않고부하들을 이끌고 다리엔 지협을 걸어서 넘는 특별한 모험을 시도했다. 이는 60년 전에 스페인 모험가인 발보아가 시도해 유럽인으로는 처음 태평양을 본 행위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뱀이 들끓는 밀림지대를 헤치고 나아가 드디어 그도 감개무량하게 태평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언젠가 태평양 위에 영국 배를 띄우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영국 해적의 애국적인 기도는 6년 뒤에 그대로 실현됐다. 여왕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을 탐험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허락해 주었다. 드레이크는 5척으로 구성된 자신의 선단을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했다. 심지어 금으로 된 식기까지 갖췄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국의 위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은 다른 나라 배가 태평양에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오가는 배들은 상대적으로 무장에 소홀했다. 드레이크가 태평양에서 손쉽게 '카카푸에고' 호를 나포한 것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갤리온 선에는 26t의 은8만파운드의 금20만파운드의 보석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드레이크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아메리카를 탐험했고샌프란시스코 부근에 상륙해 인디언과 만나기도 했다. 태평양을 횡단해 몰루카 제도를 방문한 다음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일주 항해를 마친 인물이 됐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민족 영웅이었지만 스페인인에게는 악마 같은 괴물로 비쳤다. 스페인은 영국 측에 그를 처벌할 것을 요청했지만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히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골든하인드 호에 직접 올라가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 시기에 해적은 국가를 대신해 적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반관반민의 사업자들이었다. 초기에 제국의 형성은 바로 이런 애국적인 악당들에 의해 시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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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남해원정 30, 들여온 건 동물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근대 세계사는 바다 쟁탈전으로 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세계사의 패권을 차지하느냐는 결국 인도양과 대서양태평양을 누가 지배하는가에 좌우됐다. 근대 초에 이뤄진 대양의 지배가 그 다음 시기인 제국주의 시대에 대륙의 지배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 현대사의 패자(覇者)로 등극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서구가 강력한 우승후보였을까전혀 그렇지 않았다.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최고의 해상 세력은 명 제국이었다. 과거 중국이 강력한 해양력을 보유한 제국이었다고 하면 낯선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지만실제 대부분의 제국은 강력한 육상 세력이자 동시에 강력한 해상 세력이었다. 로마가 그랬고페르시아나 무굴 제국이 그랬으며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해양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유명한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이다.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일찍 거세를 당해서 그런지 신장이 2m에 달하는 거구인데다가 문무 양쪽으로 출중한 능력을 겸비했고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에게 거대한 함대를 구성해 인도양 세계를 탐사하도록 명령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행해진 이 원정은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정화의 선단은 60여척의 초대형 선박을 포함, 모두 300척이 넘는 배에 3만명의 장병이 동원된 가공할 수준이었다. 이 선단의 중심을 이루는 대형 선박은 황제의 하사물이나 황제에게 올리는 예물 같은 보물을 나르는 선박이라는 의미에서 '보선(寶船)'이라 불렸다. 이 배는 길이 137m선폭 56m9개의 돛대를 갖춘 약 3000t급의 배였다. 현대인에게는 이 정도의 배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당시 기준으로는 '날아다니는 섬'으로 신화화될 정도로 엄청난 구조물이었다. 이 배는 산업혁명 이후 영국 해군이 초대형 전함을 건조하기까지 세계사에서 최대의 배였다. 콜럼버스가 타고 간 배가 대체로 테니스코트 한 면 크기였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정화의 선박이 얼마나 엄청난 크기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정화 선단은 30년에 걸쳐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30여개국을 방문했다. 그들이 다녀간 곳은 동남아시아 각지와 인도실론아라비아아프리카 동해안 지역에 걸쳐 있다. 심지어는 최근에 1421년 정화 선단이 태평양을 넘어 아메리카에 도착했고캘리포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아마존 지역을 탐험한 후 희망봉을 돌아 중국으로 귀환했다는 소위 '1421년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증거가 부족한 막연한 주장에 불과하지만실제로 정화 선단이 태평양을 건널 정도의 항해 능력은 충분히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초에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단연 중국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항해 능력을 보유한 중국이 실제로 바다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사실 정화 선단이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는 동안 눈에 띄는 결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식민지를 새로 건설한 것도 아니고 재화를 얻어온 것도 아니다. 