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직의 소유권적 정의이론

슈마허 2009. 6. 10. 16:21

 

o 로베르트 노직은 그의 저서 "Anarchy, State and Utopia" 가운데 유명하게 된 “자유는 어떻게 모범 패턴을 뒤집는가?”라는 제목의 절에서 분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o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부가 분배되어 있는 그런 사회에서 출발해봅시다. 모든 기독교도가 모든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가진 사회라도 좋고, 공산당원이 모든 재산(우리의 개인 몸을 제외한)을 다 소유한 사회라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패턴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부를 가지는 것(그래서 평등한 것)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상적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단 한 번 이것을 건드리는 사건이 생깁니다.

 

o 록 그룹 펄 잼의 순회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그 공연을 보는데 10달러씩 사람들에게서 받습니다. 모두 100만 명이 콘서트에 왔습니다. 공연이 다 끝나자 100만 명의 사람이 그 이전보다 10달러씩 가난해졌습니다. 그리고 펄 잼의 멤버는 그 밖의 다른 사람보다 1,000만 달러가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o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부의 분배는 지금 불평등해졌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요? 정의롭지 못하다면, 왜 그런가요?

 

o 우리는 시작 시점의 분배는 정의롭다는데 동의했습니다. 당신이 선호하는 분배였으니까 말입니다. 출발점에서 각자는 자기가 가진 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그가 선택하는 대로 그 돈을 쓸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행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펄 잼 소속 음악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가요?

 

o 모든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돈을 씁니다. 그들은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샀을 수도 있고, 건포도가 박힌 귀리빵이나 “뉴욕 북 리뷰”를 한 부 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구세군이나 인간성 보존단체에 돈을 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돈에 대하여 정당한 소유권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쓸 수 있는 정당한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부의 분배 패턴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o 분배 패턴이 어떻든 간에, 상이한 사람들이 자기 돈을 쓰기로 작정하고, 또 쓰기 위한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재화나 서비스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기로 하면, 이 패턴은 끊임없이 바뀌어나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펄 잼을 찾아가서 입장료 수입의 얼마를 떼어 주면 그 대가로 콘서트를 선전해 주겠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또는 앨범을 제작하여 판매하겠다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콘서트 입장권을 인쇄하는 가게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o 노직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부의 불평등을 막으려면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성인 간의 자본주의적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 노직은 “사람들의 생활에 계속 간섭하지 않고서는” 분배 패턴을 불변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에 이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돈을 쓰는 것을 계속 중지시키든지, 아니면 계속 -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주는 돈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o 평등의 문제, 그중에서도 특히 평등한 분배의 문제는 늘 끊임 없는 논쟁을 야기해온 주제이었습니다.

흔히들 결과의 평등이니, 기회의 평등이니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결과의 평등은 다양한 사회에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어 내려고 한다면 악몽과 같은 결과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기회의 평등도 완벽한 기회의 평등을 이루어내겠다는 기획은 결과의 평등과 마찬가지로 독재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기회의 평등은 쿠르트 포네쿠트의 단편소설 ‘해리슨 베르게론’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잘 생긴 자들에게는 흉터를 주고, 우아한 자들에게는 수갑을 채우고, 머리 좋은 자들에게는 두뇌 작용에 끊임없는 방해를 가해야만 달성될 수 있는 목표입니다.

 

o 과연 정의로운 분배의 패턴에 관한 이견 없는 합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결국 다원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남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서로가 호양과 배려심 속에서 합의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요즘 우리 사회에서 다시 보, 혁 갈등이 가중되고 있는 것을 보니 씁쓸할 뿐입니다.

6월 9일자 The Korean Times를 보니 매릴랜드대 Jon Huer란 교수분이 우리 사회는 기브 앤 테이크 문화가 정착되어있지 않고 대립하는 두 세력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막후에서 교섭을 감당할 만한 어떤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있지 않아 항상 대립과 갈등에서 타협을 이끌어내는 문화가 실종되어왔다고 진단하고 있군요