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백두산 원정기

슈마허 2009. 7. 8. 17:48

백두산 원정기

2009. 7. 2. ~ 7. 5.

제1기 해외원정팀(김재경, 김태욱, 연동호, 이돈혁, 이상민, 이헌섭, 한영진, 이상 가나다순)

 

 

(2009. 7. 2. 수요일)

설레는 마음으로 장도에 오르다.

 

우리 경성7회 산악회 제1기 해외원정팀 7명과 다른 경로로 혜초여행사에 지원한 5명(박경희, 박복란, 김주미 이상 여자 3명, 윤준희, 김재현 이상 남자 2명) 이상 12명은 9시 40분 OZ 303기편에 몸을 싣고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 10시 20분 장춘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원래 비행시간은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으므로 11시 20분 도착이나, 현지 시간이 북경 표준시간을 따라 우리와 경도는 비슷하나(장춘, 연길이 위치한 길림성과 그위 흑룡강성, 그리고 그 아래 요녕성, 이상 3성을 동북 3성이라 하는데 지도를 보면 한반도 머리 위에 위치하고 있음) 우리보다 1시간 늦은 관계로 10시 20분이 되었다.

 

[사진 설명 : 장춘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도착하자마자 현지 가이드(현지 가이드는 연길에 사는 우리 동포임)와 미팅 후 공항 인근에서 이른 점심을 하였다. 하지만 기내식으로 이미 배가 부른데다가 음식이 짜서 모두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승합자동차에 몸을 싣고 7시간가량 달려 백두산(중국명은 장백산, 길림성에 위치하고 있음) 서파코스에 가까운 조그만 산동네인 송강하(松江河)鎭에 도착하였다. 거리는 470Km밖에 되지 않으나 도로가 안 좋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비친 풍광은 드넓은 벌판 그 자체였다. 옛날 우리 부모님들이 일제 때 만주에 가면 가도 가도 허허벌판이라고 하던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그 허허벌판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있고 특히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가이드에게 옥수수가 많은 이유를 물어보니 대부분 고량주의 원료로 쓰이고, 일부는 사료, 일부는 북한에 식량 원조된다는 것이다.

송강하에 가까워지면서 점차로 산세 모양이 나타났는데 수종이 쭉쭉 뻗은 침엽수가 주가 되어 우리네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스칸디나비아의 어느 풍광과 흡사하였다.

송강하는 시(市)라기보다는 우리의 읍, 면 정도(중국에서 鎭은 우리의 읍, 면과 같다고 함)에 불과한 도시로서 인구는 10만이 채 안 되는 조그만 도시이었다. 그래서인지 호텔 시설이 낙후되었고 특히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모두들 불편해 하였다. 저녁은 송강하에서 고려인이 유일하게 운영한다는 곳에서 먹었는데 그런대로 점심보단 먹을 만하였다.

송강하란 곳이 워낙 산동네인지라 가이드도 구경할만한 곳이 없고 위험하다며 만류하였으나 특히 이상민이 우겨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는 연동호를 제하고(연동호는 공항에서 만났을 때 술 냄새가 여전하였고, 차량에서도 자는 시간이 많았음) 나머지 6명은 모두 저녁을 먹고 가이드와 보조가이드(원래는 가이드가 1명이었으나 보조가이드는 연길대학에 다니는 학생인데 방학 중에 일을 배우기 위해 함께 한다고 하였음. 가이드, 보조가이드 모두 남자이고 연령은 가이드 26세, 보조가이드 23세)의 보호(?) 속에 시내를 산책하다가 재래시장에 들러 포장마차에서 양꼬치, 소불알구이, 바나나와 오렌지 등을 구입, 맥주 한잔씩을 하였다. 소불알구이는 특히 이상민이 주문한 것임).

원래 일정에는 첫날 송강하보다 조금 큰, 북파코스에서 가까운 이도백하(二道白河)鎭이란 곳에서 숙박할 예정이었으나 가이드가 내일 일정을 감안하여 송강하로 바꾼 것인데, 가이드의 판단이 결과적으론 정확하였다.

 

 

(2009. 7. 3.)

천지를 가슴에 품다.