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에 들여온 것은 기린이나 얼룩말 같은 이국의 동물들이나 타조 깃털 같은 진기한 물품에 불과했다. 그토록 엄청난 자원을 동원한 국책 프로젝트치고는 너무 허망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하고 중국의 해외 원정은 막을 내렸다. 북방 유목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관심이 내륙으로 향하게 된 이후 명나라는 오히려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다.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능력을 보유한 우승후보가 스스로 세계사의 무대에서 퇴장해 버린 셈이다. 같은 시기유라시아 대륙 정반대편에 위치한 포르투갈에서도 바다로 나가는 움직임이 있었다. '항해왕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엔리크는 이슬람 세력을 누르고 아프리카의 금 산지로 직접 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열심히 해상 팽창을 준비했다. 그는 사그레스라는 지역에 일종의 해양연구소 겸 항해 전진기지를 세우고는 항해와 관련된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모아 지식과 정보를 축적해 갔다. 한 인물을 내세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지만인구 100만명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가 짧은 시간 안에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가 광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한 기적적인 움직임에 그가 초석을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화의 남해원정과 엔리크의 사업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고래와 정어리 정도의 차이로 보인다. 1415년에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슬람권의 교역 및 군사 중심지인 세우타를 점령했지만 조만간 이 지역에서 국왕의 동생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공포의 마지노선인 보자도르 곶을 넘어가는 데에만 몇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바스쿠 다가마가 겨우 4척의 배를 이끌고 인도에 도착했다. 출발 당시에는 중국이 유럽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해상세력이 스스로 무대를 버리고 떠난 뒤 무섭게 달려드는 후발 세력이 그 빈자리를 장악해 들어갔다. 조만간 유럽이 대양의 지배자가 됐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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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110년 전에도 `세계의 공장` 이었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과연 중국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인가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언제쯤 일어날 것이고 또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경제사학자들 중에는 과거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같은 책을 두고 당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대륙' 유럽의 여행자가 가장 잘 사는 지역인 중국을 다녀온 기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21세기에 중국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세계사의 정상성(正常性)을 되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경제조사기관 'IHS 글로벌 인사이트'의 자료를 인용, 지난해 중국이 전 세계 제조업 생산액의 19.8%를 점유해 19.4%에 그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제조업 국가가 됐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가 된 것은 19세기 말 이 자리에서 밀려난 지 110여년 만이라고 FT는 보도했다. 경제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중국은 1830년대만 해도 세계 제조업 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제조업 대국이었지만19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의 선구자인 영국에 밀렸다. 19세기 말부터는 미국이 수위를 차지해 왔다. 또 국민총생산(GDP)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지난해 일본을 앞질러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됐고 2025~2030년께 미국을 추월, 세계 최대 경제국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중국 경제가 재도약을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은 1978년 이후다. 그는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등 4대 분야의 근대화를 서두르는 한편 세계시장에 중국 경제를 진입시켰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그런 과정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1984년부터는 도시 부문까지 개혁이 확대돼 그동안 거의 자취를 감췄던 소상인층이 다시 등장했다. '문화혁명' 이후 농촌으로 쫓겨났던 자전거 수리인이발사신발 수선공 같은 사람들이 다시 도시의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4년에는 사유재산이 헌법상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인정받았다. 