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폴 투르니에의 치유 중에서

슈마허 2012. 2. 10. 14:32

폴 투르니에의 치유, 폴 투르니에, CUP

 

1. 내가 읽는 모든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노력한다. 그와 비슷하게, 환자들은 종종 나에게 선생님께서 내가 하는 말은 무엇이나 경청해 주는 그 인내심에 감복했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 경청은 인내심이 아니고 흥미로움이다. 사물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열중할 만한 흥미로운 대상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호기심으로 삶을 채운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평범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상황 속에 인간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존재한다.

 

2. 임마누엘 무니에르는 자기의 의학, 4계급이라는 연구논문에서 의사는 인격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방법을 사용할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가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대뇌의 전두엽을 뇌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신경 섬유와 함께 잘라내는 뇌엽 절제수술의 경우, 어떤 의사들은 무조건적으로 반대한다. 즉 환자의 성격과 행동, 그리고 감정을 영구히 바꾸어버릴 수도 있는 이러한 개입을 인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은 정신의학에서의 충격요법 사용에 대해서도 역시 비난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의사들은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함으로 새롭게 열리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열광적이며, 그들을 반대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의 잔재일 뿐이라고 본다. 인류 역사상 과학은 비교할 수 없는 이익을 인류에게 가져오기 위해 이와 같은 편견을 극복해 왔다.

 

3. 나는 여기서 피아제의 연구를 참고하려 한다. 그는 이러한 유아적인 논리를 상세히 연구하여, 그것을 전논리’(prelogic)라고 하였다.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는 자기 주변에서 느끼는 호의적인 힘과 악의적인 힘을 인격화 한다. 만일 그가 머리를 책상에 부딪친다면 그는 책상에 악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책상을 때리면서 나쁜 책상!”이라고 소리 지르며 말한다. (……)

원시인들과 어린아이들의 마술적 심리상태는 신경성 환자나 정신병 환자에게서도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신병 환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정신병 환자는 마술적인 관념 속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어, 정신병 환자의 관념은 현실을 떠나 상상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4. 현대문명은 과학만이 인간을 고대의 마술적 또는 종교적 생명관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역사관을 학교에서 배워 흡수하였다. 학교는 공공연하게, 그렇지 않으면 암암리에 그러한 역사관을 공식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그것을 공개적으로 언명하며, 그들의 과학적 활동에 박차를 한다. 그리하여 물리학자, 의사, 법률가,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이 몽상가나 시인이나 철학자나 설교자들보다 인류의 복지에 훨씬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심층심리를 특별히 연구하지 않은 독자라 해도, 과학이 마술 신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이론이 아닌 증거이다. 공신력 있는 일간신문이나 가장 건전한 월간지를 보라. 주술이나 점성술에 대한 광고가 지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점치는 집에 가보면, 과학이 낡은 편견을 극복했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국가가 시행하는 복권추첨이 어디서나 크게 성행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 국가는 마술 신앙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복권 추첨 광고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네잎 클로버라든지 검은 고양이 등의 마술적인 상징물들을 보라. 모든 광고 홍보업자가 그 슬로건과 함께 마술적 방식을 사용한다. 현대 인간이 활자화된 언어의 마술이나 기계의 마술, 국가의 마술, 혁명의 마술에 얼마나 지배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인민을 종속시키고, 비판적인 정신을 막고, 폭도들의 당파적 격정을 방치하고, 그들의 망상적 열광주의를 구사하여 그들이 신격화하고 있는 독재자를 열렬히 환호하며 맞이하는 그것이 마술적 신앙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역시 인간 상호간에 편견을 불어넣어 일체의 객관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도 마술적 신앙이다.

 

5. 어떤 부인이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되는 대로 성경을 펼쳤는데, 자기 문제에 딱 들어맞는 구절이 나와서 그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곤란한 때에도 항상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택된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녀도 역시 마술의 위험에 빠진 것이다.

어떤 젊은이가 옥스포드 그룹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묵상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적어둔 것을 그대로 행했고, 그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임을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적어놓은 명령들을 잘 수행하여, 그 결과로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꿰뚫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묵상에 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오순절 운동 집회에 가서 자기 교회가 성령의 은사’, 특히 신유의 은사를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에 종사하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처럼 병자들에게 안수를 했다. 그가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일을 더 열렬히 신봉할수록 마술의 유혹은 점점 커질 수 있다. (……)

인간이 이성을 택할 것인가, 혹은 마술과 신앙의 혼합을 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버리게 된다. 즉 신비주의적인 갈망을 억누르고 합리주의자가 되든, 그의 이성의 소리를 지워버리고 신비주의자가 되든,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억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연역적 기능과 귀납적 기능이 조화롭게 결합되려면 진정한 딜레마, 즉 마술이든 유일한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놀랍도록 크신 하나님을 다 알기에는 너무도 작은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 하나에 매달려 그것의 중요성이 전부인 것처럼 확대 해석해서 그 위에 삶의 체계를 세우려고 한다. 성경과 교회, 교리, 경험, 명상, 의식, 영적 선물, 그리고 자연의 선물,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이 틀 안에 하나님을 제한시킬 수 없다.