 

현지 시간으로 4시 30분에 기상하였다(아까도 얘기했지만 같은 경도에 1시간이 늦다보니 해가 일찍 뜨는 편임). 이른 아침을 먹고 7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8시가 못되어 서파산문에 도착하였다.

서파산문 입구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단체 등산객들로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이 장춘, 연길, 심양 등을 통해 들어온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가이드가 입산허가를 받는 동안(백두산을 서파코스의 5호 경계비 전망대나 북파코스의 천문봉에 있는 전망대에서 천지를 바라보다가 내려오는 관광상품이 아닌, 트래킹을 원하는 모든 등산객들은 1인당 20만 원씩을 지불하고 반드시 입산허가를 받아야 함)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단연 천지 날씨가 좋을 것인지에 쏠렸다.

호텔을 출발하기 전 새벽녘에는 제법 큰비가 쏟아졌다. 서파산문에 도착해서도 구름이 잔뜩 낀 날씨이었다. 특히 어제 자동차를 타고 벌판을 지나오는 동안 비가 오다가도 금방 해가 나고, 천둥, 번개가 내려치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며 만약 최악의 날씨로 천지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모두들 걱정하였다. 가이드 말로는 아무도 천지 날씨를 장담할 수 없단다. 밑에서 암만 비가 내려도 산에 오르면 해가 나있을 수도 있고, 지금 해가 났다가도 금방 악천후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천지 날씨란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일단 산에 올라가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평소 각자가 죄를 많이 짓지 않고 모범적으로 살아왔던 터(?)라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어 천지를 보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입산허가가 길어지는 동안 다음 주제는 오늘 산행을 과연 모두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로 옮겨갔다. 김재경은 과연 낙오 없이 종주할 것인지. 전날부터 김재경과 같은 급으로 우리에게 분류되어 농담을 주고받았던 김태욱, 연동호는 어떤지(특히 연동호는 여정을 출발하기 앞서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함). 이들 3명뿐 아니라 나머지 4명의 경우도 막상 산을 타보면 의외의 복병이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긴장하는 눈치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선 지금껏 2,000m 이상 산을 구경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가이드 말로는 일단 종주를 시작하면 귀환이 불가능하여 죽든 살든 끝까지 종주를 마쳐야 한다고 하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가이드가 입산허가증과 티켓을 가져 와 모두들 보무도 당당히 검표소를 빠져나갔다. 잠시 침엽수림으로 빽빽이 조경된 나무가 깔린, 잘 닦인 보도를 지나 백두산 전용 셔틀버스 정류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30분쯤을 올라 5호 경계비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사진 설명 : 검표소를 빠져 나와 셔틀버스 정류소까지 가늘 길]

 

 

[사진 설명 : 5호 경계비 주차장에서 바라본 1260계단]

 

5호 경계비 주차장은 해발 2,000m에 위치해있는데 그곳까지 가는 동안 차창에 비친 백두산의 모습은 점점 올라갈수록 나무가 없고 초원과 잡목으로 우거지더니 해발 2,000m에 이르러서는 이끼류와 야생화가 군락을 이룰 뿐이었다.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보였다. 주차장에서 20분가량 1260개 계단을 올라 드디어 5호 경계비에 도달하였다.

5호 경계비는 해발 2,200m가 조금 안 되는 곳에 세워진 경계표지로서 북한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북한군 초소가 있다고 한다. 5호 경계비에 오르니 천지가 한 눈에 시원스럽게 조망되었다. 마침 날씨가 구름은 조금 있으나 해가 비춰 천지와 천지를 감싸고 있는 북한, 중국의 봉우리들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조망되어 우리 일행뿐 아니라 모두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진 설명 : 5호 경계비에서 내려다 본 천지]

 

그토록 갈망하던 천지, 언제나 사진 속에서만 바라보던 천지, 중국과 수교가 되기 전에는 전혀 갈 수 없던 곳 천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감격에 겨워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천지에 오르더라도 1년에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40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오늘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을 허용한 것이다.

천지는 말없이 조용히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천지를 감싼 봉우리들을 그대로 머금은 채 발 아래 놓였고, 해발 2,200m 5호 경계비에서 그런 천지를 우리는 가슴에 품었다.