비교적 자율성을 가진 주식회사들이 활발하게 사업을 벌이고 은행에 대한 국가의 규제도 많이 풀리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인가, 자본주의 국가인가. 용어 사용은 늘 까다로운 문제다. 중국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시장 사회주의'. 마찬가지로 '자본가'라는 말 대신 '애국적인 기업가'라는 말을 사용한다. 특히 이 용어는 현 중국의 국가주의적 상황을 아주 잘 말해 준다. 중국에서 경제 발전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보다는 국가의 위대함과 더 관련이 크다. 사업가들 중에는 당 간부 출신이 많다. 자연히 부패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완전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며따라서 당과 국가는 '잘 나가는 사업가'들을 용인할 수도 있고 언제든 처벌할 수도 있다. 일찍이 브로델 같은 역사가는 중국에서 서구식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황제체제로 대변되는 정치 질서가 경제 질서보다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성향으로 보인다. 이런 식의 경제가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낙관주의자들은 이미 개혁이 오래 지속됐고1997년 위기도 무사히 넘길 정도로 각 부문에서 탄탄한 성장을 지속해 왔다는 점을 들며 중국 경제의 성장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주장한다. 20년 넘게 연 9% 이상의 성장을 지속해 온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비관론자들은 근대화는 미완성인 반면 불균형이 이미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국가 주도 기업들은 대부분 적자고은행은 부실 대출로 위험한 상황이며사유재산 보호도 아직 불확실하다. 성장 가도를 달리는 해안 지역과 뒤처진 내륙 지역 간 격차도 지나치게 벌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한 자녀 낳기를 강요하다 보니 조만간 인구 노령화가 재앙 수준의 문제를 일으킬 염려도 크다. 게다가 노동 조건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다. 탄광 노동자 같은 경우 강제로 억류된 채 임금도 못 받고 심지어 맞아 죽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나서 거의 과거 노예제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렇다면 이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갈수록 격화되지 않을 것인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중국의 경제 자유주의가 정치 · 사회적 자유주의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중국 중산층들의 열망은 소비 확대에 맞춰져 있다. 지나친 부의 과시를 천박한 것으로 여기던 1920~1930년대 부르주아와는 사정이 다르다. 기업가들은 사회 안정과 경제 번영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는 점에서 정부와 의견을 같이한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많이 축출됐거나 통제 상태에 있다. 이런 막무가내식 성장 일변도의 대국 옆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민족의 미래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중국이 세계 1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재앙이 될지,축복이 될지는 많은 부분 우리가 하기 나름일 터이다.

 

대륙과 해양의 경계에서 균형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우리의 미래에는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방향을 잡기 위해 참조할 역사적 경험을 찾아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거대한 터키 제국을 상대로 하며 번영을 누렸던 베니스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강대국들을 조정하며 한때 세계 최고 경제 대국의 지위를 누렸던 네덜란드 같은 사례들을 면밀히 연구해 봄직하다. 역사 연구는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에 지혜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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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침채·딤채가 김치가 되기까지

'세계화'가 조선의 배추김치를 버무렸다.고려 땐 무·가지·오이·부추가 주재료1850년께 서 배추 종자 유입 '토착화'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김치를 먹었을까. 고대부터 채소를 발효시킨 음식이 존재했을 테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김치가 정착한 시기는 조선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문헌에서 김치를 가리키는 용어로는 해(++)()()침채(沈菜) 등이 있다. 아마도 침채(沈菜)의 옛날 발음인 '딤채''김치'가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신문왕 3년조에 폐백 품목의 하나로 나오고''세종실록오례(五禮)에 처음 보인 후 여러 문헌에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저는 날채소를 소금에 절여 차가운 곳에 두어 익힌 것즉 한 번 익혀 먹는 침채류'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러 문헌을 이용해 김치의 발달을 정리한 연구를 보면 고대에 ''식의 김치로 시작했다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침채형 김치가 추가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무 가지 오이 부추 파 등이 주재료였고 양념으로는 마늘 생강 귤껍질 천초 등이 쓰였다. 조선 전기의 수운잡방(需雲雜方)이나 음식디미방같은 문헌을 봐도 김치의 재료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김치 양념 가운데 고추가 없으니 매운 맛이 안났을 테고무엇보다 배추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요즘 많이 먹는 배추 통김치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추김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엽부터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김치 재료로 배추가 보인다. 