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제3시집, 문학의 숲 2012)|
류시화 제3시집에 실린 몇 편의 시입니다
바람이 찻집에서
바람이 찻집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지
긴 장대 끝에서 기도 깃발은 울고
구름이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가장 먼 데서 날아온 새에게
집의 안부를 물었지
나 멀리 떠나와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내며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날아간 날개들에게서
손등에서 녹는 눈발들과
주머니에 넣고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불꽃의 씨앗들로
모든 것이 더 진실했던 그때
어린 뱀의 눈을 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길 떠났으나
소금과 태양의 길 위에서 이내
질문들이 사라졌지
때로 주머니에서 꺼낸 돌들로 점을 치면서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지
탄생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어떤 계절의 중력도 거부하도록
다만 영혼을 가볍게 만들었지
찰나의 순간
별똥별의 빗금보다 밝게 빛나는 깨달음도 있었으나
빛과 환영의 오후를 지나
가끔은 황혼과 바람뿐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고독할 때면 별의 문자를 배웠지
누가 어둔 곳에 저리도 많은 상처를 새겼을까
그것들은 폐허에 핀 꽃들이었지
그리고는 입으로 불어 별들을 끄고
잠이 들었지
봉인된 가슴속에 옛사랑을 가두고
외딴 행성 바람의 찻집에서
돌 속의 별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소면
당신은 소면을 삶고
나는 상을 차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에 있어 온
오래된 나무 아래서
국수를 다 먹고 내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
포개 놓은 뒤 당신은
나무의 주름진 팔꿈치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일 것이다
잠시 후면, 우리가 이곳에 없는 날이 오리라
열흘 전 내린 삼월의 눈처럼
봄날의 번개처럼
물 위에 이는 꽃과 바람처럼
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부재하리라
그 많은 생 중 하나에서 소면을 좋아하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던
우리는 여기에 없으리라
몇 번의 소란스러움이 지나면
나 혼자 혹은 당신 혼자
이 나무 아래 빈 의자 앞에 늦도록
앉아 있으리라
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전부인가
이제 막 꽃을 피운
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단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
두 육체에 나뉘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휴식인가 아니면
잠깐의 순간이 지난 후의 재회인가
이 영원 속에서 죽음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
나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경이로워하는 것이다
저녁의 환한 살구나무 아래서
반딧불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당신을 처음 고향 마을에 데리고 간 날
밤의 마당에 서 있을 때
반딧불이 하나가
당신 이마에 날아와 앉았지
그때 나는 가난한 문학청년
나 자신도 이해 못할 난해한 시 몇 편과
머뭇거림과
그 반딧불이밖에는
줄 것이 없었지
너무나 아름답다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해 줘서
그것이 고마웠지
어머니는 햇감자밖에 내놓지 못했지만
반딧불이로 별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반딧불이가 사람에게 날아와 앉곤 했지
그리고 당신 이마에도
그래서 지금 그 얼굴은 희미해도
그 이마만은
환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지
낙타의 생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내가 아는 그는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재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완전한 사랑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자신을 비운
초월적인 사랑에 대해
그러나 완전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겨울의 소매 속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 폭풍이 거세어지자
더 이상 눈보라를 피할 수 없어
날아들어 온
멧새 한 마리를
늙은 개가 못 본 체하고 자기 집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일 년 내내 그토록 잡으려고 쫓아다닌 새를
입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
당나귀
-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1
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 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르둥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 당나귀를 타고 간 적이 있다
세상의 탈것들 다 타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멍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
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것보다도