잠시의 흥분을 가다듬고 이제부터 천지를 감싸고 병풍처럼 뾰족이 솟아있는 봉우리들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백두산 트래킹의 시작이다. 우리가 잡은 코스는 서파 트래킹의 시작점인 5호 경계비를 따라 북쪽으로 중국 땅에 솟아있는 봉우리들을 타고 천지를 감상하며 트래킹하는 것으로서, 처음에는 5호 경계비 바로 왼쪽에 뾰족이 솟아있는 마천루(백두산에서는 해발 2,500m가 넘지 않는 봉우리는 봉우리로도 치지 않기 때문에 마천루는 해발 2,500m가 되지 않아 봉우리의 명칭을 얻지 못한 것임)를 우회하여 내려갔다가 청석봉에 오르고, 다시 내려와 중국쪽의 주봉 해발 2,691m인 백운봉에 오른 후 녹명봉, 자일봉, 용문봉을 차례로 오르고 내려 달문 입구에 이르러 천지물가쪽으로 급경사면을 타고 하산하여 천지물가를 감상한 후 장백폭포쪽으로 내려와 온천지역에서 셔틀버스를 승차하면 되는 것이다. 통상 서파에서 시작하여 북파쪽으로 내려오는 트래킹 코스이다.

위 트래킹 코스는 전장 15Km로서 소개된 일정표상으로는 9시간 소요되고, 주로 오전에는 청석봉, 백운봉까지 오르고, 점심 식사후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는데 오전코스가 어렵다고 한다.

그 말마따나 9시경 5호 경계비를 출발하여 1차 난코스인, 깎아지른 청석봉을 오르는데 1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 청석봉에서 천지를 내려다보는 풍경은 5호 경계비에서 바라보는 것과 또 달랐다. 군데군데 더 많은 녹지 않은 눈이 보였다.

청석봉에서 1시간쯤을 다시 내려왔다가 2차 난코스인 백운봉을 오르는데 2시간쯤 소요되었다. 1차 난코스인 청석봉을 오르는데는 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2차 난코스인 백운봉을 오르는데는 정말 힘들었다. 해발 2,000m가 넘는 곳에서 2시간가량을 오르니 아무래도 숨이 더 차고 발걸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인 여자 3명 중 2명이 고산병이 와서 한 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한, 두 발짝 오르다가 쉬길 반복하였고 또 한 분은 머리가 아파 고생하였다. 김재경도 머리가 조금 띵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그런 고산병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백운봉을 오르기 위해 청석봉을 하산하는 동안 갑자기 날씨가 변해 비가 오는 바람에 우의를 착용하고 걸어야 해서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특히 백운봉 막판에는 10m 오르고 쉬고를 몇 번 반복하여 겨우 올랐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중심 잡고 그냥 서있기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강행군을 하다 보니 더욱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럭저럭 오후 1시 30분쯤 다 되어 이돈혁, 이상민 그리고 나 3명은 2차 난코스를 무사히 마치고 백운봉에 도착하였다. 그로부터 한영진, 또 그로부터 김태욱, 연동호, 김재경 등 우리 대원 모두가 속속 도착하였다.

백운봉 정상에서 이돈혁, 이상민 그리고 나 3명은 나머지 대원을 기다려 점심을 먹으려다가 허기지고 추위가 엄습해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 도시락을 먼저 까먹었다. 해가 사라지고 비가 내려 기온이 떨어져서인지 손이 곱아 젓가락질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식은 밥에 고추장 바르고 김 몇 장과 함께 밥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백운봉 정상에서부터 천지는 비구름 때문에 비구름이 지나가면 안 보이고 비구름이 걷히면 보이곤 하였다.

점심 식사후 코스는 오전에 비하면 비교적 쉬웠다. 날씨가 비가 와서 좋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중간 중간 구름이 걷히고 천지가 보였기 때문에 천지를 조망하며 걸어서인지 지루하지 않았다. 천지는 어떤 봉우리에서 보든 한 모양이 아니다. 중국쪽에서 걸어서인지 반대편쪽으로 북한 봉우리들이 적막하게 서있다. 용문봉을 지나서는 북쪽으로 한참을 내려왔다가 소천지 가는 쪽에서 우리는 천지물가를 가기 위하여 달문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달문은 천지물이 유일하게 흐르는 곳이다. 천지는 물이 들어오는 곳이 없다(천지물은 지하수와 빗방울로 채워진단다). 그런데 나가는 곳이 한군데 있는데 그곳이 달문이다. 달문에서 빠진 물은 북한 쪽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이루고, 중국 쪽으로는 송화강을 이룬다.