다만 이 시기에는 널리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본래 배추 재배가 쉽지 않아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좋은 배추가 많이 났다. 이 점 역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09년에 나온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여러 종류의 김치들이 나오지만 여전히 배추 통김치는 보이지 않는다. 배추 통김치를 처음 거론한 책은 19세기 말에 나온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 아마도 중국의 호북지방 원산인 배추 종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한 것은 1850년께로 짐작된다. '배추'라는 말도 '백채(白寀)'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추김치를 일반적으로 많이 먹은 것은 사실상 150년 정도에 불과하다. 윤서석 선생의 식생활문화의 역사에 이 같은 내용이 다 나온다. 양념으로 많이 쓰이는 고추의 도입 역시 중요한 문제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추는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까지 들어왔을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 갔을 때 벌써 고추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항해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인도인들(인디언즉 아메리카 원주민)은 음식을 먹을 때 우리의 고추보다 훨씬 맛이 강한 향신료를 함께 먹는데 이것을 아히(aji)라 부른다. '아메리카에서 고추는 콜럼버스 이전에 수천년 이상 사용된 양념이다. 멕시코의 아스텍인들은 강낭콩과 옥수수를 고추와 함께 먹었다. 그들은 '칠리'라 부르던 고추를 남쪽의 열대지방으로 보급시켰다. 아스텍의 지배 아래 있던 토토나케(오늘날의 베라크루스와 푸에블라 지방) 사람들은 매년 1600카르가스(1카르가스는 약 40)의 고추를 공물로 바쳐야 했다. 고추를 처음 맛본 스페인 사람들은 처음에 이 작물을 '인도의 후추'라는 뜻인 피미엔타 데 라스 인디아스(pimienta de las Indias)라고 명명했다가강력한 맛을 더 강조하기 위해 남성 명사인 피미엔토(pimiento)로 바꾸었다. 16세기 중반 고추가 스페인에 들어와서 음식 맛을 강하게 하는 데 일부 쓰였고 이탈리아로 건너가서는 페페론치토(peperoncito)라는 이름을 얻었다. 곧이어 유럽 전역에 보급되었는데특히 헝가리에서는 개량종 고춧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향신료 파프리카가 탄생했다. 한국이나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에 고추가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추적하기 힘들다.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로는 어떤 식재료가 원산지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는 고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추가 일본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우리 문헌에 그런 식으로 많이 기술돼 있기 때문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0에는 '번초(蕃椒)를 향명(鄕名)으로 고초(苦草)라 한다. 남과(南瓜)는 속칭 호박이라 칭한다. 둘 다 원래 남번(南蕃)에서 나는데 고초를 남번초(南蕃椒)라 하며 호박은 또한 호과(號瓜)라 한다'고 돼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設)20에는 '남번초에는 독이 있다. 왜국에서 처음 온 것이며속칭 왜개자(倭芥子)라 한다'고 돼 있어 일본을 통해 고추가 들어왔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거꾸로 우리나라를 통해 고추가 전래됐다 해서 고려초(高麗草)라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한 · · 일 삼국에 고추가 전래됐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래의 음식 전통과 중국의 배추중남미의 고추가 더해져 우리가 즐겨 먹는 배추김치가 완성됐다.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단군 이래 먹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사실 배추김치는 근대 이후에 생긴 세계화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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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드레이크의 해적활동과 비즈니스

대영제국의 기초 '애국적인 해적'이 일궜다16세기 해적은 '반관반민' 사업자국왕이 허가증 발급·직접 투자도

영국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에 최강대국으로 군림했지만 사실 중세까지는 보잘것없는 변방의 2류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국의 국운이 꽃피어나기 시작한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 시대였다. 장차 세계 최대의 식민제국으로 성장할 기반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영국은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갔다. 그런 움직임의 선두에 서 있던 세력은 다름 아닌 해적들이었다. 존 호킨스프랜시스 드레이크월터 롤리 같은 인물들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해적이 됐다. 닐 퍼거슨은 그의 저서 제국에서 이 시기 영국을 아예 '해적국가'로 규정하는데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영국이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 최강의 식민세력인 스페인을 눌러 이겨야 했다. 스페인은 중남미 대륙의 거의 대부분과 플로리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아시아에도 필리핀이라는 식민 거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일 대영제국이 그렇게 주장하기 이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1558~1598)가 먼저 "내 영토에는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특히 멕시코와 페루에서 생산되는 금은은 스페인 왕실의 소중한 수입원이었다. 