나는 나를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뒤돌아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자화상
행성의 북반구에서 절반의 생을 보냈다
곧 일생이 될 것이다
서른 살 이후 자살을 시도한 적 없다, 아 불온한 삶
사랑은 언제나 벼랑에 서 있었다
나를 만난 사람은 다 떠나갔다
가족력은 방랑이었다
아버지는 농부였으나 자식은 몇 대 위
유목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새벽부터 길 나서 부지런히 걸었지만 아직 이만큼밖에 오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계속해서 가면 어딘가에 도달하리라는 것이
밑도 끝도 없는 사상이었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고, 정신이 자주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었으므로
그 생각은 아직 유효하다
적들이 사라진 세상
그래서 모두가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세상을 떠나
갠지스 강가에 앉아 있곤 했다
모국어의 영토에 산수유 피었는가 그려 보면서
화장터 불빛 바라보며 삼십 대와 사십 대를 보냈다
고통받은 것은 이질감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의 이물감이었다
밀교를 믿고 성직자보다는 샤먼을 믿고
연어의 회귀를 믿는다
사랑이 끝날 것을 믿고, 그럼에도 사랑보다 오래가는 것은 없음을 믿는다
배추흰나비가 우주와 교감한다는 것을 믿고
그 대신 정치인이 된 혁명가들을 믿지 않는다
자주 기다린다 시를
단어들의 번쩍이는 비늘을
까맣고 까만 밤의 바다에서
集魚燈을 켜고
파도 속에 등 푸른 물고기 때처럼 밀려오는
詩魚들 상상하며
멀리 돌을 던지는 것을 좋아한다
던진 손을 떠나
돌 하나가 자신의 전부를 다해 날아가는 것을
무엇을 일별하고 떠날지 모르지만
죽으면 가벼운 운구가 되기를 바란다, 아 부박한 삶
누구의 어깨에도 짐이 되지 않기를
다만 적멸에 들기를
겨울에 목련의 봉오리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안에 접혀져 있는 흰 꽃들을
어둠이 오면 목력들이 저의 방에서 불을 켜는 것을
이 세상 모든 비유와 상징들을 한곳에 모은다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불가사의한 부재에 대해
내록 산간 지역에 내려진 대설주의보를 뚫고 날아온
겨울새 한 마리
내 늑골 부근에서 성긴 졸음을 졸고 있다
물돌에 대한 명상
그 말 속에 은폐시켜 놓은 것이 있다
어느 시인이 명상은 그저
둥글게 살지는 것 아니냐고 말할 때
보리달마가 둥글게 살기 위해 구 년 면벽하며 앉아 졸지 않으려고
눈꺼풀까지 잘라 냈느냐고 묻기도 뭣해
그의 제자가 둥글게 살기 위해 보리달마의 등 뒤에서 저의 한 쪽 팔을 끊어
눈밭에 던졌느냐고 묻기도 뭣해
물돌 하나를 손에 들어 본다
얼마나 오래 구르고 부딪쳤으면 이렇게 둥글어졌나
얼마나 몸 부비며 눈물 흘렸으면 이렇게 둥글어졌나
손에 들고 있던 돌 내려놓으니
더 무겁다
흙 묻은 손 털지 않는다
이것을 그저 닳아서 둥글어졌다고 할 것이냐
속으로 단단해지지 않은 물돌 보았느냐
물돌 속에 가부좌로 앉은 사람
긴 강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으니
함께 부딪치며 서로를 둥근 아픔으로 깎아 주던
다른 돌들까지도 품고 있으니
자신의 생 내려놓는 데 한 생애가 결렸으니
그래서 둥근 돌에 우리가 기도문을 새기는 것이니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걸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도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그 꽃은
환생의 꽃이니
3
어느 날 너는 경계선 밖에서 전화를 걸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幻 속에서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손가락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네가 있는 여기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신발 뒷굽이 닳아 있는 걸 보면
그는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리를 걸을 때면 나무의 우듬지를 살피는 걸 보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다 주머니에 기도밖에 들어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가끔 생의 남루를 바라보는 걸 보면
그는 밤을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샤갈의 밤하늘을 염소를 안고 날아다니는 걸 보면
그는 이따금 적막을 들키는 사람이다 눈도 가난하게 내린 겨울 그가 걸어간 긴 발자국을 보면
그는 자주 참회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거절한 모든 것들에 대해 아파하는 걸 보면
그는 나귀를 닮은 사람이다 자신의 고독 정도는 자신이 이겨내는 걸 보면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많은 흉터들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이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는 홀로 돌밭에 씨앗을 뿌린 적 있는 사람이다 오월의 바람을 편애하고 외로울 때는 사월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
그는 동행을 잃은 사람이다 때로 소금 대신 눈물을 뿌려 뜨거운 국을 먹는 걸 보면
그는 고래도 놀랄 정도로 절망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삶이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걸 보면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부재가 봄의 대지에서 맥박 치는 걸 보면
그는 타인의 둥지에서 살다 간 사람이다 그의 뒤에 그가 사랑했으나 소유하지 않은 것들만 남은 걸 보면
만약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세탁을 한다면
만약 당신과 함께 지구별 한 골목에서 세탁소를 연다면