나는 결코 그리스도를 독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모리악은 기록했다.

 

6. 오늘날 의학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기계화되어 있다. 환자와의 진정한 인격적 접촉은 침착함과 시간을 요한다. 한 환자를 열 번, 스무 번, 혹은 그 이상 보더라도, 한 번에 몇 분 정도 보면서, 피상적인 수준 이상의 아무런 대화의 기회도 가지지 못하는 의사가 얼마나 많은가?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면, 환자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공장에서 생산을 위한 일률적이며 단순한 무명의 도구처럼, 영화나 라디오나 정치에 의해 획일화된 집단적 사고에 의해 좌우되는 비인격적인 대중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다시 인격화될 필요가 있다. (……)

복음서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사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살과 피를 가진 존재, 분명히 묘사된 개인, 고유한 성격을 지닌 각 개인의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가득하다.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름을 기록하는 데 유의하고 있다.

 

7. 12장에서 현대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성행되고 있는 학설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를 두 큰 시기로 나누어 원시적이고 마술적인 시대와 근대적이며 과학적인 시대로 보는 견해이다. 인간의 정신에는 귀납적이고 직관적인 기능과 연역적이며 합리적인 기능이 있다. 전자는 내적인 감정과 관련되고, 후자는 지능적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 전자는 주관적이고, 후자는 객관적이다. 전자가 철학자들이 1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후자는 철학자들이 2원인이라고 호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시인은 귀납적이고, 직관적이며, 마술적인 기능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를 찾을 수가 없는 원시인은 마술신앙의 잘못된 해석과 징조에 의한 궤변에 따라 방황한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사물의 의미를 탐구하는 직관적이며 마술적인 기능이 이 과학적 시대에 있어서도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안에 억압되어 있을 뿐이지, 과학이 해답을 줄 수 없는 고민거리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성적 기능이 아무리 팽배해도 이 마술적 기능을 소멸시킬 방법은 없다. 이성적 기능은 막대한 지적 지식으로 인간을 풍부하게 하지만, 인간의 직관적 능력을 억압함으로 그의 내적 생명을 빈약하게 한다. 베르그송이 보여준 것처럼, 참된 창조는 직관적 능력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성적 기능에 의존하면 할수록 내적 생명은 점점 더 빈약해지며, 그 결과로 인간은 창조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기술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인간 문제의 참된 해결은 이 두 가지 기능의 통합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것이 폰 오렐리 박사의 이론이다. 오렐리 박사는 위의 두 역사적 기점에 제3의 시기를 첨가하여, 우리가 바로 제3기의 과도기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첫 번째 시기를 신비적 참여의 시기, 두 번째 시기를 과학적 세계상의 시기, 세 번째 시기를 영적 세계관의 시기라고 부른다.

원시인은 아직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세계와 융합되어 있고, 세계의 힘이 자기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종족이나 자연 속에 신비주의적 경험으로 참여하는 상태이다. 두 번째 시기에서 자의식이 생겨난 인간은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는 한 관찰자가 되고 자연은 그가 관찰하는 외부 대상이 된다. 그 자신이 관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제 세계는 인간이 멀리서부터 응시하는 그림이 된다. 즉 거대한 비인격적인 매커니즘으로서의 과학적 세계상이 된다. 이리하여 인간은 자연 또는 공동체와 결부시켰던 유대 의식을 상실하고 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계승한 위대한 과학적 발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현대인을 고독하고 고뇌에 빠지게 했다. 즉 인간의 마술적 기능에 대한 억압으로 생긴 내적 부조화로 인하여 고민하고, 공동체 의식을 다시 한 번 되찾으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인한 고뇌 때문에 고독하다. 세 번째 시기는 인격 통합의 시기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두 개의 기본적 기능, 즉 귀납과 연역, 사물에 대한 의미의 자각과 사회와 자연에 우리를 묶어 주는 연결 고리, 자신에 대한 자각과 사물의 메커니즘에 대한 자각 등이 통합되는 시기이다.

 

8. 죽음의 공포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 우리는 마음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내면서 전 생애를 보낸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때로 사람들은 잠깐이나마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고 자기 자신을 속일 것이다. 그러나 융과 같은 정신분석의들은, 우리의 의식 깊숙한 곳에 여전히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고대 사람들은 생명의 중심부에 죽음이 있다고 말했다. 의사를 만나러 오는 모든 환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