천지물가가 해발 1,900m이므로 달문입구의 해발을 2,200m 정도로 봤을 때 달문입구에서 달문까지는 300m 가량의 급경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워낙 경사가 가파르고 돌무더기로 되어있어 내려오는 길이 쉽지가 않았다. 백두산 북파코스에서 장백폭포를 보고 960계단을 올라 예전에는 천지물가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KBS 1박 2일팀이 바로 이 코스를 통해 천지물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촬영이 끝난 후 불과 며칠 안 되어 달문입구에서 큰 돌들이 떨어져내려 위험하다며 폐쇄하였다고 한다. 그런만큼 달문입구에서 달문까지 급경사는 위험한 곳이다. 실제로 비가 와서 미끄럽고 또 크고 작은 돌들이 구르다 임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뎠다간 돌들과 함께 구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위에서 잘못하여 여러 돌이 구른다면 밑에 있는 사람은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 생애 처음 내려오는 길이 이렇게 어렵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다. 벌벌 기다시피 내려오는데만 1시간 남짓 소요된 것 같다.

 

[사진 설명 : 달문입구에서 바라다 본 하산길]

 

드디어 4시쯤 그토록 소망하던 천지물가에 닿았다. 우리들이 천지물가에 이르렀을 때는 비도 개었고, 구름은 있으나 주변이 한 눈에 보였다. 천지물가에 서서 손으로 물을 담고 세수도 하고 사진도 찍고 지친 몸을 추스른 후 위를 올려다보니 천지를 둘러쌓고 있는 봉우리들이 실감 있게 다가온다. 저 멀리 반대편으로 북한 쪽 주봉인 장군봉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5호 경계비 전망대에서부터 우리가 지나쳐왔던 봉우리들 하나하나가 가슴 속에 와닿는다. 왼쪽으로는 6호 경계비에서부터 북파쪽 전망대인 천문봉이 보인다. 지금 천지물가에는 우리 일행들뿐이다. 다른 팀은 없었다. 천지물이 조용한 가운데 달문쪽으로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천지물은 수심이 깊고 위는 너무 차서 수영을 할 수 없단다. 원래는 물고기도 살기가 어려웠는데 북한에서 산천어를 방류하여 지금은 산천어가 살고 있단다.

 

[사진 설명 : 천지물가]

 

5시쯤 천지물가를 떠나 장백폭포 쪽으로 960계단을 이용하여 하산하였다. 이쪽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달문입구에서 돌들이 쏟아내려 폐쇄된 곳인데 봉우리에서 천지물가를 내려온 등산객들에 한 해 하산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 960계단은 조선족이 돈을 투자하여 시설하였다고 한다. 960계단이 끝나는 곳에 장백폭포가 시원스럽게 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장백폭포는 남한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수량도 풍부하고 길이도 제법 되는 웅장한 폭포이었다. 그러나 천지를 이미 가슴에 품은 우리들로서는 그리 큰 감흥이 되지 못하였다.

 

[사진 설명 : 장백폭포]

 

장백폭포에서 셔틀버스 마감시간인 6시 되기 전에 온천지역까지 하산하기 위해 서둘렀다. 간신히 모두들 마지막 셔틀버스에 올랐다. 시간이 되면 온천지역에서 온천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되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셔틀버스에 오른 우리 대원 7명은 어느 누구도 낙오됨이 없이 9시간 종주를 마쳤으므로 저마다 뿌듯한 가슴이 되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하였다.

트래킹 중에 등산객 1명이 졸도하였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셔틀버스에서 내려 승합자동차에 몸을 싣고 이도백하의 숙소로 향하던 중 그분이 끝내 숨졌다는 얘기를 가이드로부터 들었다. 사망자는 64살의 남자인데 부부가 함께 등산을 와서 그 험한 백운봉에 오른 후 허기진 몸을 달래려 삶은 계란을 먹다가 그만 계란에 질식사하였다고 한다. 모두들 숙연한 마음으로 3분간 묵념을 드렸다.