당신이 미국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은 동안
나는 세탁법이 불분명한 정치인들을 비눗물 속에 담글 것이다
방사능에 창백해진 양떼구름과 함박눈과 아이들의 헝겊 인형을 당신이 문질러 빠는 동안
나는 입술 튼 강과 기름 무지개 뜬 모래톱을 세척해
점박이 물새알과 거북이 알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당신이 이스라엘과 아랍 성직자들의 묵은 때를 벗기기 위해
강력 세제를 사러 슈퍼마켓에 갈 때
나는 성당 계단에서 잠든 노숙자들의 옷을 빨아
고통의 얼룩들을 제거한 뒤
순백의 겨울 볕에 내다 널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데 지친
산성비에 녹슨 대자대비관음보살과 성모마리아의 어깨를 양철 수세미로 문질러 닦고
세상의 모든 지폐들을 표백제에 담가 숫자를 지울 것이다
미해결된 증오와 불치병과 사랑한 시간이 많지 않은 고독들을 탈수기에 넣고 돌릴 것이다
지속 불가능해진 지속 가능 발전과 파헤쳐진 길들과 공장투성이 시골들을
침묵을 방해하는 소음들과 무의미한 날들과 깊이 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편 가리기 하는 지식인들과 소녀들 납치하는 검은 손들을
오래오래 삶을 것이다
정오쯤 달라이 라마가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와 검정 운동화를 맡기면
우리는 셋이 앉아 버터차를 마시며 그의 호탕한 웃음에
함께 티베트식으로 웃을 것이다
당신이 중국해의 파도 거품들 속에
지느러미가 때어진 채 버려진 상어들의 상흔을 소독해
남극의 얼음 지대로 돌려보내는 사이
나는 빨래 방망이로 일본 고래잡이배들을 두들겨 팰 것이다
멸종 위기에 놓은 붉은머리오목눈이 세발가락도요 흰목물떼새 통사리 꾸꾸리 얼룩새코미꾸리를 가로챈
때에 쩌든 욕망과 무지와 곰팡이 핀 권력들을
세탁소 뒷마당 산수유나무 아래 파묻을 것이다
새가 노래하지만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는
우파와 좌파들의 경색된 뇌를 애벌빨래해 대기권 밖에 내다 널고
당신이 농약과 화학비료 판매상들의 돈을 세탁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농부들에게 나눠 주는 동안
나는 티베트에서 네팔까지 밀고 내려오는 중국제 물건 실은 트럭들을
하수구로 쓸려 보낼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국제결혼 한 처녀들의 슬픈 예복과 머리 장식을
당신이 정성스레 다리미질하면
나는 잠시 가부좌하고 앉아 인디언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제안대로 자정 무렵 세탁소 문을 닫고
근처 공원에 가서 안드로메다 부근의 별자리들을 구경한 뒤
우리는 주말 동안, 혹은 영원의 시간 동안 이 지구 행성을 떠나 있을 것이다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한다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무당벌레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 삶이 더 가벼울 것이라고
더 별의 눈동자와 닮을 것이라고
멀리 날지는 못해도 중력에
구속받지 않을 만큼은 날 수 있다
혼자 혹은 무리 지어 날 만큼은
아무도 그 삶에 개의치 않고
언제든 원하는 장소로 은둔하거나 실종될 수 있다
명색이 무당일 뿐 이듬해의 일을 점치지 않으며
죽음까지도 소란스럽지 않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도착한다
운 좋으면 죽어서 날개하늘나리가 될 수 있고
더 운 좋으면 무로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떤 결망이 기다린다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까
아니, 기꺼이 원하니까
큰 순환에 자신을 내맡기는 기술은
이들을 따를 자가 없으니까
지구에서 일만 오천 일을 머물면서도
내가 배우지 못한 것이 그것이니까
아따금 나는 생각한다, 손등에 날아와 앉은 칠성무당벌레와
삶을 바꾸고 싶다고
나는 아무것도 손해 볼 것 없지만
무당벌레는 후회막급이리라
그에게는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겠지만
나에게는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할 테니까
불혹에
절정의 순간에 이른 절벽의 꽃을 부러워한다
그 비장미를
나이 먹을수록 제 안부터 허무는 느티나무를 부러워한다
그 적멸의 비움을
한여름 퍼붓고 절필한 소나기를 부러워한다
그 초연함을
폐곡선 안에서 나는 새를 부러워한다
그 끝없는 시도를
대패로 깎을수록 속 깊은 결 더 뚜렷해지는 나무를 부러워한다
그 향기 나는 편향을
소나무의 많은 옹이들을 부러워한다
그 상처 진액에서 나는 솔향을
평생을 밭에서 일한 가난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 가린 곳 없는 진면목을
모든 잎새와 풀 속에 깃든 연두를 부러워한다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색을
마침내 갈 곳 없어져 원점으로 돌아간 늪을 부러워한다
그 깊은 어둠을
허허벌판에 파다하게 핀 망초꼿을 부러워한다
그 생명의 아우성을
더러운 도랑에 꽃잎을 던지는 흰 목련을 부러워한다
그 거만한 자존을
흙 속에서 일제히 귀를 세우고 있는 씨앗들을 부러워한다
그 동지애를
가짜 종이돈을 진짜 돈처럼 꼭 쥐고 있는 티베트 할머니를 부러워한다
그 손때 묻은 간절함을
벼랑의 교만을 부러워한다
그 뒤돌아보지 않는 단호함을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한쪽으로 비켜서 있는 이들
봄의 앞다툼 속
먼발치에 피어 있는 무명초
하루나 이틀 나타났다 사라지는 덩굴별꽃
중심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많은 눈물 흘리면서도
비켜선 것들을 위해서는 눈문 흘리지 않았다.
산 자들의 행렬에 뒤로 물러선 혼들
까만 씨앗 몇 개 손에 쥔 채 저만치 떨어져 핀 산나리처럼
마음 한켠에 비켜서 있는 이들
곁눈질로라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비켜선 무늬들의 아름다움이었는데
일등성 별들 저 멀리 눈물겹게 반짝이고 있는 삼등성 별들이었는데
절멱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처럼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