아메리카의 귀금속은 카르타헤나베라크루스놈브레 데 디오스 같은 항구에서 선적돼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의 세비야나 카디스 항에 들어왔다. 해적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탐나는 먹잇감이라 할 만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16세기 내내 앙숙이었다. 스페인이 가톨릭 최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반면 영국은 독자적인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다음 양국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직접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라도 양국 선박들은 공해상에서 서로 상대방 배를 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국왕은 민간업자에게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해 해적 행위를 공식화했다. 더 나아가 국왕이 '해적 사업'에 투자하는 일도 빈번했다. 존 호킨스가 그처럼 국왕의 호의를 입어 해적사업으로 성공한 초기 사례 중 하나다. 그는 15644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했다. 이 사업에는 전국의 대귀족들이 출자했을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도 자신의 700t급 선박 '지저스(Jesus)' 호를 선단에 참여시켰다. 호킨스는 베네수엘라에서 엄청난 금은보화를 약탈해 돌아왔다. 이 사업의 수익성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그는 같은 사업을 한 번 더 시도하게 됐다. 1567년 호킨스는 다시 6척의 배를 이끌고 아메리카로 향했는데이때 그의 조카인 드레이크도 동행했다. 그렇지만 해적질이 항상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베라크루스 항에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은 16척으로 이뤄진 스페인 선단과 조우했다. 스페인 배들의 포격을 받아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나포된 후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겨우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이 사건으로 양국의 외교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에 복수하고자 절치부심했다. 그는 안틸레스 제도에서 밀수 행위를 여러 차례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지리와 바다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1572년 국가로부터 약탈 허가를 받은 다음 선단을 이끌고 스페인 식민지로 향했다. 그가 노린 곳은 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캐낸 금은을 선적하는 중심지인 놈브레 데 디오스 항구였다. 그는 단 몇 시간의 공격으로 도시를 정복하고스페인 지사의 관사에 보존돼 있던 100만파운드에 달하는 금진주를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재화 획득으로 만족하지 않고부하들을 이끌고 다리엔 지협을 걸어서 넘는 특별한 모험을 시도했다. 이는 60년 전에 스페인 모험가인 발보아가 시도해 유럽인으로는 처음 태평양을 본 행위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뱀이 들끓는 밀림지대를 헤치고 나아가 드디어 그도 감개무량하게 태평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언젠가 태평양 위에 영국 배를 띄우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영국 해적의 애국적인 기도는 6년 뒤에 그대로 실현됐다. 여왕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을 탐험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허락해 주었다. 드레이크는 5척으로 구성된 자신의 선단을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했다. 심지어 금으로 된 식기까지 갖췄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국의 위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은 다른 나라 배가 태평양에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오가는 배들은 상대적으로 무장에 소홀했다. 드레이크가 태평양에서 손쉽게 '카카푸에고' 호를 나포한 것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갤리온 선에는 26t의 은8만파운드의 금20만파운드의 보석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드레이크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북아메리카를 탐험했고샌프란시스코 부근에 상륙해 인디언과 만나기도 했다. 태평양을 횡단해 몰루카 제도를 방문한 다음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일주 항해를 마친 인물이 됐다. 그는 영국인에게는 민족 영웅이었지만 스페인인에게는 악마 같은 괴물로 비쳤다. 스페인은 영국 측에 그를 처벌할 것을 요청했지만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히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골든하인드 호에 직접 올라가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 시기에 해적은 국가를 대신해 적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반관반민의 사업자들이었다. 초기에 제국의 형성은 바로 이런 애국적인 악당들에 의해 시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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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500해양대국 명나라

정화의 남해원정 30, 들여온 건 동물 뿐3000t급 선박.3만명 장병 동원됐지만인도양 30여개'유람'만 하고 돌아와