가이드 얘기로는 3년 전부터 해마다 한명씩 한국인 등산객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한 번은 실족하여 죽었고, 또 한 번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 역시 부부가 함께 왔는데 벼락이 치는 순간 모두들 납작 엎드렸으나 부인만 귀고리를 차고 있어 벼락을 맞고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백두산에는 기상 때문에 헬기를 띄울 수 없어 사고가 나면 인력으로 호송하여야 하는데 인력으로 호송하다보니 응급한 순간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도백하의 숙소로 돌아와 힘든 숙제를 끝낸 편안한 마음으로 모두들 저녁을 하면서 술을 마시다보니 그만 대취하게 되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발 마사지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후론 기억이 없다.

 

(2009. 7. 4.)

또 하나의 우리 민족이 사는 곳, 연변.

 

국내에서만 있을 때는 으레 연변하면 일자리를 찾아온 조선족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연변은 길림성 중 동쪽에 치우친, 조선족이 집단을 이뤄 거주하는 조선족 자치지역을 말한다. 화룡, 용정, 연길, 왕청, 군춘, 도문 등 6개의 도시를 아우르고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지역에는 조선족이 90% 이상 거주하고 있고 도로의 입간판에 중국어와 나란히 한글이 표기되어있으며 조선족 대부분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운다고 한다. 연변에서 가장 큰 도시는 연길로서 연길은 연변 조선족 자치지역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이다. 연변은 1860년대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이주해와 주거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말투는 북한 말투에 가깝고, 실제로도 연변 지역 조선족들은 지금도 북한은 비자 없이 자유자재로 왕래가 가능하다고 한다. 반면 1988년 올림픽때까지는 남한이란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고, 그러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남한이 선진국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는 연변 지역 조선족들 어느 누구도 이제 남한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7시 숙소인 호텔을 나와 화룡-용정간 고속도로를 내달려 용정을 향하는 중에 잠시 북한에서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고 직접 운영한다는 북한전시관인 묘향산을 들렀다. 묘향산은 100% 북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전시관으로서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2년씩 투입되어 근무한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전시관이지 사실은 장사하는 곳이다. 주로 북한산 술, 담배, 우황청심환, 손으로 직접 수를 놓았다는 자수화 등을 팔고 있는데, 국내 돈이면 뭐든 현찰, 수표, 신용카드 모두 다 통용되었다. 북한인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들쭉술 1병을 4만 원에 구입하였다.

용정 길목에서 천 년 만 년 변함없이 흐르는 해란강을 차창 밖으로 보았고, 또 해란강을 지나치면서 푸른 소나무 한 그루, 일송정을 먼발치서 보았다. 그런데 그 옛날 말 달리던 선~구자는 보이질 않는구나.

용정은 1860년대 북한사람들이 연변으로 이주하기 시작할 때 최초 우물을 팠던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단다. 이곳에는 대성중학, 은진중학 등 그 옛날 일제때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우던 학교가 지금도 남아있다. 대성중학(지금은 용정중학으로 명칭이 변경됨)에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있었고, 일제때 윤동주, 문익환 등 지성들이 이곳 용정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대성중학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을 잠시 들러보고 3만 원을 기부하였다.

 

[사진 설명 : 대성중학교(현 용정중학교) 앞]

 

용정에서 도문으로 이동하는 중에 곰 농장을 들렀다. 중국 정부에서 웅담을 채취하기 위해 3,000마리 반달곰을 사육하는 곳으로 대부분은 방목하였다가 그중 300마리만 회수하여 이곳에 가둬놓고 정기적으로 웅담을 채취한다고 한다. 웅담이 필요한 김재경, 연동호 등이 견학 후 웅담을 구입하였다. 가격은 70정 캡슐 1갑 또는 6병 들이 1갑이 20만 원선...