근대 세계사는 바다 쟁탈전으로 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세계사의 패권을 차지하느냐는 결국 인도양과 대서양태평양을 누가 지배하는가에 좌우됐다. 근대 초에 이뤄진 대양의 지배가 그 다음 시기인 제국주의 시대에 대륙의 지배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 현대사의 패자(覇者)로 등극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서구가 강력한 우승후보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대 최고의 해상 세력은 명 제국이었다. 과거 중국이 강력한 해양력을 보유한 제국이었다고 하면 낯선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지만실제 대부분의 제국은 강력한 육상 세력이자 동시에 강력한 해상 세력이었다. 로마가 그랬고페르시아나 무굴 제국이 그랬으며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해양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유명한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이다. 무슬림 가문 출신의 환관 정화는 일찍 거세를 당해서 그런지 신장이 2m에 달하는 거구인 데다 문무 양쪽으로 출중한 능력을 겸비했고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에게 거대한 함대를 구성해 인도양 세계를 탐사하도록 명령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행해진 이 원정은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정화의 선단은 60여척의 초대형 선박을 포함모두 300척이 넘는 배에 3만명의 장병이 동원된 가공할 수준이었다. 이 선단의 중심을 이루는 대형 선박은 황제의 하사물이나 황제에게 올리는 예물 같은 보물을 나르는 선박이라는 의미에서 '보선(寶船)'이라 불렸다. 이 배는 길이 137m선폭 56m9개의 돛대를 갖춘 약 3000t급의 배였다. 현대인에게는 이 정도의 배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당시 기준으로는 '날아다니는 섬'으로 신화화될 정도로 엄청난 구조물이었다. 이 배는 산업혁명 이후 영국 해군이 초대형 전함을 건조하기까지 세계사에서 최대의 배였다. 콜럼버스가 타고 간 배가 대체로 테니스코트 한 면 크기였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정화의 선박이 얼마나 엄청난 크기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정화 선단은 30년에 걸쳐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30여개국을 방문했다. 그들이 다녀간 곳은 동남아시아 각지와 인도실론아라비아아프리카 동해안 지역에 걸쳐 있다. 심지어는 최근 1421년 정화 선단이 태평양을 넘어 아메리카에 도착했고캘리포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아마존 지역을 탐험한 후 희망봉을 돌아 중국으로 귀환했다는 소위 '1421년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증거가 부족한 막연한 주장에 불과하지만실제로 정화 선단이 태평양을 건널 정도의 항해 능력은 충분히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초에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단연 중국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항해 능력을 보유한 중국이 실제로 바다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사실 정화 선단이 인도양 세계 곳곳을 누비는 동안 눈에 띄는 결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식민지를 새로 건설한 것도 아니고 재화를 얻어온 것도 아니다. 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에 들여온 것은 기린이나 얼룩말 같은 이국의 동물들이나 타조 깃털 같은 진기한 물품에 불과했다. 그토록 엄청난 자원을 동원한 국책 프로젝트치고는 너무 허망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하고 중국의 해외 원정은 막을 내렸다. 북방 유목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관심이 내륙으로 향하게 된 이후 명나라는 오히려 바다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다.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능력을 보유한 우승후보가 스스로 세계사의 무대에서 퇴장해 버린 셈이다. 같은 시기유라시아 대륙 정반대편에 위치한 포르투갈에서도 바다로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항해왕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엔리크는 이슬람 세력을 누르고 아프리카의 금 산지로 직접 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열심히 해상 팽창을 준비했다. 그는 사그레스라는 지역에 일종의 해양연구소 겸 항해 전진기지를 세우고는 항해와 관련된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모아 지식과 정보를 축적해 갔다. 한 인물을 내세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지만인구 100만명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가 짧은 시간 안에 세계의 바다로 팽창해 나가 광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한 기적적인 움직임에 그가 초석을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화의 남해 원정과 엔리크의 사업을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고래와 정어리 정도의 차이로 보인다. 1415년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슬람권의 교역 및 군사 중심지인 세우타를 점령했지만 조만간 이 지역에서 국왕의 동생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공포의 마지노선인 보자도르 곶을 넘어가는 데만 몇 번의 시도가 필요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바스쿠 다가마가 겨우 4척의 배를 이끌고 인도에 도착했다. 출발 당시에는 중국이 유럽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해상세력이 스스로 무대를 버리고 떠난 뒤 무섭게 달려드는 후발 세력이 그 빈자리를 장악해 들어갔다. 조만간 유럽이 대양의 지배자가 됐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