도문은 두만강 중류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북한의 남양시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도문과 남양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만강은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수량도 평소에는 많지가 않아 맨발로도 건널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비가 와 그런지 시꺼먼 탁류가 상당한 유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가이드 얘기로는 두만강 푸른 물은 이제 옛말이고, 무산인가 하는 곳에서부터 오염되어 있다고 한다. 이유는 북한이 중국에 철이 많이 나는 무산을 조차해줘 그곳에서 각종 오염물질이 강물로 흘러든다고 한다.

도문에서 바라본 북녘 땅은 벌거벗은 민둥산이며 두만강 강가에는 잡목만 무성할 뿐 개미 새끼 하나 얼씬 거리지 않았다. 중국의 도문쪽은 강가에 사람들이 나와 활발한데 북한쪽의 건너편은 주체와 고립의 나라답게 고요할 뿐이다. 그야말로 북한이 통제국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 설명 : 도문쪽에서 바라본 북녘땅]

 

도문과 남양시를 연결하는 철로 하나가 두만강을 가로질러 있는데 가이드 얘기로는 철로의 딱 반이 북한과 중국의 경계란다. 옛날에는 철로의 경계지점까지 관광객이 도보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요즘은 미군 여기자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한 후 아예 철로로 접근하는 것이 통제되었다고 한다.

두만강 역시 반반이 북한과 중국이지만 강은 양쪽이 공동이용하기로 협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쪽에서 많은 한국인 관광객을 포함한 관광객이 보트를 이용하여 북한쪽 강가에 접근할 수도 있다. 얼핏 보아 북한쪽 강가는 잡목만 무성한데 요소요소에 북한군 초병이 매복하여 있다고 한다. 동영상을 촬영하여 가져왔는데 당시에는 몰랐으나 집에서 자세히 보니 정말 잡목이 무성한 사이사이에 북한군 초병의 모자가 촬영되었다.

도문 선착장에서 북한산 명태를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씩을 들었다. 북한산 명태는 짭조름하였으나 막걸리는 너무 달았다.

마침내 마지막 여행지인 연길에 도착하였다. 연길은 연변의 중심지답게 제법 도시 색을 갖추고 있었다. 반듯한 시가지와 이제 막 지은 아파트가 즐비하였다. 이곳 아파트의 가격은 한국 돈으로 5,000만 원 정도인데 이 아파트 1채를 구입하는 것이 연길 사람들의 꿈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벌어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기회가 닿으면 자꾸 한국을 가려고 한단다.

 

 

[사진 설명 : 연길의 시가지]

 

그렇고 보니 이곳 사람들은 한국을 아주 부러워하는 눈치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운이 좋아 용이 되었고 우리 민족 반만년 역사 중에 가장 잘 살게 되었으니 북한도 연변도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곳을 들르면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또 다른 우리 민족이 사는 곳이 연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연변도 북한도 모두 우리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의지하며 자유스럽게 왕래하고 함께 살아야 할 우리 민족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저녁은 연길에 있는 북한식당인 류경식당에서 하였다. 류경식당은 북한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으로서 북한미녀들이 써빙하고 노래도 불러줬다. 저녁후에는 가이드의 소개를 받아 연길에 있는 노래방에서 노래 한 곡씩을 부르며 여정을 마지막을 달랬다.

 

(마치면서)

흔히들 여행은 인간을 한층 성숙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번 여행도 그런 의미에선 한층 성숙하게 만든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선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북한의 가엾은 인민들의 실상을 조금 정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사실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도 지금 우루무치 지역의 소요사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인 동화정책에 따라 . 그들을 향하여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한 아량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백두산이 중국과 북한에 의해 차단되어 있어 백두산을 가는 길이 이토록 힘들고 험난하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 않다. 언젠가 연변, 북한 모두가 우리와 연방제가 되었든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든 우리가 자유스럽게 그곳까지 갈 수 있는 그날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김재경이 백두산을 종주하였다고 하여 다들 백두산을 우습게보면 큰 코 다친다. 특히 이영준, 조하연, 이제 니들은 김재경 앞에선 영원히 깨갱이다.... 아니, 생에 2,000m 이상의 산을 올라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는 김재경 앞에선 산 잘 탄다고 자랑하지 말길...

또 내년도에도 제2기 해외원정팀을 꾸릴 것인데 행선지는 일단 일본 북알프스를 생각하고 있다... 좋은 의견 있음 홈피에 올려줄 것을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